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불교 구산선문 성주산문(聖住山門)
통일신라 선종(禪宗)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성주산문(聖住山門)이다. 통일산라 말 문성돵 때(846년) 무염이 보령 성주사에서 처음 열었다. 낭혜화상 무염(801~888년)은 무염은 태종 무열왕 8대손으로 당나라에 유학하여 20여년 동안 머물면서 선(禪)을 배웠다. 845년 귀국하여 성주사에서 머물면서 베풀면서 많은 후학을 배출하였다. 그중 현휘는 고려 태조에 의해 국사가 되었으며 충주 정토사에서, 대통은 제천 월광사에서, 여염은 양평 보리사에 머물면서 선법을 선양하였다. 성주산문은 고려초 왕실을 후원을 받아 번창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강 일대에 주요 사찰들이 위치하고 있다.
낭혜화상탑비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을 자세히 적고 있는데 당대 최고 문인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 최인곤이 글씨를 썼다. 비문 내용 중 낭혜화상의 신분과 관련된 용어들이 적혀 있어 신라 골품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낭혜는 국왕이 내린 시호이고, 탑 이름은 ‘백월보광’이라고 한다.
보령 성주사지
성주사(聖住寺)는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사찰로 통일신라 선종 구산선문 중 성주산파의 중심사찰이었다. 충남 보령시에서 공주, 부여와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산중에 자리잡고 있지만 그 규모가 상당히 큰 평지사찰로 금당 뒷편에 3기의 삼층석탑, 앞편에는 오층석탑이 배치된 특이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동삼층석탑은 다른 곳에서 옮겨 왔기 떄문에 금당 뒷편에 2개의 탑이 세워 별도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을 중요시 했던 기존 불교와는 달리 수행을 중시여기는 선종계열 불교의 특징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금당터 뒷편에는 3기의 3층석탑이 세워져 있다. 사찰 가람배치에 있어서 3개의 석탑을 나란히 두는 경우는 전례가 없는데, 그 중 하나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금당 뒷편 강당터는 금당에 비해 상당히 큰 규모의 강당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행을 중시하는 선종사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금당 주위로는 회랑 건물터가 남아 있다.
제천 월광사지(月光寺址)
월광사지는 충북 제천시 한수면에 남아 있는 절터이다. 원랑선사 대통(816~883년)은 당나라에 11년간 유학한 후 월광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성주산문을 열었던 낭혜화상 무염의 제자로 알려져 있다. 통일신라 헌강왕이 ‘대보선광’이라는 탑명을 내리고 글을 짓게 하였다. 원랑선사탑비(보물 360호)는 절터에 남아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경복궁으로 옮겨 놓은 후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로비 공간에 전시되어 있다.
충주 정토사지(淨土寺址)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 있었던 정토사는 신라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찰이다. 태조 왕건이 국사로 모셨던 법경대사와 그 뒤를 이어 홍법대사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또한 고려시대 실록을 마지막으로 보관하던 곳으로 이 곳에 있던 실록을 비롯하여 많은 자료와 서적들이 한양으로 옮겨져 세종 때 고려사를 편찬하는 자료가 되었다고 한다. 16세기에는 개천사로 불리면서 사찰이 유지되었으며, 조선후기에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홍법(弘法, ?~?)국사는 고려초에 활동한 승려로 당나라에 유학했으며 말년에 충주 정토사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탑비에 적힌 글자의 마모가 심해 알아보기 힘들어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는 편이다. 고려 목종으로부터 홍법이라는 시호와 실상(實相)이라는 탑호를 받았다.
양평 보리사지(菩提寺址)
보리사는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에 있었던 사찰이다. 절터에는 대경대사탑과 탑비가 남아 있었는데 중앙박물관과 이와여자대학으로 옮겨져 현재는 그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대경대사 여엄(麗嚴, 862~930년)은 구산선문 성주사에서 선종을 연구하였으며,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경순왕의 스승이 되었다. 말년에 양평 보리사에 주지로 활동하다 입적했다. 시호는 대경(大鏡)이며, 탑호는 현기(玄機)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