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의 지방통치
백제는 기원전 18년 졸본부여에서 남하한 세력이 한강유역 토착세력과 함께 세운 나라이다. 초기 성읍국가 연맹체였던 마한의 소국이었지만, 북방에서 남하한 세력으로 북방유목민과 중국 대륙의 선진 문물과 기술을 바탕으로 점차 한반도 중부지역을 장악하면서 마한지역 전체를 장악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하게 되었다. 백제가 남하하는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웅진(공주)로 천도하기까지 왕도 한성(하남 위례성)은 백제 역사의 73%에 해당하는 493년간 왕성으로서 백제의 전성기를 보냈던 곳이다.
백제는 3세기 중반 한반도 중부지역을 장악하면서 고대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4세기 후반에는 고구려를 압박하면서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고, 남쪽으로는 남해안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한반도 지역 성읍국가들이 점차 고구려, 백제, 신라의 영역으로 통합되면서, 이전까지 한.중.일 해상무역로 주도권은 중국의 영향을 받는 낙랑, 대방군에서 백제로 넘어오게 된다. 백제는 해상교역로를 장악하면서 중국 남조, 왜와 활발히 교역하면서 두각을 나타나게 된다. 백제의 수도 한성과 전국 각지역은 육상과 해상교통로를 통해 연결되었으며, 육상교통로는 주로 군사적인 목적으로 많이 활용되었으며, 해상무역로와 한강수운이 실제 교역의 중심이 되는 교통로였으며, 한강유역에 자리잡은 수도 한성은 육상, 해상교통로의 중심이 되었다.
땅을 잇고 물길을 열다.
백제는 3세기 중엽 한반도 중부지역을 장악했으며, 4세기 후반 북쪽으로는 황대도 일대, 남쪽으로는 남해안까지 세력을 넓혀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백제는 각 지방의 주요한 지역에 거점성을 두어 통치하였다. 거점성은 주로 산성이며 하천의 물줄기가 큰 물길과 서로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에 배치하였다. 백제는 초기부터 한강 뱃길을 확보했으며 서해안 항로를 개척하였다. 낙랑과 대방이 멸망한 뒤 백제는 서해안 해상권을 독점했으며 중국 및 왜와 바닷길을 통해 활발히 교류하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한성으로 통하는 길
교통로는 육상교통로와 수상교통로로 나뉜다. 백제 한성기의 육상교통로는 고구려지역과 연결되는 북방교통로와 마한.신라.가야 지역으로 통하는 남방교통로가 있었다. 백제는 북쪽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했으며 남쪽으로 마한을 정복하였다. 이때 군사들은 주로 육상교통로를 이용하였다. 수상교통로는 강과 작은 하천을 이용하는 내륙수로와 바다를 이용하는 해상수로가 있다. 백제의 내륙수로에서는 한강이 가장 중요했으며 그 중심에 한성이 있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 수도 한성으로 통하는 길. 한강은 백제의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백제의 도읍 한성은 한반도 중앙을 가로지르는 한강변에 자리하여, 동쪽으로 북한강과 남한강으로 연결되고, 서쪽으로 서해 바다와도 연결되었다. 한강 하류의 김포.고양.하남, 상류의 가평.여주.원주 등에는 백제 한성기 유적이 널리 분포한다. 한강 북쪽에 임진강과 한탄강도 백제의 매우 중요한 교통로였다. 특히 임진강이 흐르는 파주, 연천 등에서 육계토성.칠중성.강내리유적 등 백제의 주요 유적이 발견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큰독, 곧은입 항아리(화성 발안리유적)
단지, 시루(화성 발안리유적)
병, 사발, 경질무문토기(화성 발안리 유적)
굽다리접시, 사발, 세발 작은단지, 뚜껑(화성 석우리 유적)
시루(화성 석우리 유적)
계란모양토기(파주 와동리유적)
그물추, 경질무문토기(파주 주월리유적)
귀달린접시, 단지, 병, 뚜껑, 검은바리(하남 미사리유적)
곧은입항아리, 검은간토기, 뚜껑접시, 병(원주 법천리유적)
큰항아리, 단지, 굽다리접시, 병, 작은단지(용인 청덕동 유적)
큰입항아리(용인 두창리유적), 바리(용인 마북동유적)
계란모양토기, 깊은바리, 단지, 잔(군포 부곡동유적)
작은단지, 굽다리접시(용인 수지유적)
단지(오산 수창동유적)
작은단지, 시루, 합, 사발(용인 구갈동유적)
항아리, 작은단지, 사발, 깊은 바리 (안성 도기동유적)
곧은입항아리, 검은간토기, 단지, 계란모양토기, 뚜껑접시, 용인 신갈동유적
금동관, 국보 295호, 백제 5세기, 전남 나주 신촌리, 복제품
백제 금동관모 출토 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