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전문직의 마을 중촌과 선비의 마을 남촌
조선의 수도 한양은 인구 20~30여만명이 살았던 당대의 대도시였다. 한양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양반관료, 의관.역관 등의 중인계층, 관청의 서리, 훈련도감에 속한 군인들, 운종가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상인에서 최하층민까지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지방조직으로 한성부가 설치되었으며, 하부조직으로 남부, 북부, 서부, 동부, 북부의 5부로 나뉘었다. 도성의 북쪽 북악산과 서쪽 인왕산을 등지고 있는 궁궐 주변에는 권문세가를 비롯한 훈구세력과 조선중기 이후 주도층으로 등장한 사림세력들이 주로 살았으며,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중부에는 의관.역관 등 전문직에 종사한 중인계층과 운종가에서 상업에 종사한 상인계층들이 주로 살았으며, 남산 아래에는 남촌에는 일부권문세가들도 살기는 했지만 큰 벼슬을 하지못한 선비계층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중촌는 주로 중부에 속한 지역으로 오늘날 청계천 주변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궁궐과 주요관청, 시장인 운종가와 가까운 편리성때문에 대대로 중앙부처에서 실무를 담당하던 전문직계층이라 할 수 있는 의관.역관 등 중인계층과 관청 실무자들인 서리, 시전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상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다. 이들은 고도의 전문직에 종사했기때문에 경제적으로는 풍족하였고 그들의 직업을 후손들에게 세습하면서 같은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왔다. 반면에 청계천 남쪽 오늘날 충무로, 회현동 일대에는 권력에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아왔던 동네로 알려져 있으며 남산골샌님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남촌에는 가난한 선비들이 많이 살기는 했지만, 지방에서 한양으로 진출한 사림세력들 또한 남촌에 터를 잡고 살았던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인물로 김종직, 류성륭, 이순신, 정굉필, 강세황 등을 들 수 있다.
한양의 내수, 개천
서울은 내사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서 내려가는 물은 서에서 동으로 흘러 도성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으로 나가 중량천과 합류한 후 한강으로 흘러간다. 이 내수를 가리켜 개천이라고 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청계천이라 부른다. 개천은 빗물과 생활용수들이 흐르는 배수로였지만 동시에 아낙네들의 빨래터요 어린이들의 놀이터로 사랑받는 공간이었으며, 서울로 몰려든 집 없는 백성들의 임시 거처이기도 하였다. 개천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광통교.수표교를 비롯한 많은 다리들이 놓여 있어 북촌과 남촌을 이어주었다. 개천의 다리는 마을과 마을, 길과 길,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기능에 더하여 정월대보름의 다리밟기, 연날리기 등 세시풍속과 놀이의 공간이기도 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개천, 백악산.인왕산.목멱산 등 여러 골짜기의 물이 합하여 동쪽으로 흘러서, 도성 가운데를 가로지나 세 수구로 나가 중량포로 들어간다. - 『신증동국여지승람』「한성부」-
수문상 친림 관역도, 부산박물관
돌거북이, 조선말기, 청계천 오간수문터, 화강암질의 거북이로 오간수문 틈에 기초석의 물가름석 위에 놓여 있던 것이다.
오간수문 철책문, 조선말기, 청계천 오간수문 터, 오간수문 부근에서 발견된 철책문으로 외적이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였다. 흥인문 남쪽에 위치한 오간수문은 개천의 물이 도성 밖으로 빠져 나가도록 하기 위해 설치했던 수문이다.
