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박물관 특별전] 몽촌토성과 한강유역 고구려 보루
한성백제기 중반인 4세기 근초고왕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은 백제가 처음 터를 잡았던 풍납토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몽촌토성에서는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왕도인들이 살았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토기를 비롯하여 많은 생활용품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상대적으로 투겁창, 쇠화살촉 같은 무기류나 말재갈, 편자 같은 마구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기존 왕성인 풍납토성이 왕과 귀족들이 거주하면서 정치,경제의 중심지였다면, 몽촌토성은 왕과 귀족들이 살았던 곳이지만 위례성 남쪽 남한산성과 연결되는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군사적인 성격이 강했던 곳이라 할 수 있다.
5세기 한성백제는 광개토대왕대 이후 고구려로부터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으며, 457년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 개로왕은 죽고, 웅진으로 천도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후 몽촌토성은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것으로 보이며 다수의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위례성이 고구려에 점령당하기 이전 한강 이북 아차산성에서는 고구려군 주둔하고 있으며,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과 상당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시기(475~551년)는 기록으로 알려져 있기때문에 아차산성과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유물들은 편년 연구에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고 한다.
생산도구(Production Tools)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 거주하던 일반 백성들은 노동을 통해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얻어 삶은 꾸려갔다.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가위와 풍납토성의 가락바퀴, 바늘을 통해 백제 사람들의 의복생산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논밭을 일굴 때 사용하였을 삽날과 호미 그리고 물고기를 잡을 때 쓰인 그물의 그물추는 먹거리를 얻기 위해 이용된 도구들이다. 왕성 안에는 공방도 있었는데,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도가니는 노에 올려놓고 쇠.구리.금.은.유리와 같은 내용물을 녹여 거푸집에 붓는데 사용한 용기이다. 또한 풍납토성 삼화연립 부지에서는 거푸집과 숭풍관편이 확인되었다. 거푸집의 존재는 풍납토성 내부에서 주조괭이와 같은 주조철기를 생산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풍납토성 라-109호 구덩이에서 발견된 집게는 철을 잡고 망치로 두들길 때 사용한 도구이므로 단조철기의 생산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쇠집게(Iron Tong, 풍납토성), 도가니(Crucible, 몽촌토성)
흙으로 만든 거푸집(Clay Mold, 풍납토성), 송풍관(Blastpipe, 풍납토성)
숫돌(Wheststones, 풍납토성), 가위(Iron Scissor, 몽촌토성), 대형바늘(Big Needle, 풍납토성)
가락바퀴(Spindle Whorls, 풍납토성), 그물추(Net Sinkers, 풍납토성)
U자형삽날(Iron shovel, 풍납토성), 쇠삽날(Iron spade, 몽촌토성), 쇠호미(Iron Hoe, 몽촌토성), 쇠도끼(Iron Axe, 몽촌토성)
무기와 말갖춤(Weapony and Harness)
몽촌토성은 풍납토성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무기와 말갖춤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런 경향에 따라 몽촌토성의 군사적인 성격이 강조된다. 1985년 몽촌토성 발굴조사 때 서북지구에서 쇠화설촉 88점이 출토되었다. 쇠화살촉의 머리모양이나 화살몸통과의 연결방식에 따라 끌머리모양, 버들잎모양, 날개모양, 긴삼각모양, 원추모양, 창모양, 독사머리 모양 등 형태가 다양하다. 이런 다양한 쇠화살촉의 방식은 고구려 화살촉과 매우 유사하여 475년 이후 고구려 군대가 사용하였던 화살촉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밖에도 긴 칼과 투겁창 그리고 창 자루 끝에 끼우는 물미 등이 발굴되었다. 85-2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편자는 반원형으 앞부분만 남은 파편으로 폭 8.8cm 크기의 소형이다. 전면의 바깥쪽으로는 한줄의 홈이 돌아가고 그 홈 중간중간에는 구멍이 나 있다. 말족쇄는 처음에는 말에 물리는 재갈로 보고되었으나, 최근 몽골과의 학술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똑같은 유물이 고대 몽골에서 말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족쇄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려지게 되었다. 말의 앞다리에 양쪽의 결합식 원형 고리를 걸어서 사용한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뼈로 만든 비늘갑옷(Bone nail armor, 몽촌토성)
