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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14

[창덕궁] 궐내각사 예문관, 국왕의 말과 글을 대필하는 국왕 보좌기관

궐내각사는 규장각을 홍문관, 예문관, 내의원 등 국왕을 직접 보좌하는 관청들인 모여있는 곳으로 창덕궁 정문을 들어서면 정면에서 볼 수 있는 건물들이다. 경복궁에서도 경회루 앞의 수정전을 중심으로 같은 기능을 하는 관청들인 모여 있었다고 한다. 이들 건물들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철거되고 없어졌던 것을 2005년 창덕궁 궐내각사가 먼저 복원되었다. 궐내각사는 정전인 인정전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왕과 가장 가까운 곳에 예문관과 내의원이 위치하고 있고, 그 앞쪽에 국정을 자문하는 홍문관이 자리잡고 있다. 예문관, 내의원 등은 정전 옆 작은 출입문을 통해 정전으로 출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문관은 국왕의 말이나 글을 대필하는 기관으로 세조대에 집현전이 혁파되면서 도서출판의 기능은 홍문관으로..

조선 관아 2012.09.27

[창덕궁] 궐내각사 규장각,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자 학술연구기관

창덕궁 궐내각사 중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조선 왕실의 도서관이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이다. 조선초기 세종이 창설했던 학술 연구기관인 집현전의 예를 본받아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창설된 기관이다. 창덕궁 외조 출입문 앞을 흐르는 금천을 기준으로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규장각은 책을 보관하던 주 건물인 규장각을 비롯하여 검서관들이 근무했던 검서청, 역대왕들의 글과 그림을 봉안하던 봉모당, 입구의 행각, 뒷편의 책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규장각은 원래 숙종대에 왕이 지은 글인 어제와 왕의 글씨인 어필을 봉안하기 위해 지은 작은 건물이었으나, 정조대에 규장각을 확장하여 창덕궁 후원에 2층건물을 짓고 1층에 규장각 현판을 걸고 정식 정부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정조는 규장각에 기존의 어재.어필..

조선 관아 2012.09.25

[창덕궁] 궐내각사 검서청, 규장각 검서관들이 근무하던 관청건물

조선시대 궁궐 건물배치에 있어서 남북을 축으로 외조, 정전이 있는 외전, 국왕의 일상 집무공간인 편전, 국왕과 왕비, 왕실가족의 처소인 내전 등으로 구성하고 있다. 궁궐 중심축의 정전을 중심으로 동쪽편은 세자의 거처 및 집무공간인 동궁을 비롯하여 그 뒷편으로는 궁궐에 거주하는 후궁들을 비롯하여 왕실가족 거처공간이 마련되고, 서쪽편으로는 국왕을 보좌하는 직속관청들이 들어서 있는 궐내각사가 형성되어 있다. 창덕궁도 마찬가지로 정전인 인정전 동쪽편으로 궐내각사들이 들어서 있는데, 정치를 보좌하는 홍문관, 건강을 보살피는 내의원이 정전 바로 옆에 있고, 바깥쪽으로는 정조가 세종대의 집현전을 참조하여 만든 규장각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창덕궁 궐내각사 중 금천 서쪽편에는 규장각 부속건물로 출판될 서적의 교정과 서..

조선 관아 2012.09.24

[고궁박물관특별전] 다시 찾은 조선왕실 의궤와 도서, 조선의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문치주의와 유교적 사회를 추구한 조선은 건국초부터 문물제도의 정비, 지식의 보급, 인재 양성 등 국가 통치라를 위한 수단으로 다양한 도서를 수집, 편찬하였다. 조선시대 서적의 편찬은 중앙정부에 서적 편찬을 위한 관청을 두고 많은 종류의 서적을 발간하였으며, 지방정부인 감영과 민간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서적들을 출판하였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일성록'은 그 자료의 방대함과 일관성 있는 기록 등으로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조선시대 문서 및 서적의 관리는 중앙 정부의 학술기관인 집현전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관리되기 시작하여, 홍문관, 규장각 등으로 계승되었으며, 전국에 사고와 외규장각을 설치하여 이런 방대한 자료들을 ..