오늘날 서울의 대표적인 시장인 동대문시장이 들어서 있는 오간수문 주변
전문직의 마을, 중촌
중촌은 개천을 중심으로 지금의 청계천과 종로 일대를 말한다. 근처에 궁궐과 주요 관청, 시전이 있어 생활이 편리하였다. 이곳에는 주로 역관, 의관, 법률가인 율관 등 전문직 관리나 관청에서 근무하는 서리인 경아전과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살았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들의 동네였다. 조선후기 문신이었던 이가환은 「옥계청유권서」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익을 챙기고 문학을 가벼이 여긴다"고 중촌 사람들을 표현하였다. 그렇지만 이들은 실용적이거나 경제적인 활동에 전념한 전문직업인들이었다. 역관으로는 수진방(청진동 주변)의 천녕현씨와 장통방(관철동 주변)의 무안박씨가 있었고, 의관으로는 대묘동(종묘 주변)의 안산이씨가 알려져 있다. 한편 시전의 상인들은 다동과 상사동(청진동 주변)등에 살았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양반과 평민사이, 중인
중인은 양반과 평민의 중간계층으로 대개 역관과 의관 등 전문직 종사자를 지칭한다. 여기에 관청의 실무자인 경아전이나 양반의 첩자식인 서얼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중인 중에서도 전문직 중인들은 대대로 후손들에게 기술을 전수하며 직업을 세습하였다. 역관은 통역관이고, 의관은 의술을 담당하는 관리로 이들은 조선시대 전문직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반면 서얼은 문관으로 출세하기가 어려웠기에 역관처럼 전문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밖에 지방관청의 행정실무자인 향리도 중인 계층에 속하였다. 중인은 많은 수를 차지하지는 않았지만 전문성을 바탕으로 쌓은 지식과 교양으로 예술과 문학 등의 분야에서 당대의 문화를 선도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희조일사, 이경민, 1866년, 중인들을 중심으로 그들과 교류했던 하층민들의 일화를 수록한 전기집이다.
현후 호패, 1773년, 현후는 역관 집안으로 유명한 천녕현씨로 1773년 증광시 역과를 장원급제하였으며, 역관의 요직인 교회를 지냈다. 최한식 호패, 19세기, 내의 최한식의 호패로 1804년 식년시 의과시험을 치러 1805년 입사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신분 극복의 열망, 통청운동
양반 첩의 자식인 서울은 일반 사대부와 달리 주요 관직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조선전기에는 서얼금고법으로 문무관 진출이 막혀 중인이 할 수 있는 기술관 등으로만 진출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을 지나 인조 때에 납속허통, 즉 곡식을 내면 소통이 허락되었으며, 영조 때에는 금고법이 폐지되면서 마침내 법적인 차별이 없어졌다. 그렇지만 수백년 지속된 관습으로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724년(영조 즉위년) 서울 260여 명이 주요 관직으로 진출할 수 있도록 허용해 달라는 '통청운동'을 시작하였고, 1772년에는 3천여명, 1823년(순조23)에는 만 명이 집단으로 상소하였다. 1851년(철종2)에는 한성부의 각 관청에 소속된 중인들 1,600여 명이 국왕에게 차별 철폐의 요청을 시도하였다. 중인 계층은 점차 무시할 수 없는 사회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관직으로 일할 기회를 주옵소서! 신 등은 비록 대과나 소과에 합격한 자들일지라도 엄격한 한계가 있어서 한번도 관직에 추천되지 않았습니다. 어진 임금의 시대에 버려지는 물건이 되어도 원통함을 하소연할 길이 없습니다" - 『상원과방』1851년 8월18일 -
중간노걸대언해, 18세기, 노걸대는 사역원(외국어 교육 및 통.번역 관부)에서 간행한 중국어 교습용 책이다.
산수도, 최북, 1748년, 최북은 18세기 직업화가로 기술을 세습하는 전문직 중인층인 산관 집안 출신인데 산원인 아버지의 직업을 세습하지 않고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다.
장통방의 역관집안 무안박씨
중부 장통방에는 역관 집안인 무안박씨가 살았다. 이집안은 조선중기 이래로 여러 대가 청계천 일대에 살아왔는데, 1591년(선조24) 장원으로 역관이 된 박대근과 그의 후손들은 대개 역관직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혼인도 역관집안과 맺어 그들만의 전통과 세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이 집안사람들은 16~18세기 중반까지 왜학을 전공하였고, 18세기 후반 이후에는 한학을 전공하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독일어를 전공하였으니, 1901~1902년 관립덕어(독일어)학교를 다닌 박재순은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하였다. 중세에서 근대로 오면서 시기에 따라 전공을 바꾸어가며 전문성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독일어 전공자 박재순 상증, 1901년 7월 외국어학교에서 박재순에게 내린 상증이다. 박재순은 관립덕어(독일어)학교 2급 과정에서 학업이 우수하여 상품을 받았다. 상품은 우산, 명함갑, 공책, 연필, 묵병, 동국역사 등이었다. 박재순은 박유성의 증손자이다.
