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종(梵鍾), '한국종'이라 불리는 독자적 양식을 보이는 문화유산
범종(梵鍾)은 고대 중국 예기(禮器)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여지며, 불교의 전래와 함께 서역문화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말씀이자 부처와 보살에게 바치는 모든 소리를 뜻하는 범음을 만들어내는 도구를 범음구라 한다. 범음구에는 종을 비롯해 큰 북인 법고(法鼓), 나무로 만든 물고기 모양의 목어(木魚), 구름 모양의 운판(雲版)이 있는데 이를 불교사물(佛敎四物)이라 한다.
한국의 범종은 학명으로 ‘한국종’이라 불릴 정도로 독자적인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규모와 장식하고 있는 조각에서 보여주는 예술성 등을 볼 때 신라금관과 함께 우리나라 금속공예를 대표하는 유물이다. 범종은 상원사 동종처럼 주로 오래된 사찰에 걸려 있는 경우가 많지만, 흥천사 종처럼 폐사지에 있던 것을 성문의 종각에 걸어두고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주던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범종으로 통일신라에서 만든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상원사 동종, 고려시대에 만든 흥천사종, 용주사 범종, 조선후기 유명한 승려이자 장인인 사비인구가 만든 범종 등이 있다
통일신라 범종
‘에밀레종’으로 불리기도 하는 성덕대왕 신종(국보29호)이다. 이종은 현존하는 범종 가운데 가장 큰 종으로 높이 3.5m, 무게 18.9t에 이르는 큰 종이다. 이 종은 크기뿐만 아니라 장식된 문양이나 세부조각 수법이 상당히 뛰어나며, 그 구성 또한 독창적이면서 후대의 모범이 되었던 종이다. 원래 성덕왕의 원찰이었던 봉덕사에 매달았는데, 절이 폐사되고 영묘사로 옮겼다가 조선시대에는 경주읍성 남문 밖에서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려주는 종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종은 통일신라 전성기에 만들어진 종으로 크기도 하지만 그 제작수법이나 종에 새겨진 각종 문양과 조각수법 등이 후대에 만들어진 것보다 상당히 뛰어나며 1,3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형이 크게 손상되지 않고 사용되어왔던 종이다.
성덕대왕 신종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종에 새겨진 비천상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천상은 당좌와 당좌 사이에 새겨진 장식으로 종에 따라서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 불.보살상, 보살입상 등이 장식되는데, 이 종에는 향로를 받쳐든 공양자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는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어진 종의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 종의 은은한 소리와 함께 약간 슬퍼보이는 공양자상이 모습이 어린아이를 집어 넣었다는 전설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당좌와 비천상 몸체 사이에 발원문과 함께 종 제작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 등 1,000여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글을 지은 이는 신종 앞면의 글을 지은 한림랑급찬이며, 글씨는 대조 벼슬을 한 요단이 썼다. 이 찬시 역시 앞면과 같이 혜공왕의 위엄을 찬양하고, 경덕왕과 혜공왕의 효심으로 만들어진 신종의 장중한 면모와 아름다운 소리에 대한 찬사, 그리고 신종을 제작한 위대한 업적의 빛남과 영원함을 기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오대산 상원사에 있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종인 동종(銅鐘, 국보36호)이다. 통일신라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진 것으로 성덕대왕신종과 함께 한국종의 완성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높이 167cm 규모이며, 용뉴, 음통, 유곽 등 한국종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갖추고 있다. 이 종은 원래 어떤 사찰에 있었던 것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조선 예종대에 안동도호부 문루에 걸려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당시에도 예술적인 완성도가 높은 것으로 평가받았기때문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세조의 원찰인 상원사로 옮긴것으로 보인다.
