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박물관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의 대외교류

younghwan 2014. 3. 2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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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는 한반도에서 대외교류가 가장 많았던 국가 중 하나였다. 삼국시대는 한나라 멸망 이후 5호16국에서 남북조시대까지 중국에서 크고 작은 많은 나라들이 성쇠를 거듭하던 시기로 혼란스러웠던 측면도 있지만, 다양한 세력간에 많은 교류가 있었던 시기이다. 또한 고조선 멸망이 낙랑군이 중국,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동아시아 해상교역의 중심이었다가 고구려의 압박으로 낙랑군이 물러난 이후 백제와 가야가 해상교역의 중심이었다. 또한 삼국시대에는 황해도 연안과 산동반도를 잇는 항로가 개발되어 더 많은 물자와 사람의 교류가 있었다. 

한성기 백제는 주로 남조, 가야, 일본과 강한 유대관계를 가지면서 정치.경제적인 교류가 있었는데, 이는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많은 역사서에 기록으로 남아 있으며, 출토유물에서도 당시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일본과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유적으로는 전방후원식 횡혈묘가 있으며, 이들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물에서 많은 유사성을 보인다. 


백제, 바다로
백제는 서해와 남해로 이어지는 해안선이 길고 큰 강이 많아 해상활동에 유리하였다. 이를 통해 중국대륙, 일본 열도 및 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백제 한성기에 이용된 항로는 육지 가까이로 운항하는 연안항로였다. 백제 후기에는 황해도 연안과 중국의 산동 반도를 직접 잇는 서해 횡단항로가 개발되어 더 짧은 기간에 중국이나 일본에 오갈 수 있게 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백제의 배(모형), 백제사람들은 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일본에 가서 배를 만들어 주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백제의 배는 백제방 또는 백제선으로도 불렸다. 배의 바닥은 편평하고 돛은 1개인 것이 특징인데, 돛이 2개라는 설도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갑판


백제 배의 구조


돛이 2개달린 쌍범 당도리선, 돛이 하나인 단범 당도리선


일본항로, 백제와 왜는 한반도와 일본 열도의 연안을 따라 두 나라의 수도를 오가는 최단루트를 이용하였다.
(한성-인천만-남양반도-태안반도-금강하구-변산반도-영산강하구-고흥반도-섬진강하구-쓰시마-규슈북부-오사카만-야마토)


중국항로, 백제는 중국과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연안항로를 주로 이용하였다. 4세기에는 서해직항로를 개척했으나, 5세기 후반에는 한강유역을 상실한 후 남조와 교역을 위해 서남해를 가로지르는 항로를 이용하였다.
(한성(한강포구)-강화도-해주만-강령만-대동강하구-압록강하구-랴오동반도-산둥반도 덩저우.적사-회하하구-양쯔강하구-지엔캉)


배모양토기(복제), 배모양목제품(복제)


접시 달린 병(백제 5~6세기, 부안 죽막동, 복제)

부안 죽막동유적
백제 때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지낸 흔적이 남아 있는 유적이다. 제사는 절벽 위의 좁은 평지에서 행해졌다. 이곳에서는 백제와 가야의 각종 토기와 금속품, 중국 도자기, 일본 고훈 시대의 돌로 만든 모형품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대외교류에서는 바닷길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죽막동은 중국-서해안-남해안-일본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사람모양토우(백제 5~6세기, 부안 죽막동, 복제), 석제소형판갑(복제)


본뜬거울(복제), 청동말방울(복제)

백제, 동아시아를 품다
4~5세기 한반도와 만주지역에는 고구려,백제,신라,가야가 있었다. 중국대륙의 경우 4세기에는 남쪽의 동진과 북쪽의 5호16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5세기에는 남북조시대로 남쪽에는 송, 북쪽에는 북위가 있었다. 일본열도는 고훈시대로 오사카 부근의 야마토정권이 중심세력이었다. 동남아시아에는 곤륜국과 부남국이 있었다. 4~5세기 동아시아 여러나라는 사람과 물자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고구려-전진, 북위-신라의 북방연합과 백제-동진.송.제-가야-왜의 남방연합이 경쟁하는 가운데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에 백제가 있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고구려.신라.가야와의 교류
4세기 낙랑.대방이 한반도에서 쫓겨난 후 백제는 고구려와 중국-한반도-일본을 잇는 동아시아 교역망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371년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으로 고국원왕이 패사한 이후 근구수왕.진사왕.이신왕.가로왕대까지 총15회의 전쟁을 되풀이 하였다. 백제와 가야소국들은 동맹관계였다. 백제는 가야지역을 거점으로 왜와 안정적으로 교류하였다고, 가야도 철의 국제무역과 중국과의 교류에 백제의 도움을 받았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포천 자작리 유적에서 가야토기와 대가야 양식의 작은 그릇받침, 뚜껑이 출토되었다. 가야영역에서 보이는 백제에서 비롯된 상감기술, 고리자루큰칼, 금박구슬, 금동관모와 천안 용원리, 합천 옥전 고분의 말띠드리개의 유사성은 양국의 긴밀한 교류의 증거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굽다리접시(백제 5~6세기, 전북 부안 죽막동, 복제), 뚜껑(백제 4~5세기, 포천 자작리, 복제)