지역박물관 2012.02.03

서울대 규장각, 대한제국의 성립과 국권침탈

구한말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국가주도의 개혁인 갑오개혁이 있었고,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 이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조선은 서구화를 향한 일련의 개혁조치인 광무개혁이 있었다. 기존의 국호인 조선을 버리고 대한제국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주권국으로서 황제를 칭하고, 이에 부응하는 일련의 조치가 있었다. 이후 러시아와 서구열강의 지원을 받았던 일본과의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력은 더욱 공고해지고 결국은 1910년 일본에 병합되는 결과에 이르게 되었다. 서울대 규장각에는 비록 원본은 아니지만, 대한제국 성립 이후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각종 조약.협정 문서들을 전시하고 있다. 규장각에서 이런 문서를 전시하면서 그런 조..

지역박물관 2011.03.01

서울대 규장각 소장 고지도

서울대 규장각에는 주로 조선시대에 그려진 수백종의 고지도를 소장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고지도는 19세기에 그려진 목판본 지도인 고산자 김정호 선생의 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비록 국내에 소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선초 권근을 비롯한 문신들의 주도로 원나라지도와 우리나라지도, 일본의 지도를 편집하여 그린 혼일 강리역대국지도는 당대에서는 가장 수준 높은 지도로 알려져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지도는 조선후기에 구한말에 많이 그려진 세계지도, 민간의 학자들이 그린 같은 수준높은 전국지도, 회화의 형식으로 그려진 군현도, 변방 방위를 위해서 그린 관방도 등이 있다고 한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진경산수화의 발달에 따른 산수화풍의 도성도가 많이 그려졌다고 한다. 이런 고지도들은 대동여지도처럼 목판본으로 그려진..

지역박물관 2011.02.24

서울대 규장각, 역대 국왕의 어필과 한글 자료들

조선시대 규장각 설립의 원래 목적은 역대왕들의 글과 글씨를 모아서 보관하고 이를 책자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규장각에서도 조선시대 역대 왕들과 왕실인사 등의 글씨를 소장하고 있는데, 직접 쓴 글씨도 있고, 목판 등으로 간행된 경우도 있다. 현재 규장각에는 선조가 그린 난초그림과 숙종, 영조이 글씨가 전시되어 있는데, 교육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상당한 명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영조의 글씨는 여러 드라마나 초상화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던 불같은 성격을 잘 보여주는 힘있는 글씨체이다. 또한 규장각에서는 한글로 작성된 상당수의 고문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국왕을 비롯한 집권세력의 뜻을 일반백성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초기의 같은 문서와 후대 궁궐 여자들을 위해 작성했던 ..

지역박물관 2011.02.23

서울대 규장각이 소장한 회화자료

조선시대 역사를 기록한 자료로는 국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과 일상을 세세히 기록한 , 왕실 주관의 각종 행사를 기록한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의궤는 왕실주관의 각종 행사와 주요 절차를 그림과 함께 정리한 기록이다. 조선왕조 의궤에 기록된 그림들은 당대 최고의 전문화가라 할 수 있는 도화서 화원들이 사실에 근거해서 그린 그림으로 기록화에 가까운 그림들이다. 이들 그림들은 당시에 사용하였던 최고급 안료를 이용하여 최고의 화가들이 그렸기때문 기록화로서의 의미뿐만 아니라 그림으로서도 상당히 수준이 높은 그림들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행사들에는 기념촬영 등을 통해서 행사장면을 남겨놓고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그림으로 중요한 행사장면들을 남겨 놓고 있다. 특히 의궤는 조선후기 문예중흥기라고 할 수 있는 영.정조대에 상..

지역박물관 2011.02.22

서울대 규장각, 조선왕실 기록인 실록과 의궤

은 태조에서 철종까지 조선왕조 472년 간의 역사를 기록한 방대한 역사책이다. 1997년에 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기록된 실록은 왕과 관련된 정치뿐만 아니라 외교,경제,군사 등을 비롯하여 민간생활까지의 다양한 내용들을 기록한 역사책으로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역사책이다. 조선사회는 역사를 기록하는 관리인 사관을 두어 왕이 주관하는 모든 행사에 참석하여 그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실록의 편찬은 왕의 사후에 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근간으로 해서 당시의 모든 자료를 참조하여 실록을 작성했기때문에 그 내용의 객관성을 상당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유교사회인 조선왕조에서는 역사기록을 매우 중요시 여겨 당대의 집권자들이 정치를 함에 있어서 후대의 평가를 두려워하게 하여,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게 ..