쇠화살촉(Iron Arrowheads, 몽촌토성), 큰칼(Iron Sword, 몽촌토성)
투겁창(Iron socketed spearhead, 몽촌토성), 물미(Iron Spear-end, 몽촌토성), 말족쇄(Horse iron fetters, 몽촌토성)
말재갈(Iron bit, 몽촌토성), 걸이(Peg, 몽촌토성), 말편자(Iron Horseshoe, 몽촌토성)
한성이함락되고(Hanseong was taken by Goguryeo)
삼국사기에 따르면 475년 9월 고구려의 장수왕은 군사3만명을 거느리고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였다. 처음에는 북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이후 남성을 공격하였으며, 도망가던 개로왕은 붙잡혀 아차성 아래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한성을 빼앗긴 백제는 웅진으로 천도하기에 이르렀다. 백제는 이후 고대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던 한성을 되찾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서울의 경우, 한강 남쪽에 위치한 몽촌토성과 한강 북안에 인접해 있는 아차산 일대에서 고구려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사실 남한의 고구려 유적은 1988년 백제의 도성인 몽촌토성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고구려의 대표적인 토기인 네귀달린항아리가 출토되면서부터 주목을 받게 된 것인데, 이후 아차산 일대 산 봉우리 정상부에도 고구려 보루가 집중 분포하고 있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 것은 551년의 일로서, 백제.신라.가야 연합군의 공격에 의해 고구려는 임진강 유역으로 물러나게 된다. 구의동 보루를 제외한 다른 보루에서는 화재로 인한 폐기 흔적이 없고, 모든 유적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아차산 보루군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군대는 자진 후퇴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강유역의 고구려 유적은 475년부터 551년이라는 고정된 시간 폭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체 고구려 유적과 유물의 편년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용마산 고구려 보루
몽촌토성과 한강유역 고구려보루(Mongchontoseong Fortress and Goguryeo Military position in the Hangang River Basin)
백제왕도의 일부였던 몽촌토성 안에서는 온돌건물지를 포함한 건물지와 함께 300여점이 넘는 고구려 유물이 출토되었다. 일상용기가 아니라 네귀달린항아리 등 의례용으로 추정되는 토기가 존재한다는 점, 서남지구 고지대에 축조된 건물지의 규모나 구조, 몽촌토성이 백제의 도성이었다는 상징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5~6세기에 몽촌토성에 주둔하고 있었던 고구려 군대에는 상당히 높은 신분의 지휘관이 배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강 북안의 아차산 일원에는 각 봉우리마다 보루가 축조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조사된 결과에 따르면 보루의 상당수가 고구려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중 용마산 제2보루는 석축성벽과 함께 3개소의 치雉가 확인되었는데, 그 중에서는 3중 방어시설을 갖춘 특이한 형태의 치도발견되었다. 출토유물은 다량의 생활용 토기와 함께 단야 작업이 가능한 철제 집게와 각종 문고리, 갑옷편과 무기류 등 다양한 철기가 출토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원통모양세발토기(Cylindrical pottery with three legs, 몽촌토성)
뚜껑(Lid, 용마산 2보루), 뚜껑(Lid, 몽촌토성)
동이(Large bowl, 몽촌토성), 항아리(jar, 몽촌토성)
시루(Steamer, 몽촌토성)
고드랫돌(Wrap Weights, 용마산2보루), 귀달린접시(Bowl with lugs, 용마산2보루)
귀달린바리(Bowl with Ears, 몽촌토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