세잎고리자루큰칼(백제5세기, 나주 신촌리, 복제), 금귀걸이(백제 4~5세기, 천안 용원리, 복제)


말띠꾸미개(1.백제4~5세기, 천안 용원리, 2.가야5~6세기, 합천 옥전고분, 복제)

백제는 동아시아 해상 무역권을 장악한 4세기 후반부터 왜와 본격적으로 교류하였다. 한학, 유학, 불교, 천문, 의학, 미술, 음악, 건축술, 직조법, 양조법 등의 선진기술과 문물을 왜에 전해주었다. 근초고왕 대에는 왜왕에게 칠지도와 칠자경을 보냈고, 아직기와 왕인 등이 유교와 한자 등 학문과 각종 기술을 전하였다. 왜로부터는 스에키, 금송 등의 각종 특산물을 공급받고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왜병을 지원받기도 하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기록속 일본과의 교류
283년(고이왕50), 봉의공녀를 왜에 파견하여 직조법을 전수, <일본서기>
284년(고이왕51), 아직기가 왜에 건너가 말기르는 법을 전수하고 태자의 스승이 됨, <일본서기>
369년(근초고왕24), 근초고왕 왜왕에게 칠지도를 하다, <칠지도>
397년(아신왕6), 왜와 우호관계를 맺고 태자를 볼모로 보냄, <삼국사기>
402년(아신왕11), 사신을 왜국에 보내어 큰 구슬을 구함, <삼국사기>
405년(아신왕14), 왕인 한문을 전파하고 태자의 스승이 됨, <고사기>, <일본서기>
409년(전지왕5), 왜가 사신을 보내어 백금(흰비단) 10필을 보냄, <삼국사기>
428년(비유왕2), 왜의 사신이 왔는데 종자가 50명이나 됨, <삼국사기>
463년(개로왕9), 화공인 인사라아 일본에 파견, <일본서기>


금동관모(백제5세기, 익산 입점리, 복제), 금동관모(벡제 5~6세기, 일본 구마모토 에다후나아바고분, 복제)


금동신발(백제 5~6세기, 일보 구마모코 에다후나야마고분, 복제)

일본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은 크게 한반도계와 일본계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반도계는 에다후나야마고분, 토오노미고분 출토품 등으로 백제지역에서 수입했거나 백제장인이 일본으로 건너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익산 입점리1호분 금동관모가 발견된 이래 백제의 관과 에다후나야마고분 출토품 등 일본열도의 관이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군마현 후루키고분, 오사카부 미네케즈카고분, 후쿠이현 주젠노모리고분 등에서도 백제관모와 유사한 예가 출토되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에다후나야마고분,
일본 구마모토현 세이바루 고분군 가운데 가장 큰 길이 62m, 높이 10m의 전방후원부이다. 5세기 후반에 축조되어 6세기 전반까지 추가장이 이루어진 것이 밝혀졌다. 추가장 때 부장한 금동관모.금동신발.뚜껑접시 등은 백제산이나 백제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 백제와 일본간 교류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각진자루칼(백제 6~7세기, 나주 복암리, 복제)


구멍 뚫린 작은 단지(백제 6~7세기, 나주 복암리, 복제) 구멍 뚫린 작은 단지는 몸통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는 항아리로 제사와 의례에서 구멍에 대롱을 꽂아 내용물을 돌려가며 마실 때 사용하였다.


