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이야기

백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창건된 부여와 익산의 사찰들

younghwan 2021. 7. 3.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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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침류왕 때(384년) 인도 승려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에서 백제로 건너와 처음 전래되었다. 이후 백제 불교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많지 않지만 일반인들 사이에 성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 성왕 때(526년) 겸익(謙益)이 인도로 방문 후 블경을 가지고 돌아와 범눈으로 된 불경을 번역하였다. 또한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불경과 불교문화와 관련된 인물들을 청했으며 일본에도 불교를 전하여 한국과 일본 불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왕대 이후 불교는 국가 중심적인 종교가 되었으며 국가의 발전을 비는 호국적인 성격의 계율종(戒律宗)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백제는 왕실의 후원으로 수도 부여에 많은 사찰이 세웠으며, 무왕 때에는 새로운 도읍을 건설할 목적으로 큰 사찰들이 세워졌다. 백제 사찰은 중국 낙양 영녕사(永寧寺)사의  영향을 받아 남북 중심축선에 남문, 목탑, 불전, 강당 등을 일직선 상에 배치된 1탑 1금당식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백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세운 대표적인 사찰로는 성왕이 세운 정림사(定林寺), 위덕왕이 성왕을 위해 세운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백제 중흥을 꿈꾼 무왕이 세운 왕흥사(王興寺), 익산 미륵사(彌勒寺), 제석사(帝釋寺) 등이 있다. 

<부여 능산리사지(사적 434호) 절터를 기준으로 재현해 놓은 능사, 부여 백제문화단지 소재>

영녕사는 북위(北魏)의 수도 낙양(洛陽)에 있었던 대표적인 사찰이다. 영녕사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나가면서 남향한 중심축선 위에 남문, 9층목탑, 불전, 강당 등의 건물을 순서에 따라 일직선으로 배치된, 남북조시대의 대표적 1탑1금당식 가람배치이다. 백제 성왕이 사비로 천도하면서 정림사를 세울때 참조했던 사찰이다. 

<낙양 영녕사, 부여 능산리사지, 오사카 사천왕사 가람배치, 부여 정림사지박물관>

부여 정림사지(定林寺址, 사적)

정림사는 백제 사비도성(泗沘都城) 중심부에 위치하는 중심사찰로 경주 황룡사와 비슷한 성격의 사찰이다. 이 사찰이 건립된 시기는 백제가 성왕이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을 옮기던 시기이다. 정림사는 새수도를 건설할 때 도성, 궁궐 등과 함께 도시의 기능을 갖추기 위해 세운 공공시설이었다. 정림사는 백제 궁궐(부여읍 구아리와 관북리 일대)에서 정남방향으로 약 200여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금도 큰 길이 남북방향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여 정림사지(사적)>

정림사는 중문(中門), 탑(塔), 금당(金堂), 강당(講堂)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정림사의 1탑1금당식 가람배치는 백제 사차라을 대대표하는 사찰의 공간배치이다. 발굴조사 결과 사찰 규모는 동서 약62m, 남북 약120m 정도이며 중문, 탑, 금당, 강당, 동서회랑과 동.서.북편건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정림사지 발굴당시 모습과 가람배치, 정림사지박물관>
<정림사지 모형, 정림사지박물관>

중문지(中門址)는 석탑기단에서 남쪽에 있다. 초석 밑에 놓았던 적심석(積心石)은 동서 2열로 배치되어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의 건물로 추정하고 있다. 회랑지는 중문지에서 강당지까지 연결되는 합원형식으로 구축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중문지>
<회랑지>

중문을 들어서면 회랑으로 둘러싸인 경내에는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석탑이 세워져 있다. 이전의 사찰들은 목탑을 세웠는데, 정림사지에는 석탑을 세웠다. 화재에 취약하고 유지보수가 힘든 점을 보완하기 위해 석재를 이용하여 목탑을 모방한 탑을 세웠는데, 석탑 고유의 조형미가 창조되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석탑 중심에서 북으로 26.27m 떨어진 곳에 금당의 중심이 자리잡고 있다. 하층기단에 남아 있는 적심석의 배치로 보아 건물은 앞면 7칸, 측면 6칸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터>

강당은 금당에서 북쪽으로 31.7m 떨어진 지점에 건물의 중심을 두고 있다. 강당은 고려시대에 중건하면서 석불을 모신 불전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의 불전은 백제의 강당보다 작게 조성되었다. 건물 내부에는 고려시대 정림사를 중건하면서 조성한 석조여래좌상(보물108호)이 있다. 

<강당터에 세워진 불상 보호각>
<보호각 내부, 고려시대 석조여래좌상(보물)>
<서편 건물터>
<북승방지>

절터에는 백제에서 만들어진 벼루, 토기와 흙으로 빚은 많은 불상들이 출토되었다. 또한 민무늬토기편이 출토된 청동기시대 문화층과 정림사 창건 이전의 백제시대 문화층과 고려시대 문화층도 확인되었다. 이는 정림사 창건이전에도 공방시설을 조성한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절터에서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기와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그중 ‘정림사(定林寺’)라는 글자가 적힌 것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사찰이름이 확인되었다. 