청주 운천동 동종은 국내에 현존하는 통일신라 3대종으로 칭해진다. 비천의 포치와 당좌의 형식, 연곽대의 구성문양 등은 통일신라 범봉과 유사하나 화염보주와 화조문 등 새로운 요소들이 고려시대로의 양식적 변화를 보여준다.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에서 발견되어 월정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1950년 한국전쟁으로 불에 타 잔편만이 남아 있는 통일신라 동종이다. 원래 크기는 전체 높이 122cm, 입 지름 68cm이다. 8세기 종에 비해 크기가 줄어들면서 종의 외형은 가늘고 길어졌다. 몸체 내부에 명문이 양각되어 있어 독특한데, 정원 20년인 통일신라 804년에 만들었고 종 주조에 관계된 시주자 명단 등을 통해 당시의 관직명과 이두 등을 살펴 볼 수 있다.
시안 비림박물관 마당에 있는 경운종(景雲鐘, Jingyun Bell)이다. 황실 도교 관청인 경룡관(景龍觀)에서 만들어 ‘경룡관종’으로 불렸으며, 당 예종 경운 2년(711)에 만들어져 경운종이라 부른다. 명나라 때 시안 종루가 세워지면서 1953년까지 종로에 걸려 시간을 알려주었다. 통일신라 성덕대왕 신종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져 같은 역할을 했던 중국을 대표하는 종이다.
고려 범종
범종은 통일신라시대에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금속공예의 주조기술을 바탕으로 '한국종'이란는 고유 양식을 형성하면서 발전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불상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양들이 새겨지고, 위패모양의 틀을 만들어 글을 새기는 방식 등이 보인다.
화성 용주사(龍珠寺) 경내에 있는 동종(국보 120호)이다.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과 함께 우리나라 3대 범종이다. 신라종 양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초기에 만들어진 동종이다. 고리역할을 하는 용뉴는 용이 힘차게 종을 들어 올리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종의 몸체에는 비천상과 삼존상을 두고 있는데 성덕대왕 신종과 비슷하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것이라 새긴 글이 있으나, 형태나 문양 등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것으로 추정하고 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성거산 천흥사명 동종 (聖居山天興寺銘銅鍾, 국보280호)이다. 고려시대 범종 중 가장 큰 규모로 높이 1.33m이다. 꿈틀거리는 용모양이 새겨진 종의 고리인 용뉴는 살아 움직이는 듯하며, 소리울림을 도와주는 대나무 모양의 용통(甬筒)이 있다. 유곽 아래 위패형 틀을 설치하고, 범종을 조성한 내력을 적은 글을 새겨 놓고 있다. 요나라 통화(統和) 28년인 1010년 성거산 천흥사에서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신라범종에서 볼 수 없는 고려시대 범종만의 특징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여주 출토 동종(보물1166호)이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몸통에 있는 위패모의 틀 안에 ‘청녕4년(淸寧四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청녕(靑寧)4년은 요(遙)의 연호로 1098년(고려 문종12)을 말한다. 길이 84㎝로 크지 않은편이다. 용뉴는 용이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종과 마찬가지로 몸통의 위.아래에 띠를 두르고 있으며, 4곳에 유곽을 두고 있다. 몸통에는 흥천사종과 달리 4곳에 비천상을 새겨 놓고 있는데 그 중 2구는 보관을 쓴 보살상을 하고 있다.
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 상장군 조 아무개가 부친과 함께 발원하여 시주한 종이다. 우리나라 범종의 형식을 비교적 잘 갖춘 이 종에는 임금의 만수무강과 국태민안, 중생의 편안함 등을 기원하는 내용의 발원문이 새겨져 있다. '상장군 조'가 누구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종의 모양이나 발원문에 나타나는 관직명칭 등으로 볼 때, 종을 시납한 '을사'년은 명종 15년이거나 고종 32년에 해당한다.
부안 내소사 동은 고려 동종의 양식을 잘 보여주는 종으로 높이 103 ㎝ 크기이다. 종의 몸통에는 삼존상이 새겨 있다. 가운데 본존불은 활짝 핀 연꽃 위에 앉아 있고, 좌·우 양쪽에 협시불이 서 있다. 고려 고종 때 (1222년) 청림사 종으로 만들었으나, 조선 철종 때 내소사로 옮겼다. 한국 종의 전통을 잘 계승한 종으로, 그 표현이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고려 후기 걸작으로 손꼽힌다.
