[서울역사박물관] 운종가, 조선제일의 번화가
시전은 일제강점기 이전 성읍이나 도시에 있었던 상설점포를 말하는데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수도를 건설할 때 설치하여 국가에서 감독.관리하던 공설시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양을 새로 건설하면서 역사이래 중국의 국가 경영의 기본이 되었던 『주례』의 「고공기」를 참조하여 궁궐과 종묘.사직을 건설하고, 도시를 구성하는 한양도성을 쌓았으며, 도시내에는 행정.사법기능을 갖는 관청을 궁궐 정면 대로인 육조거리에 짓고, 국가경제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공설시장인 시전은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에 지었다. 운종가의 범위는 처음에는 육조거리에서 육의전이 있던 종각부근까지였으나 상업이 발달하면서 동쪽으로 계속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는 유교사회로 상업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필요한 최소의 물자만 시장에서 거래하는 사회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시전의 원래 기능은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데 있었지만, 수도에 인구가 집중하고 민간판매가 늘어나면서 수도 한양의 대표적인 시장으로 바뀌었다. 시전에서는 다양한 물품이 거래되었으며, 비단을 취급하던 선전을 비롯하여 면주전(명주), 면포전(무명), 저포전(베), 지전(종이), 어물전이 대표적인 상점으로 육의전이라 불렀다. 상업이 활성화되지 못했던 조선사회에서 의.식.주에 해당하는 직물을 거래하는 상점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운종가는 국가에 물건을 납품하는 시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시장이었기때문에 오늘날의 시장처럼 물건을 바깥에 진열해 놓고 상품을 거래하는 것이 아니라 길거리에서 호객꾼들이 손님을 가게로 불러서 거래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시전상인들은 금난전권이라는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때문에 활발한 시장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 같다. 조선후기 공물을 쌀로 납부하는 대동법의 시행으로 상업이 급속도로 발전했으며, 구한말 이후 숭례문을 비롯하여 성문주변에 시장이 형성되면서 운종가는 상업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제일의 번화가, 운종가
운종가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흩어지는 거리라는 뜻으로, 흥인지문과 돈의문을 가로지르는 동서대로에 있었다. 운종가의 양쪽으로는 국가에서 지은 장랑이 이어져 시전으로 쓰였다. 본래 시전은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점차 민간 판매가 늘어나면서 한양의 대표적인 상점가가 되었다. 운종가의 중심에는 종루가 있었다. 종루는 큰 종을 달아 도성의 대문을 열고 닫는 때를 알리는 시설인데 서울의 한가운데를 가리키는 표지이기도 했다. 종루의 양쪽 옆으로는 여섯곳의 큰 상점인 육의전이 있었으니, 각각 비단을 취급했던 선전, 명주를 파는 면주전, 면포전(무명), 저포전(베), 지전(종이), 어물전 등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오늘날 종로에 해당하는 운종가는 조선의 수도 한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큰 길을 중심으로 그 양쪽에 국가에 물품을 납품하는 육의전을 비롯하여 시전들이 들어서 있었다. 대체로 육조거리가 끝나는 광화문 4거리에서 시작하여, 종각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광통교를 지나 숭례문까지 길이 이어진다.
광화문 4거리에서 동.서로 연결되는 오늘날 종로. 지금은 상업 중심지로서의 기능은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등에 넘겨주고 중심부로서 주로 사무실들이 들어서 있다.
수선총도, 19세기중엽, 한양 도성 안 지도로 '수선'은 서울을 의미한다. 종로와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길에 시전들이 표기되어 있다.
수선총도에 표시된 운종가 시전들
우산전, 운종가의 서쪽 초입에 자리하였으며 우산을 판매하였다.
치계전, 주로 말린 꿩고기를 취급하며, 생선전 옆에 있었다.
면포전, 은목전 또는 백목전이라고도 하며, 무명과 은을 거래했다.
선전, 육의전 중에 으뜸가는 조선 제일의 점포로 수입 비단을 독점취급하였다.
은국전, 술을 만드는 누룩을 파는 곳으로 누룩의 흰색이 은과 같아 은국이라 하였다.
어물전, 종루 주변에 자리한 내어물전과 서소문 밖의 외어물전이 있었으며, 건어물을 팔았다.
염상전, 종묘 근처에 있었으며 소금을 판매하였다.
생선전, 조기.고등어 등 다양한 생선을 판매했다.
사기전,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사기그릇들을 취급하였다.
면주전, 중국산 비단을 판매하는 선전과 달리 면주전에서는 국산 비단인 명주를 판매했다.
지전, 잭지, 장지, 화초지 등 다양한 종류의 종이를 판매하였다.
저포전, 베전이라고도 하며 여름 옷감인 베를 취급하였다.