한성부 박유성 준호구, 1831년(순조31) 한성부에서 박유성에게 발급한 일종의 호적등본이다. 당시 박유성은 21세로 중부 장통방 2리 석정계에 살고 있었으며 이전에 사역원 부봉사를 지냈다. 그는 부인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으며 노비는 김분이를 비롯해 6명이 있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교회선생안, 사역원에서 교회의 직임을 맡은 교사들의 명단이다. 본문에는 박유성이 확인되는데 자는 경로, 출생연도는 신미(1811년), 본관은 무안이며 품계는 숭정대부 지중추부사라고 하였다. 아래쪽에는 두 줄로 빼곡하게 본인의 부, 조, 증조, 외조를 기록하고 처에 대해서도 같은 형식으로 기재하였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전문직 중인계층이 많이 살았던 광통교 부근 청계천
광통교 남쪽 장교동에 있었던 한성판윤을 지냈던 한규설가옥이다. 청계천 주변에는 중촌에는 중인계층이 많이 살았지만, 상류계층 저택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국민대학교 교정으로 옮겨졌다.
광통교 남쪽편 현 조흥은행 뒷편에 있던 삼각동 도편수 이승업가옥이다. 경복궁 중건에 참여했던 당대 최고의 목수 이승업이 지은 저택이다.
한양의 기반, 남촌
남촌은 목멱산의 아래족에 위치했던 마을로 지금의 남산동, 회현동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청계천 이남을 말한다. 한양의 북쪽은 궁궐과 주요 관청들이 있었던 반면, 남쪽에는 일반 관청이나 군영들이 눈에 띈다. 주자동에는 활자를 제작하는 주자소가 있었고, 인근에는 균역청이 있었다. 또한 남산 기슭에는 남별영과 남소영, 금위창과 어영창, 금위화약고와 수어화약고 등 군사시설들이 있었다. 남촌 산기슭은 북사면이라 거주 조건이 양호하지 않았지만 목멱산 자락의 아름다운 풍광 덕에 조현명의 귀록정과 같은 이름난 정자가 있었다. 또한 이곳 사람들은 남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이용하여 양질의 술을 빚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양사람의 안식처, 목멱산
목멱산은 남산이란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도서의 안산으로 산세는 동서로 길게 드리워져 달리는 말이 안장을 벗은 형상을 하고 있다. 도성민들에게 가장 친근한 산으로 인경산, 열경산이라고도 하였다. 일찍이 태조는 1395년(태조4)에 목멱산의 산신을 목멱대왕으로 봉하고 신사를 지어 나라의 무사태평을 기원하였다. 또 산의 능선에는 국경지역의 상황을 횃불과 연기로 매일 보고 받을 수 있는 5개의 봉수대를 설치하였다. 한편 '남산의 꽃구경'이란 말이 있듯이 목멱산은 한양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단오가 되면 젊은이들은 산기슭에 올라 씨름을 하였고, 중앙절(9월9일)에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남산에 올라 단풍을 즐겼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한양사람들은 '수여남산 壽餘南山'이라는 글귀를 좋아해서 이를 현판에 만들어 대청이나 사랑방에 걸었다고 한다. 이 말은 『시경』「소아」의 '여남산지수, 불건불붕(남산같이 장수하여 이지러지지도 무너지지도 않는다)'에서 유래되었다
목멱산의 봉수대
봉수는 불이나 연기를 이용하여 국경지대의 위급한 상황을 한양의 임금에게 알리던 제도이다. 봉수의 종착지인 남산에는 5곳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전국 5개 방면에서 전달되는 신호를 받았다. 각 봉수대의 정확한 위치와 형태는 아직 알지 못하다. 봉수는 평상시에는 1거를, 적이 나타나면 2거, 경계에 접근하면 3거, 경계를 범하면 4거, 접전하면 5거를 올린다. 서울에서는 책임자인 오원이 신호를 병조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이 해당 진영장에게 보고한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목멱산 봉수대
제1봉수 - 양주 아차산 - 함경도, 강원도
제2봉수 - 광주 천천령(천림산) - 경상도
제3봉사 - 무악(안산) 동봉 - 평안도 육로
제4봉수 - 무악(안산) 서봉 - 평안도, 황해도 해로
제5봉수 - 양천 개화산 - 충청도, 전라도
남산 정상에 복원해 놓은 봉수대
대전통편, 1785년, 조선의 법전으로 병전에 봉수제도가 소개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전국 봉수제도를 소개하고 있다.