<'정림사'가 새겨진 암키와, 고려>
<건물 초석>
<연꽃무늬수막새>
<진흙으로 만든 소조상>

부여 능산리사지(陵山里寺址, 사적)

부여 능산리사지는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인 1탑1금당 양식으로 567년에 성왕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왕실에서 발원한 사찰이다.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되고 이 주위를 회랑이 감싸고 있으며 회랑에는 공방지가 마련되어 있다. 절터의 동서북쪽에는 배수로가 설치되어 있으며 중문지 밖의 서쪽 배수로에는 석교와 목교의 흔적이 남아 있고 동쪽에도 석교의 일부가 남아 있다. 일반 강당지와 달리 한 지붕아래에 좁은 통로로 연결된 구조가 다른 2개의 방으로 이루어 진 것이 특이하며 공방지로 추정되는 2군데의 건물은 이 절만의 특수한 기능성을 말해준다.

<부여 능산리사지(사적)>

부여 백제문화단지에는 능산리사지에 있던 사찰을 재현해 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원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지만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건물터를 기준으로 복원해 놓았다. 중문.목탑.금당.강당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회랑으로 둘러져 있는 백제의 1탑1금당식 사찰의 모습을 실제 볼 수 있는 곳이다. 

<부여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사찰>
<목탑터와 금당터>

목탑 심초석 위에서는 사리감(국보)이 출토되었다. 이 사리감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사리공양구로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게 적혀 있다. 심초석 부근에서 불상, 금공예품, 유리구슬 등 다양한 유물들이 같이 출토되었다. 당시 인두, 중국 등에서 확인되는 초기의 사리공양 모습과 유사하며, 우리나라 사리공양의 역사를 잘 보여준다. 

<석조사리감(국보)>
<소조불상편, 서역의 영향을 받은 초기 불상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백제문화단지에 재현해 놓은 금당>
<뒷편 건물터>
<강당>

능산리사지가 건립된 6세기 전반부터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여러 시기에 걸쳐사 만들어진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 절이 여러시기에 걸쳐서 단계적으로 확장된 것으로 보이며, 일반적인 사찰과는 달리 제사를 담당하던 강당주변부터 시작하여, 목탑과 금당이 세워지고 주변건물이 확장된 것으로 추정된다.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들>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국보)는 용모양을 하고 있는 받침, 연꽃잎을 형상화한 몸통과 신선이 사는 박산을 표현한 뚜껑으로 이루어져 있다. 왕실 의례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금동대향로(국보)>
<‘보희사’명 복간(복제품), 물품이동(꼬리표) 목간, 부여 능산리절터, 백제>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나막신(복제품)>
<금구슬, 금제 원추모양 장식, 부여 능산리 절터>

부여 군수리사지(사적)

군수리사지(사적)는 1935년 일본인에 의해 백제 절터 중 최초로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남북축으로 일직선에 배치된 전형적인 백제의 1탑 1금당식 가람배치가 확인되었다. 금당터는 백제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와를 쌓은 와적기단을 사용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목탑터 심초석 부근에서 금동미륵보살입상(보물330호)와 석조여래좌상(보물329호)가 출토되었으며, 칠지도를 비롯하여 다양한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백제 별궁이었던 궁남지(사적 135호) 서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왕실과 관련된 사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 군수리사지(사적)>
<군수리사지 절터에서 출토된 칠지도(복제)>

목탑터 심초석  근처에서 2점의 불상과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왕흥리사지와는 달리 사리구는 출토되지 않았다.

<목탑터>
<석조여래좌상(보물)>
<금동보살입상(보물)>
<금당터>
<호랑이모양의 남자용 요강인 호자>

부여 왕흥사(王興寺)

겸익(謙益)은 백제 승려로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로 여겨진다. 성왕 때 인도에거 율부(律部)를 공부하고 돌아왔으며 귀국하여 백제 불교의 기반을 다졌다. 백제 무왕이 창건한 왕흥사는 백제를 대표하는 호국사찰로 여겨진다. 

왕흥사지(사적 427호)는 부여 부소산성 맞은편 금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백제의 옛 절터이다. 왕흥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여러 문헌에 남아 있다.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해 사찰의 가람배치가 확인되었으며 기와편을 비롯하여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목탑터 심초석 부근에서 금제사리병, 은제사리보, 청동사리합으로 구성된 사리구가 출토되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리구이다. 

<부여 왕흥사지(사적)>

가람배치는 목탑, 금당, 강당이 일렬로 배치된 형태로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 사찰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입구에는 배수로와 연결된 직사각형 모양의 연못이 있으며 왕실과 관련된 사찰답게 나루터에서 사찰입구까지 연결되는 출입로가 있다.