시저전, 유기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을 파는 곳이다. 내시저전은 종루가에, 외전은 소의문 밖에 있었다.
의전, 넝마전이라고도 하며 주로 남녀의 헌옷을 판매하거나 대여했다.
철물전, 일상생활에 필요한 쇠못이나 솥 등 각종 쇠붙이를 판매했다.
하미전, 품질이 떨어지는 하급의 살을 취급하였다.
육조거리를 지나 운종가 서쪽 입구에 자리잡은 돗자리를 팔던 인석전과 품질이 좋은 상등의 쌀을 취급했던 상미전이 자리잡고 있다.
육조거리와 운종가의 경계가 되었던 청계천으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이었던 던 열천.
상미전이 있던 청운동 입구에는 일제강점기에는 크고 작은 음식점들어 들어선 피맛길이었다.
상미전 동쪽으로는 잡곡전과 청밀전이 들어서 있다.
상미전, 잡곡전, 청밀전이 들어서 있던 종로 북쪽에는 최근에 재개발되어 큰 빌딩들이 들어서 있다.
종로 운종가 중심부에 오늘날 검찰청과 비슷한 의금부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종각 4거리 제일은행이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오늘날과는 달리 북쪽으로 도로가 개설되어 있지 았다.
의금부에 있던 자리에 들어서 SC은행(옛 제일은행). 구한말 이후 일제강점기에 은행이 들어섰던 것으로 보인다.
의금부 동쪽으로는 선전, 저포전, 은국전이 자리잡고 있다. 그 동쪽으로 종묘까지 육의전을 비롯하여 시전들이 들어섰다. 선전은 육의전 중에 으뜸가는 조선 제일의 점포로 수입 비단을 독점취급하였다. 은국전은 술을 만드는 누룩을 파는 곳으로 누룩의 흰색이 은과 같아 은국이라 하였다.
선전이 있던 자리에는 일제강점기에 화신백화점이 들어섰다가 지금은 국세청이 있는 빌딩이 자리잡고 있다.
종묘 앞으로 이어지는 대로인 종로. 흥인지문(동대문)을 통해 성밖으로 연결된다.
종로 서쪽편 입구에는 우산전, 치계전, 사기전이 들어섰다. 우산전은 운종가의 서쪽 초입에 자리하였으며 우산을 판매하였고, 치계전은 주로 말린 꿩고기를 취급하며, 생선전 옆에 있었다.
사기전 동쪽으로는 과일과 견과류를 팔던 과물전,국내산 비단을 팔던 면주전을 말총을 비롯한 잡화를 팔던 상전, 담뱃대와 담배통을 팔던 연죽이 있었고 뒷골목에는 국수집들이 있었다고 한다.
빌딩들이 들어선 서린동 일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재개발되었다.
서울 서린동 유적3호 건물지. 서린동 유적은 조선시대에서 근대에 이르는 건물지 12동과 도로가 발굴된 곳이다. 이 유적들은 시전행랑의 뒤쪽 주거지역에 해당하는 유적이다. 이중 3호 건물지는 조선중기(16세기0에 지어져 사용되던 건물의 흔적으로 잔존된 상태가 훌륭하고 학술적 가치가 높아 후세에 기리기 위해 일부 이전하여 보존하였다. 이 건물지는 한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던 'ㄷ'자형 한옥으로 중앙의 대청을 중심으로 양편에 방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 내부에서는 16세기에 주로 제작되어 사용되던 자기편들이 출토되었다. <출처:서울시청>
의금부 정면으로 큰 길이 숭례문까지 이어 지고 있다. 조선시대 육의전을 비롯하여 시전이 들어서 있던 운종가의 중심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종각주변 큰 길
지금의 영풍문고가 있던 자리에는 무명과 은을 거래하던 면포전, 각종 종이를 팔던 지전, 솜을 팔던 면자전이 있었다.
맞은편 종각 주변에는 관우를 모신 사당인 중관왕묘가 있었고, 주변으로 삼베 등을 팔던 포전, 종이를 팔던 지전, 철제 용품을 팔던 철물전 등이 있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종각
종각 주변
청계천 주변으로는 안경을 팔던 안경방, 문방구를 팔던 필방 등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상점을 재현해 놓은 모습
오늘날 청계천 주변
한양에서 가장 큰 다리였던 광통교
오늘날의 광통교
원래의 광통교는 서쪽으로 옮겨서 복원해 놓고 있다.
