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불교 법성종(法性宗)
법성종(法性宗)은 일체 만유(萬有)는 같은 법성을 가졌고 모두 성불할 수 있다는 불교 종파로 삼론종, 화엄종, 진언종, 천태조 등 대부분 불교 종파의 교리를 포괄하고 있다. 삼국시대 원효(元曉)가 한국적인 불교로 시작하였으며 통일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불교 종파를 형성했다. 경주 분황사(芬皇寺)를 근본도량으로 하고 분황종이고도 하며 해동종, 중도종이라고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개성 왕륜사(王輪寺)를 본사를 했으며 조선초까지 존립하였으나 불교 종단으로 크게 번성하지는 못했다.
원효(617 ~ 586년)은 의상대사와 함께 한국 불교를 이끈 대표적인 승려로 서당화상(誓幢和尙), 고선대사(高仙大師) 등으로 불렸으며 고려 숙종 때 대성화정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대체로 원효대사(元曉大師)로 불린다. 원효는 불경에 대해 통달했으며 국내 뿐 아니라 당나라 고승들도 그를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불교를 대중화시키고 삼국통일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을 받고 있다.
서당화상비는 경주 고선사 절터에서 출토된 원효대사를 기르는 비석이다. 9세기초 원효대사의 손자 설중업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비문은 33줄이며 한 줄에 61개의 글자가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십문화쟁론'을 비롯한 대표적인 저술서의 성격, 수학과정과 행적, 입적한 장소와 시기, 비석의 건립과 추모사업등을 담고 있다.
경주 분황사(芬皇寺)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때(634년)에 창건된 사찰로 신라 칠처가람 중 한곳이다. 분황사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를 비롯하여 솔거가 그렸던 관음보살상 벽화, 웅장한 약사여래상이 모셔졌던 사찰이다. 원효대사가 머물면서 불법을 가르쳤다고 하여 법성종 근본도량으로 여겨졌다. 분황사는 중문, 석탑, 3금당, 강당. 회랑을 갖춘 큰 사찰이었는데 몽고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전각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현재 분황사 경내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원효대사비를 세웠던 화쟁국사비부, 당간지주, 석정 등이 남아 있다.
분황사는 삼국시대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숲에 세웠던 칠처가람 중 한곳이다. 신라를 건국했던 6촌장 중 고야촌(明活山) 설(薛)씨와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 원효대사의 속성(俗姓)은 설(薛)이며 한국 유학(儒學)의 시조로 여겨지는 설총(薛聰)이 그의 아들이다.
분황사 절터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국보 30호)은 신라 선덕여왕 때 세워졌다. 자연석을 쌓은 기단 위에 1층 탑신을 크게 쌓고 그 위에 낮게 탑신을 쌓아 올렸다. 1층 몸돌에는 4면에 감실을 만들고 입구에 인왕상을 새겨 놓고 있다. 이 인왕상은 이 석탑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인데 조각상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기단부 모서리에는 부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사자상이 세워져 있다.
석탑 수리과정에서 사리갖춤과 각종 공양물들이 발견되었다. 사리는 비단에 싸여 은합 안에 있었으며, 이밖에도 여러 공양물들이 있었는데 그중 바늘.가위.집게 등은 분황사 창건을 발원했던 선덕여왕과 관련을 짓기도 한다. 또한 석탑안에는 북제 동전인 상평오수전과 북송 동전인 송녕중보가 같이 발견되어 고려시대에도 석탑을 해체.수리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분황사지석탑 옆에는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인 화쟁국사비 받침돌이 남아 있다. 고려 명종 때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추사 김정희가 절근처에서 발견하여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통일신라 때 분황사 금당에는 거대한 약사여래상을 모셨다고 하는데 현재 보광전에는 조선후기에 조성한 금동약사여래 입상이 모셔져 있다.
고선사(高仙寺)
고선사는 알천 상류인 경주시 암곡동에 있던 절로 <삼국유사>에 따르면, 이 절은 신문왕 때 원효대사가 머무르던 곳이라 한다. 일제강점기 원효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서당화상비 조각이 발견되어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고선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기록에는 없지만 발굴조사 결과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등이 금동불, 기와, 전돌 등 많은 문화재들이 출토되었다. 절터은 덕동댐 건설로 수몰되었으며 절터에 있던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많은 석조 유물들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고선사지 삼층석탑(국보 38호)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놓은 전형적인 삼층석탑 형태를 하고 있다. 높이 10.2m의 상당히 큰 규모의 석탑이다. 기단은 여러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면에는 기둥모양을 새겨 놓고 있다. 3층 몸돌을 제외하고는 탑신 몸돌도 여러개의 돌을 짜 맞추어서 만들었다. 3층 몸돌은 사리함을 넣어둘 목적으로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감은사지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전기인 7세기에 만들어진 석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