지역박물관 2011.02.21

서울대 규장각, 정조대왕의 흔적들

규장각은 조선후기 왕실의 학문연구기관이자 도서관으로 원래는 역대 임금의 어제, 친필 등을 보관하던 곳이었다. 규장각은 조선 숙종때부터 존재하기는 했으나, 현재와 같은 기능을 하기 시작한 것은 정조가 즉위한 해인 1776년에 창덕궁에 규장각을 세우고 관리를 두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조선 세종대의 집현전에 그 근원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왕건을 위협하던 세력들을 누르고, 학문이 깊은 신하들을 모아 학문을 토론하게 하고 학문을 장려함으로써 그들을 국왕의 친위세력화하는데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세종대의 집현전 학자들 상당수가 단종의 복위를 꾀했던 사육신이나 생육신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많은 자료들을 보면 정조는 규장각 학자들을..

지역박물관 2011.02.20

서울대 규장각,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많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학술연구기관

규장각은 조선후기 정조가 설립한 학술기관으로 원래는 역대 국왕들의 쓴 글과 글씨인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던 곳이다. 조선 후기 영.정조 부흥기에 사회적 변화에 대처하려는 필요성에 따라 국왕 직속의 학술 기관으로 조선과 중국에서 간행된 책들을 소장하고, 당시 사회적인 수요에 따라 각종 서적을 편찬하는 기능을 가졌던 곳이다. 규장각은 창덕궁 정문 부근에 위치한 궐내각사에 위치하고 있어서 소장 도서의 보관을 위해 강화도에 외장규장각이 설치되어 있었다. 외규장각에서 보관하고 있는 다수의 문서들은 구한말 프랑스와 전쟁인 병용양요시 프랑스군이 침탈하여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현재 이의 반환문제가 논의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현재 규장각은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장각에서 소장..

지역박물관 2011.02.19

[중앙박물관 조선실] 영조의 탕평정치와 정조대 문화의 진흥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휴유증을 극복하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병자호란 이래로 송시열을 중심으로 계속되어온 당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영조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역량과 권위로 조금이나마 제압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또한 중국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심으로 안정화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영.정조대를 대표하는 정책으로는 탕평책으로 대변되는 당쟁의 극복과 왕권의 확립, 균역법으로 대표되는 조세개혁을 통한 경제 안정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조대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학문장려, 중국 문물됩과 함께 크게 융성한 실학, 대량 출판을 통한 지식의 확산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큰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를 중..

중앙박물관 2011.02.04

[서울 고궁박물관] 정조와 규장각 신하들이 꽃놀이하면서 지은 시

고궁박물관에 전시된 궁중 미술 관련 유물 중 눈에 띄는 것 중의 하나가 정조대왕이 당대의 핵심관료이자 학자들이 규장각 관헌들과 창덕궁 후원에서 꽃놀이를 하면서 지은 시들이다. 1792년 봄의 '내원상화임자갱재축'과 1793년 봄의 '내원상화계축갱재축'에서 약 40명 정도의 신하들과 술을 마시고 꽃구경을 하면서 시를 읊고, 글을 쓰면서 신하들과의 우의를 다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은 규장각 관헌과 그들의 자제들인데, 정조대왕이 살갑게 규장각 학자들을 대했음을 알 수 있다. 참석한 사람들의 이력을 보면 정조 사후에 몰락한 사람도 있고, 무난히 살았던 사람도 있고, 다양한 인생경로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글들을 보면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다양하게 글을 짓는..

지역박물관 2010.11.27

[서울 고궁박물관] 조선 왕실의 문예, 국왕 짓고 쓴 글

조선시대 국왕이 직집 지은 글을 어제, 글씨를 서필이라고 한다. 어제와 어필은 국왕의 권위를 나타내며, 국왕의 일생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선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실록과 더불어 어제.어필을 수집하고 간행하는 것이 크게 중요시 되었다. 특히 숙종~영조 시대에는 역대 왕들의 어제와 어필을 편집하고 인쇄하여 책이나 첩으로 많드는 것이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에 국왕은 공적.사적으로 많은 글들을 친히 짓고 썼으며, 서원에 편액을 내리거나, 궁궐 건물의 편액을 직접 쓰기도 했다. 국왕이 쓴 글들은 모아서 책이나 첩으로 만들거나 돌이나 나무에 새기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그 내용이 오늘날까지 전해내려오는 경우가 많다. 고궁박물관에는 많은 양의 어필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상당수는 영조가 적은 ..

지역박물관 2010.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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