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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35

광주 개원사, 남한산성 승병을 총지휘하는 본영사찰

남한산성 남장대가 있는 능선 안쪽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 사찰인 개원사이다. 지금 볼 수 있는 개원사는 규모가 크지 않고 문화재도 거의 없어 전통이 없어 보이는 사찰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 승군들의 본영으로 전국의 사찰들을 규찰하는 조선불교의 총본산이었던 사찰이다. 병자호란에 대비하여 조정에서는 전국에서 승려들을 동원하여 남한산성 축성 임무를 맏겼다. 이때 승려들의 숙소와 수행을 의한 공간으로 10개의 사찰을 신축하였는데, 개원사는 산성내 승군들을 총지휘하는 본영사찰이었다. 개원사는 병자호란때 창건된 이래로 남한산성 방어와 유지보수에 승려들이 큰 역할을 했던 까닭에 개원사는 구한말 갑오경장으로 승병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을사늑약과 군대해산 때 일제가 사찰에서 보관하던 무기를 수..

전국 사찰 2014.04.24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 산성 북쪽 한강에 내려다 보이는 능선에 설치된 방어시설

남한산성 연주봉 옹성은 남한산성 아래 광주의 중심지역이었던 춘궁동, 이성산성 일대, 한강과 그 너머의 아차산성이 내려다 보이는 중요한 지점에 설치된 방어시설이다. 남한산성 서문에서 북문을 연결하는 성벽 바깥쪽으로 돌출된 능선에 성벽과 여장, 포대를 설치한 옹성으로 그 둘레는 315m이며, 73개의 여장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의 연주봉 옹성된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훼손되었던 것을 고증을 통해서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옹성은 원래 성문을 호위하기 위해 성문바깥쪽에 반원형으로 돌출된 성벽을 쌓은 것이 일반적인데 비해 남한산성 옹성은 성벽 바깥쪽 방어에 취약한 능선에 기존의 성벽에서 돌출된 형태로 쌓은 방어시설로 적이 거점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제압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남한산성의 ..

남한산성 우익문(서문), 한양과 연결된 성문

남한산성 서문은 우익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는 성문으로 남한산성 북동쪽 모서리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성문이다. 산성의 성문과 연결되는 도로가 없고, 성문 앞은 경사면이 급해서 등산로로만 이용되고 있을뿐이지만, 한양에서 송파나루를 거쳐서 성문으로 통하는 길이 가장 가까운 길이기때문에 이 곳에 성문이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성문은 문루와 출입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도로가 없는 까닭에 출입문의 크기는 일반적인 성문에 비해서 작아 보인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주둔했던 지역 또한 이 서문 아래의 송파지역으로 산성내에서도 가장 전투가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성문은 일반적인 산성의 성문과는 달리 한양에서 피신한 국왕 일행이 가장 빨리 산성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설치한 것으로 보이며, 산성이 처음 축조..

남한산성, 수어장대에서 서문(우익문)까지

남한산성의 중심이 되는 수어장대를 내려서 서울 송파지역과 연결되는 등산로가 있는 서문(우익문)까지의 성곽길이다. 수어장대에서 서문을 지난 북문까지의 성곽은 비슷한 고도를 따라서 능선길이 있으며, 경사가 별로 없는 언덕길을 내려가는 것과 같다. 옛날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송파지역에 주둔했던 것처럼, 남한산성을 침입하는 가상의 적은 대부분 이쪽방면으로 올라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성벽의 석축은 매우 견고하게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역사에 있어서 남한산성은 조선시대 수도인 한양을 방어하는 목적이 있었던 산성이지만 이는 주로 병자호란때 경우를 말한다고 할 수 있으며, 실제로는 한양과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고, 한강을 건너야 했기때문에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항하여 국왕이 이 곳으로 피난할 목적으로 ..