<왕흥사지 나루터와 부소산성>
<목탑터, 금당터, 강당터>
<왕흥(王興)’이라 글자가 새겨진 고려시대 기와편>
<왕흥사지 출토 치미>

부여 왕흥사지 사리장엄구(국보 327호)는 바깥쪽에 청동으로 만든 원통형 사리합을 두고 그 안에 은제 사리합, 금제 사리병이 있다. 동, 은, 금으로 만든 용기에 사리를 모시는 백제 사리장엄구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다. 원통형으로 만들어진 사리합 바깥에는 6행 29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찰의 건립시기와 배경, 사리장엄구의 제작시기 등을 알려주고 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리장엄구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백제 사리엄장구를 확인하는 양식적 기준이 되기도 한다.

<왕흥사지 출토 사리갖춤(국보)>

익산 미륵사지(彌勒寺址, 사적)

미륵사는 백제 무왕이 창건한 백제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석탑 수리과정에서 출토된 사리봉영기에 따르면 백제 왕후가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탑을 세웠다. 절터에는 석탑(국보)만 남아 있는데 석재를 이용하여 목탑 형태를 구현해 놓고 있다.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절터 발굴.조사 결과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절터에 남아 있는 승방의 규모로 볼때에 상당한 많은 인원들이 이 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익산 미륵사지(사적)>

미륵사는 현존하는 사찰이나 절터 중 유일하게 삼탑삼금당식 공간배치를 하고 있다. 공간배치는 석탑을 동.서쪽에 두고 가운데 목탑이 세워져 있다. 각 탑의 뒷편에는 불상을 모시는 금당 건물이 하나씩이 있으며, 공간은 회랑으로 분리되어 있다. 가운데 금당 뒷편에는 큰 규모의 강당이 있고, 그 뒷편으로 3개의 대형 승방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절터 발굴.조사 결과 기와.토기.금속.목재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절터에 남아 있는 승방의 규모로 볼때에 상당한 많은 인원들이 이 곳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사찰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과 남문>
<당간지주>
<회랑과 중문터>
<중문을 들어서면 보이는 목탑터>
<목탑 뒷편 금당터>
<금당 앞 석등 간주석>
<미륵사시 서탑(국보) 복원 작업 현장(2009년)>
<해체전 모습>

금제사리봉영기는 2009년 발견된 것으로 미륵사지 석탑 창건 내력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백제 귀족이었던 사택(沙澤)씨 출신이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금제사리봉영기, 639년>
<금동제 사리외호, 금제 사리내호>
<서금당터>
<서탑 형태를 추정하여 복원한 동탑>
<동금당터>

금당 뒷편에는 상당히 큰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강당터가 있다. 강당은 앞면 13칸, 옆면 4칸으로 내부는 통칸으로 이루어진 건물로 현재까지 확인된 사찰 강당 건물 중 가장 큰 규모이다. 강당 건물 좌우로 통로가 있다. 강당 양쪽으로는 회랑과 연결돤 큰 승방이 되어 있다.

<강당터>
<북승방터>
<익산 미륵사지 금동향로(보물)>

익산 제석사지(帝釋寺址, 사적)

제석사는 백제 왕실의 번창과 안녕을 기원하기 위한 왕실 사찰로 왕궁리유적에서 동쪽으로 1.5 km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 무왕이 이곳 왕궁리로 궁성에 세우면서 불교의 수호신인 제석천을 모시기 위해 세웠다. 제석사에 대한 기록은 백제 무왕 때 천도한 기록과 낙뢰로 인한 화재 기록이 있다. ‘제석사’라고 적힌 기와조각이 발견되어 이곳에 옛 절터임이 확인되었다.

<익산 제석사지(사적)>

제석사지 발굴.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제석사지는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의 중심축이 일직선상에 위치한 백제의 전통적인 1탑 1금당식 사찰배치를 하고 있다. 건물 기단석과 초석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지만 기단 구조와 함께 목탑지 아래 판축 구조가 확인되었다. 또한 동쪽편에는 회랑지와 비슷한 성격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금당터 서쪽에서는 목탑터와 비슷한 규모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중문과 회랑 건물터>
<목탑터>
<목탑 심초석>
<금당터>
<강당터>

출토유물로는 수막새, 암막새, ‘제삭사’ 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 건축부재와 소조상 조각 등이 있다. 또한 백제 말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인동덩굴무늬 암막새는 백제 암막새의 최초 형식을 보여준다. 절터 북쪽으로 500여 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잔해를 폐기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제석사’ 절터였음을 밝혀준 기와조각>
<인동덩굴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도장찍은 기와>

절터 북쪽으로 500여 m 정도 떨어진 곳에서 화재로 소실되었을 때 잔해를 폐기한 유적으로 확인되었다.  7세기 전반의 연꽃무늬 수막새, 불에 탄 소조불상 및 악귀상, 벽체편 등이 다수 출토되어 이곳이 제석사지의 화재와 관련된 건물 폐기장임이 확인되었다.

<연꽃무늬 수막새, 익산 제석사 폐기장 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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