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박물관] 한강유역의 신라
삼국시대 한강유역은 475년 고구려가 백제 수도 한성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가 76년간 장악하였다. 이후 백제는 신라와 연합해 한강유역을 되찾기는 했으나 553년부터는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이래 통일신라가 멸망하기까지 약 350년간 신라의 주요 거점으로 존재했었다.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한 뒤로 중국과의 뱃길을 확보하고 지방조직인 한산주를 설치하였으며 여러 산성을 쌓았다. 한강유역의 대표적인 신라 유적지로는 하남 위례성 동남쪽 남한산성 자라게 쌓은 이성산성을 들 수 있다. 이성산서은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둘레 1.6km의 산성이다. 이곳에서는 신라가 쌓은 산성 석축을 비롯하여 자.방망이.톱 등 다양한 생활유물도 출토되었다.
신라, 마침내 한강으로
삼국 가운데 국가체제 정비가 가장 늦었던 신라는 5세기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하였다. 진흥왕은 551년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 상류를, 553년에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까지 확보하였다. 신라는 한강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중국과 직접 통하는 바닷길을 확보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서울 근방에 신주, 북한산주 등을 설치해 이 지역에 통치 기반을 굳건히 다졌으며, 통일 후에는 한산주, 한주를 두어 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이 지역을 350년 이상 지배하였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신라의 또 다른 중심, 한주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전국을 9주로 나누고, 군사.행정상의 요충지에는 5소경을 설치하여 각 지방의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주 아래에는군과 현을 두었으며, 각 주에는 지방군을 1정씩 배치하였다. 지금의 서울은 한주로 편제되었다. 한주는 9주 가운데 관할범위가 가장 넓어 북쪽으로는 예성강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남한강 일대에 이르렀다. 북쪽의 발해와 가까운 국경지대인 한주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곳과는 달리 특별히 남천정과 골내근정 등 2개의 정이 설치되었다. 한주가 위치한 한강유역은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이면서 중국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로였다. 신라는 이를 방어하기 위해 여러 산성을 쌓았다. 대표적인 산성으로는 아차산성.행주산성.오두산성.남한산성.이성산성.계양산성.대모산성.호암산성 등이 있다. 이 산성들에서 다양한 생산도구와 일상생활용품이 출토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신라사람의 일상생활
신라가 한강유역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여러 성 가운데 이성산성은 여러 차례 발굴조사되어 다양한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이성산성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으로 한강유역을 방어하는 요충지에 위치한다. 성벽은 둘레 1.6km, 높이 약 4~5m이며, 두 차례에 걸쳐 축성과 개축이 있었다. 산성 안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다양한 구조물과 나무제품.토기.철기.석기와 기와류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나무제품으로는 자.방망이.톱.빗.배.팽이 등이 있다. 나무자는 발굴 당시 가운데가 부러진 채 뻘층에서 출토되었다. 측면에는 9개의 눈금이 일정한 간격으로 새겨져 있고, 눈금의 간격은 1치 2.9cm이며, 폭도 1치로서 눈금 이외의 글씨는 없었다. 또한 나무로 된 팽이가 출토되었는대, 이 팽이와 유사한 팽이가 익산 미륵사지에서도 출토된 바 있다. 일반적으로 팽이치기는 중국 당나라 때 성행하여 우리나라에는 고려 때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이 팽이가 출토됨으로써 우리나라에도 팽이치기가 신라시대부터 유행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밖에도 호.시루.동이.고배.완 등의 토기와 어골문.격자문.선조문 등의 기와류가 많이 출토되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쇠도끼(서울 호암산성, 복제), 보습(신라, 서울 아차산성, 복제)
쇠스랑(신라, 하남 이성산성), 쇠도끼(신라, 하남 이성산성)
방망이(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숫돌(신라, 하남 이성산성), 돌초(신라, 하남 이성산성)