남한산성, 수어장대 아래 서암문(제6암문)

남한산성 지휘부가 있었던 수어장대 아래에는 바깥으로 통하는 서암문이 있다. 수원화성 서장대나 동장대 부근에도 암문이 있었는데 이 곳 남한산성에서도 수어장대 아래에 지휘부가 빠져나갈 수 있는 통로인 암문을 두고 있다. 이 암문을 빠져 나가면 남한산성 아래쪽인 송파지역과 연결되며, 옛날에는 송파나루를 거쳐서 도성인 한양과 연결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암문 북동쪽으로는 성벽을 돌출하여 적이 이 암문을 통과할 때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도록 설치되어 있어며, 암문은 눈에 잘 띄지 않게 평거식으로 낮은 통로만 두고 있다. 지휘부가 있었던 수어장대 부근이라서 그런지 암문 주위 성벽은 주위보다 높고 튼튼하게 석축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서암문(제6암문) 암문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한 성문으로, 일종의 ..

남한산성 수어장대(서장대), 청량산 정상에 세운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

남한산성에 쌓은 4개의 장대 중 서장대에 해당하는 수어장대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안에서 최고 높은 곳인 청량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성내부와 주변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특히 도성인 한양과 한강, 그리고 한양과 남한산성까지의 길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주둔하고 있던 삼전도비가 있는 송파구 일대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라 인조가 직접 수어장대에 올라 전행을 지휘했다고 한다. 수어장대는 원래 1층 누각이었으나, 영조때 다시 위에 2층 누각을 지었으며, 바깥에는 '수어장대', 안쪽에는 병자호란의 시련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무망루'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는데, 현재 '무망루'현편은 수어장대 오른쪽에 별도의 보호각을 만들어서 전시해 놓고 있다. 인조때..

남한산성, 영춘정에서 서암문까지 산성 서쪽 성벽

남한산성 남문에서 출발하여 영춘정까지의 성곽길은 오르막길이 많고, 성곽 바깥쪽으로 수목이 우거져서 산성아래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으나, 전망 좋았던 곳에 설치된 영춘정부터는 산성아래 풍경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산성 아래쪽에는 옛날 문무대가 있었던 육군군사학교와 남성대 골프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가락동을 비롯하여 멀리 한강까지 서울 도심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남과 서울 방향으로 산성자체가 평지에서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성곽 바깥쪽은 경사가 심한 언덕으로 되어 있어 천연적인 요새처럼 적이 산성까지 오르기 어려운 지형을 하고 있다. 실제 병자호란 당시 한강을 건넜던 인조 일행은 산성 서쪽으로 들어왔지만, 실제 서쪽 성벽은 지형이 험하기때문에 큰 전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나라군은 남..

남한산성, 남문(지화문)에서 영춘정까지

남한산성 경기도 성남시 동쪽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청량산과 남한산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분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길은 광주시에서 계곡을 따라서 올라오는 길과 성남시에서 능선을 따라서 올라오는 길이 있다. 평지에서 산성까지 들어오는 길은 상당히 험한 편이고 산성 바깥쪽으로는 경사가 심한 반면에 산성에서는 서울을 가로 질러 흐르는 한강을 비롯하여 서울 전체와 성남지역이 막힘없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어 산성으로서는 조건을 상당히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 남문은 지화문이라고도 부르며, 성남쪽과는 능선을 따라서 만들어진 도로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다. 이번에는 남한산성 성곽을 돌아보는 가장 편한 길 중 하나인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서 ..

경기도 광주향교, 남한산성에 있던 광주부 관아에서 설치한 공립교육기관

경기도 광주는 고려 성종때 전국에 설치한 12개 행정구역 중 하나인 광주목이 설치된 지역으로 그 범위는 현재의 광주시,성남시, 서울의 강남지역을 포함하는 큰 고을이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한성 백제의 수도가 있었던 지역이었고, 통일신라시대에는 이성산성을 중심으로 한강유역의 중요한 거점이었으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했던 시기에도 광주호족은 전국의 유력 호족 가운데에서도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지역이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광주목은 인조대에 광주부로, 숙종대에는 광주유수로 승격되었다. 원래 광주의 중심지역은 현재 하남시 춘궁동 지역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병자호란 이후에 관아를 남한산성으로 옮겼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는 통일신라시대 산성인 이성산성과 고려초기 절터이 춘궁동사지가 있으며, 조선시대 공립교육기관..