충북 제천부근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고려시대 동종이다. 종의 앞면에는 상주 안수사 사찰이름과 함께 조성연도와 내용이, 뒷면에는 발원자와 장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신라 종을 계승한 고려 종의 전형으로 비천상을 대신한 보살상으로 되어 있으며, 그 위로 닫집이 표현되어 있다.
당좌와 보살상 사이에 명문이 새겨져 있다. '보주는 고려시대에 사용된 예천의 옛지명이고, '사완사'라는 절은 다른 기록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종이 발견된 절터의 이름으로 여겨지며, 제작 시기인 '기축'은 1169년 혹은 1229년으로 추정된다.
중국 시안 천복사 종루에는 금나라 때(1192년) 때 만든 높이 3.35 m의 철종이 있었다. 소안탑과 함께 새벽에 울리는 종소리를 안탑신종(雁塔晨鐘)이라 하여 관중팔경 중 하나로 손꼽이는 명승이었다.
강화 전등사 철종(보물 393호)은 북송때인 1097년에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에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두마리의 용으로 이루어진 종고리와 몸통부분에 상.하 8개씩 정사각형이 새겨진 몸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리를 울리는 소리통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병기를 만들려고 부평 병기창에 갖다 놓은 것을 해방후에 이곳으로 옮겨 놓았다. 천복사에 있는 금나라 철종과 비슷한 형태이다.
조선시대 범종
종로 보신각에 걸려 있던 보신각 종(보물 2호)이다. 조선 세조때 만들어진 것으로 원래는 신덕왕후 정릉 안에 있던 정릉사에 있었으나, 원각사로 옮겨졌다가 임진왜란 이후에 종루에서 시간을 알리는 역할을 해 왔다. 높이 3.18m로 음통은 없고 2마리의 용이 종의 고리 역할을 한다. 몸통에는 종의 연대를 알 수 있는 긴 문장의 글이 적혀있다. 조선초기에 만들어진 종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2번의 화재로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다.
덕수궁 내에 있는 흥천사명 동종(興天寺銘銅鍾, 보물 1460호)이다. 덕수궁 광명문으로 사용했던 건물 안에 자격루와 함께 전시되어 있다. 세조 때 (1462년) 왕실에서 발원하여 조성한 것으로 덕수궁 부근에 있던 흥천사에 걸려 있던 것이다. 조선전기 왕실에서 발원하여 각분야의 기술자들이 대거 참여하여 만든 것으로 ‘흥천사’라는 명문이 있어 흥천사명 동종이라 부른다. 고려말 중국으로 부터 수용된 중국종의 특징이 한국 전통 범종의 양식에 반영되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크기나 문양, 주조기술 등에서 뛰어난 편이다.
계룡산 갑사에 있는 동종(보물 478호)이다. 꼭대기에는 소리가 울려퍼지는 음통이 없으며, 종을 매다는 용뉴에는 2마리의 용을 생동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종의 어깨에는 꽃무늬를, 그 아래에는 연꽃무늬와 글자를 새겼다. 몸통에는 종을 치는 부분인 당좌를 4곳 두었으며, 그 사이에는 지장보살이 표현되어 있다. 조선중기 선조 때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몸통에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 이래 전통적인 범종 양식을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음통이 없는 등 조선시대 범종의 특징도 같이 가지고 있다.
조선후기에는 범종 제작에 뛰어났던 승려 사인비구가 제작한 범종이 잘 알려져 있다. 신라 범종의 외형적.기술적 특징을 계승하고 있다. 포항 보경사 서운암, 문경 김룡사, 홍천 수타사, 안성 청룡사, 서울 화계사, 양산 통도사, 의왕 청계사와 강화부에 8점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