광통교, 1410년(태종10)에 신의왕후의 옛 무덤터에 있던 돌을 옮겨 와 세운, 도성 최대의 다리로서 어가와 사신 행렬이 지나가는 주요 통로이자, 다리밟기.연날리기 등 민속놀이를 하는 장소였다. 교대에는 신덕왕후 무덤 주위의 틀에 세워졌던 정교한 조각들이 남아 있으며, 교각에는 여러 시기에 걸쳐 개천을 고친 기록이 새겨져 있어 역사적으로 가치가 높다. 1910년 전차 선로가 다리위에 놓이면서 크게 훼손된 바 있으며, 1959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로 도로 밑에 묻혔으나,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2005년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 <출처:서울시청>
운종가의 독특한 거래관행
한양은 조선후기에 늘어나는 인구 유입으로 점차 상업도시이자 소비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이런 현상을 뒷받침하는 요소는 시정이었다. 시전은 궁궐이나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주고 이를 대가로 금난전권을 얻어 상품을 독점적으로 판매하였다. 시전상인들은 허가받은 행랑에서 상업을 하면서 한양의 상품유통구조를 장악하였다. 이런 까닭에 화려한 간판이나 진열대를 갖출 필요가 없었다. 대개의 시전은 상품을 상점 안에 들여놓고 손님을 기다렸다. 이때 '여리꾼'이라는 호객꾼이 운종가를 활보하며 손님과 상인을 연결해 주고 중간이득을 취하였다. 거래를 할 때는 그들만의 은어인 '변어'를 사용하였으며, 유독 눈에 띄는 복장을 하였다. 이들의 모습은 지나치게 경박스러웠다고 비하되기도 하였다. 금난전권은 시전상인이 난전(허가받지 않은 상행위)을 단속할 수 있었던 특권이다. 시전상인들은 궁궐이나 관청 등 국가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급해주는 대가로 한양 안에서 상품유통의 독점권을 얻었다. 이후 사상들이 늘어나게 되자 정부에서는 1791년(정조15) 신해통공을 발표하여 육의전 이외의 시전이 갖고 있던 금난전권을 회수하였다.
"큰 광통교 넘어서니 육주비전 여기로다. 일 아는 여리꾼과 물화를 맡은 전시정은 큰 창옷에 갓을 쓰고, 소창옷에 한삼 달고 사람 불러 흥정하니 경박하기 끝이 없다." - 한산거사 「한양가」
책사와 서화사
광통교를 중심으로 개천 주변에는 책사, 서화사 등 서적과 그림을 판매하는 가게들이 즐비하였다. 책사에서는 방각본의 유통이 활발하였는데, 방각본은 민간에서 목판으로 간행하여 판매하는 책자를 말한다. 한양의 무교동, 미동, 유동 등 광통방 일대에는 판매를 목저으로 책을 찍는 출판업자들이 모여 성황을 이루었다. 또한 서화사에서는 그림을 애호하던 당시의 풍조를 반영하였으니 산수도 같은 그림이나 입춘에 스이던 액막이용 세화가 주로 거래되었다. 한산거사의 『한양가』에는 광통교 주변에 있는 서화사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광통교 아래 가게 각색 그림 걸렸구나.
보기좋은 병풍차에 백자도
요지연과 곽분양행락도며,
강남 금릉 경직도며
한가한 소상팔경 산수도 기이하다." - 한산거사 「한양가」중에서
호작도, 19세기, 광통교 부근의 서회시에서는 기복적 내용이 그림이 많이 거래되었는데, 까치와 호랑이는 길상백사를 의미한다.
한양의 방각본, 민간에서 판매용으로 간행한 책을 방각본이라 한다. 조선시대의 책은 15세기부터 매매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며, 16세기 말엽부터는 상업용 도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널리 유통되었다. 초천자문(19세기 무교 간행), 전문옥편(19세기 유동 간행), 소학언해(19세기 무교 간행), 주해천자문(1804년 광통방 간행)
돈궤.엽전, 상평통보, 17~19세기, 청계천 오간수문터 출토, 상평통보는 '누구나 일상생활에서 공평하게 쓸 수 있는 돈'을 뜻하며 1678년(숙종4) 국정화폐로 발행되었다. 앞면에는 '상평통보'를, 뒷면에는 주조한 관청의 이름을 넣었다. 제작시기에 따라 당일전, 당이전, 당백전으로 구분한다.
이야기가 넘치는 운종가
운종가는 종루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대로에 있었다. 여기에는 현재의 남대문로와 만나는 교차로가 있어 일년 내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사람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운종가에는 이야기꾼과 재주꾼들이 저마다 솜씨를 뽐냈고, 여리꾼들은 순박한 이들의 쌈짓돈을 노리기도 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갔지만 아녀자들이 활보하지는 못했다. 양반집의 경우에는 노복이나 겸인을 부려 물건을 사들였다. 종루는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에게 좋은 구경거리이자 필수 방문지였다. 서울에 다녀온 증거를 대라면서 숭례문 현판이 가로인지 세로인지, 숭례문에 문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묻거나, 종루의 창살 개수를 헤아려 보았는지 물어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운종가 이야기꾼 전기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