공주 단지리고분군 출토 토기(백제 5~6세기, 1.병, 2.짧은목항아리, 3.뚜껑접시, 4뚜껑),

공주 단지리고분군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분명히 확인된 횡혈묘이다. 반원형의 투굴형 천장 등 무덤구조가 일본의 초기 횡혈묘 형식과 비슷하다. 유물은 짧은목항아리.뚜껑접시.병 등의 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의 제작기법은 5~6세기 일본의 스에키 제작기법과 유사하여 양국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출처:한성백제박물관>

백제와 중국의 교류는 서진(265~316) 시대인 3세기 말부터 빈번히 이루어졌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다량의 동전무늬도기, 유약바른도기는 백제와 서진의 교류를 보여준다. 동진(317~420)대 두나라의 교류는 더욱 활발해진다. 몽촌토성, 풍납토성, 화성 사창리의 동진대 허리띠꾸미개와 풍납토성, 원주 법천리 출토품인 청동초두와 많은 수의 청자는 두나라의 밀접한 교류의 증거이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기록속 중국과의 교류
280년(고이왕47), 서진에 자주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침, <진서>
372년(근초고왕27), 사신을 동진에 파견함, <삼국사기>
416년(전지왕12), 동진의 안제가 전지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진동장군백제왕'으로 책봉함, <삼국사기>
440년(비유왕14), 송에 사신을 파견함, <삼국사기>
463년(개로왕9), 송에 사신을 파견함, <남제서>


청자병(중국 동진 4~5세기, 천안 화성리, 복제), 흑유닭모양 항아리(중국 동진 4~5세기, 천안 용원리, 복제), 흑유닭모양 항아리는 물따르는 주둥이가 닭머리모양으로 생긴 항아리이다. 천안 용원리유적 외에 공주 수촌리유적에서 같은 형태가 확인되었으며, 중국 난징의 동진묘에서는 청자닭모양 항아리도 출토되었다.


허리띠꾸미개(중국 동진 4~5세기, 서울 몽촌토성)

 
양모양청자(중국 동진 4~5세기, 원주 법천리, 복제), 양모양 청자는 일반적으로 촉대(촛대)와 같은 조명기구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도 출토사례가 극히 드물며 본로 죽은 사람과 함께 묻는 그릇인 명기일 가능성도 있다.


청동초두(1,중국 동진 4~5세기, 전 서울 풍납토성, 2.중국 동진 4~5세기, 원주 법천리, 복제)
초두는 술, 물과 같은 액체를 끓이거나 데우는데 사용한 그릇이다. 고대 중국에서는 일찍부터 제사와 같은 의례에 많이 사용하였다. 흔히 청동이나 철로 만들었으며, 몸통에 긴손잡이와 3개의 긴 다리를 붙인 모습이다. 한국에서 청동초두는 서울과 원주에서 2점만 출토되었으며, 모두 중국 동진 계통으로 추정된다.


청자뚜껑항아리(중국 동진 4~5세기, 공주 수촌리, 복제)

그림속 백제사신
'양직공도'는 6세기 양나라를 찾은 백제.왜 등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 나라의 역사와 풍속을 기록한 화첩이다. 지금 남아 있는 그림은 양나라 원제(재위552~554) 소역이 왕자시절인 539년에 제작한 원본을 1077년 북송시대에 모사한 것이다. '백제국사'로 기재된 그림 속 백제사신의 모습은 가늘고 길게 째진 눈매에 낮고 넓은 콧망울, 작지만 붉은 입술, 오동통한 볼이 특징이다. 머리에 흰색관을 쓰고 두루마기와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색 가죽신을 신었다. 백제사신 그림 옆에는 백제의 유래와 도성.제도.풍속 등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이 백제사신 그림은 백제사람의 구체적인 모습을 담은 유일한 자료이다. 타이완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남당고덕겸모양원제번객입조도'와 '당염립본왕회도'도 '양직공도'의 모사본으로 알려져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당염립본왕회도(중국 당 7세기, 복제)


양직공도(중국 북송 11세기, 복제)


양직공도에 묘사된 백제사신과 글


"고구려에게 자주 격파되었는데 양나라 보통2년에는 여흥(무령왕)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고구려를 여러차례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동진 의회 중에 여진(전지왕)이, 송나라 원가 중에 여비(비유왕)가, 제나라 영명 중에는 여태(동성왕)가 모두 중국의 관직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는 태(동성왕)를 정동장군으로 삼았다."
"백제는 오래전에 동이에서 나왔고 마한에 속하였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해 차지하자 낙랑 또한 요서를 차지하였다. 진나라 이래로 자주 공물을 바쳤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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