빗(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나무배(신라, 서울 아차산성, 복제), 팽이(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나무톱(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자(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기와(신라, 하남 이성산성)
쇠초두(신라, 서울 아차산성, 복제)
병(신라, 경기 여주 연양리), 병,
뚜껑(신라, 하남 이성산성), 사발,
합, 항아리,
시루,
굽다리접시, 사발
신라의 문자와 예술
신라의 문자문화는 6세기 들면서 진일보한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한문자 사용수준은 유려한 문자를 작성했다기 보다는 신라만의 고유명사를 한자로 표기하는 정도였다. 지배계급에 한정되어 사용된 문자는 6세기 중엽 이후 경주 밖으로 확산되어 지방에서도 한문자를 사용하는 계층이 점차 늘어나면서 문자사용 수준도 높아졌다. 신라 초기에는 예서와 해서를 주로 쓴 고졸한 서체와 이두식 표현이 많이 있었으나 「진흥왕순수비」를 기점으로 문장이 유려한 한문체로 바뀌어갔다. 이후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제작된 비석의 형식과 문체는 중국 당나라 문화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 있다. 한강유역의 신라 산성에서는 글자가 있는 목간.토기.기와 등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이성산성 목간의 「戊辰」, 오두산성 기와의 「源泉」.「天井」.「下草」.「上草」, 남한산성 기와의 「村主」, 아차산성 기와의 「北漢」.「漢」.「漢山0」.「北北」.「受0」 등이 대표적인 명문이다. 호암산성에서는 「仍伐內力只內末」이 새겨진 청동숟가락이 출토되었다. 잉벌내는 고구려 때의 잉벌노현으로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뒤에도 옛지명을 그대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라의 문자문화와 함께 예술수준을 보여주는 다양한 유물이 이성산성에서 출토되었다. 유물 가운데 신라의 복식문화와 조각문화를 보여주는 예가 있다. 복식문화는 나무인물상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몸에 옷과 목걸이 장식이 표현되어 있다. 옷은 목부분이 둥글게 파여 있고, 허벅다리까지 내려오는 포삼의 형태이며, 허리에는 폭이 넓은 띠를 두르고 치마를 입고 있는 모습이다. 머리는 낮은 복두 같은 것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출토된 나무인면상은 신라의 조각수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얼굴만 새겨져 있다. 왼쪽 머리부분은 결실된 상태이나 둥근 타원형의 얼굴 전면에는 각 구분이 균형있게 자리잡고 있다. 이 조각품은 실제 가면처럼 사용하기에는 소형이므로 의례용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벼루(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연꽃무늬수막새(신라, 서울 아차산성, 복제), 연꽃무늬수막새(신라, 하남 이성산성)
나무인물상(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나무사람얼굴상(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목간(신라, 하남 이성산성, 복제)
글자 있는 청동숟가락(신라, 서울 호암산성, 복제)
신라의 한강진출
신라는 6세기 중반 진흥왕 때에 이르러 활발한 영토확장을 전개하면서 삼국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하였다. 진흥왕은 551년 고구려의 지배 아래 있던 한강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했으며,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도 장악하였다. 신라의 한강유역 장악은 국가기반을 강화하고,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여 이후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강유역에는 북한산순수비.호암산성.아차산성.이성산성.남한산성.행주산성.장의사지 등 대표적인 신라유적이 남아 있다. <출처: 한성백제박물관>
한강 유역의 대표적인 신라 유적지인 하남 이성산성이다. 조선시대 광주목관아가 남한산성으로 옮기지전 관아가 있었던 지역으로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거한 이래로 지역 중심지가 되었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목간을 비롯하여 다양한 신라.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한강 이북. 하남 위례성이 있었던 풍납토성 일대가 내려다 보이는 아차산 언덕에 남아 있는 아차산성이다. 아차산 일대에는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쌓은 많은 보루들이 있으며, 아차산성은 신라가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 쌓은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