'금영'명 기와, 조선후기, 남산 봉수대터 출토
고고한 선비의 마을, 남촌
조선시대 남촌에는 남인을 비롯하여 소론, 소북 등 대체로 권력에서 소외된 가난한 선비들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청렴한 관원과 고고한 선비들이 많이 살았던 곳이었다. 명문가도 이 일대에 여럿 있었다. 먼저 회현동에 살았다고 하여 회동정씨라 불린 동래정씨 일가는 정굉필 이래 정태화, 정원용 등 12명의 정승을 낳은 명문가이다. 또한 일두 정여창, 표암 강세황도 이곳에 살았다. 건천동(현재 인현동 일대)에는 류성룡, 이순신, 원균, 허균이 거주하였으니 같은 시기 유명 인사들이 한 마을에 살았던 것이다. 그외에 명례방(현재 명동, 남산동, 회현동 일대)에는 김종직, 정탁 등 지방에서 올라온 인물들이 머물기도 하였다. 다산 정약용도 이 지역에 거주하였으니 남촌은 조선의 인재들이 이웃한 마을이었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남주북병, 남쪽의 술과 북쪽의 떡
'남주북병'이라는 말은 남촌 사람들은 술을 잘 빚고 북촌 사람들은 떡을 잘 만든다는 뜻이다. 술은 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로 빚은 장흥방과 회현방(현재 충모로 1가와 회현동)의 것이 최고였다고 한다. 반면 맛 좋기로 소문난 북촌의 떡은 삼청동의 찰떡을 지칭하였다. - 신위 『경수당전고』「장흥방잡영」-
남보, 19세기, 남인에 속하는 성씨들만을 대상으로 계보를 정리한 것으로 총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훈도방주자동지, 권희.권분, 1621년, 정수현 기증, 훈도방9현 을지로, 충무로 일대)에 위치했던 주자동에 관한 지리지이다.
기승, 18세기, 강세황. 김홍도의 스승 강세황, 강세황은 남소문동(현재 장충체육관 부근)에서 태어났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서 삼절로 불렸으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특히 당대 예원의 영수로서 신위.김홍도의 스승이기도 했다. 64세 되던 해 (1776년, 영조52)에 노인을 대상으로 시행한 기구과에서 장원을 하였으며 뒤에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그는 만년에 남산 기슭 회현동에 홍엽루를 짓고 살았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산수도, 19세기 전반, 신위, 묵죽도의대가 신위(1769~1845).신위는 소론계열로 장흥방(현재 남대문로, 충무로 부근)에서 살다가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1799년(정조23) 문과에 급제하였고 1812년(순조12)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대학자 옹방강을 만나 교유하였다. 관직은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그의 글씨는 자하체라고 불리며 당대에 크게 유행하였고, 또한 남종화풍의 묵죽도를 잘 그려 조선 3대 묵죽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혔다. <출처:서울역사박물관>
정광경 백자 청화 묘지석, 17세기, 동래 정씨 정굉필의 4대손인 정광경(1586~1644)의 묘지석이다. 지석에는 그가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사람됨이 넓고 굳세며 역량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남산중턱에서 내려다 본 오늘날의 충무로, 회현동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