광주 망월사, 남한산성 축성을 위해 동원된 승병들을 위해 창건한 사찰

남한산성 동쪽 해발 467m의 망월봉 아래에 위치한 망월사는 남한산성 축성과 방어를 위해 동원된 전국의 승병들을 위해 창건한 7개 사찰 중 하나로 남한산성에 남쪽편 검단산 방향과 함께 방어에 가장 취약했던 동쪽편 벌봉과 망월봉 주변을 방어하며 성벽을 유지.관리하는 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사찰이다. 이 사찰은 남한산성이 축성되기 이전부터 망월암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었으며, 남한산성 축성과 함께 사찰의 규모가 커졌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망월사는 구한말 일제에 의해 사찰 전체가 불타버리고 폐사되었던 것을 그 이후에 복원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사찰 전각 중 원래부터 있던 건물은 하나도 없고, 건물 터를 잡고 있는 축대에서 옛 망월사의 규모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통일신라시대 주장성이 있었던 남한산..

전국 사찰 2012.08.16

광주 남한산성 관아 건물인 침괘정과 천흥사종이 걸려 있었던 종각

광주부가 있었던 광주부에는 행궁을 비롯하여 많은 관청들과 성벽을 관리하던 사찰과 큰 마을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 없지고 관아건물로는 군사훈련을 지휘하던 연무당과 연못인 지수당,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지만 관아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 침괘정 정도만이 남아 있다. 조선 영조대에 지어진 침괘정은 문헌상 기록으로 무기제작소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건물의 형태는 온돌방과 마루바, 회랑 역할을 하는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는 집무실로 사용했던 관아 건물로 보인다. 아마도 부근에 무기를 제작하는 공방과 창고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한산성 행궁 앞 광장에는 산성내에 시간을 알려주는 종각이 설치되어 있는데, 원래 이곳에는 국보 280호로 지정된 천흥사 종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수도 ..

남한산성 행궁터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주장성 건물터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격전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볼 수 있는 남한산성 성벽을 비롯한 방어시설들은 병자호란을 대비하여 쌓기 시작하여 그 이후에 크게 보강한 것이다. 남한산성은 한강이남을 지킬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방어하기 했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남한산성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문헌상의 기록이나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672)은 당나라 병력 5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보인 시기였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당나라의 남하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주장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주장성은 당나라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으로 한강유역..

광주 남한산성 행궁, 비상시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격전의 현장으로 조선후기에는 한양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거점으로 여겼기때문에 인조대 이후에 성벽을 쌓고 광주부 관아를 옮기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한산성에 행궁이 처음 설치된 것은 이곳에 산성을 크게 보강했던 인조3년이다. 조선시대에 전국 주요 거점에 행궁이 설치되었는데, 비상시 국왕이 피난하는 것을 전제로 지어진 남한산성 행궁에는 종묘와 사직을 옮길 수 있는 좌전과 우실이 유일하게 설치되어 있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져서 그 터만 남아 있던 것을 2012년에 행궁 건물의 복원을 완성하여 산성도시로서의 옛모습을 조금이나마 다시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 뒷편에 설치된 좌전은 종묘의 위패를 비상시에 옮겨놓을 수 있는 건물이며, 우실은 ..

광주 남한산성 행궁(사적480호), 비상시 국왕이 머물수 있는 행궁이자 광주부 관아 건물

남한산성에 있는 옛 광주부 관아 건물이자 국왕이 임시로 머물수 있는 행궁이 설치된 사적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 행궁이다. 이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임시 거처로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을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졌다가 최근에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행궁은 국왕의 거처로 정전과 편전에 해당하는 하궐과 국왕이 머무는 내전에 해당하는 상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광주부 관아 건물인 좌승당과 광주유수의 숙소라 할 수 있는 일장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왕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 수 있는 많은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강이남 일대를 다스렸던 큰 규모의 지방관청이 광주부 관아는 원래 남한산성 아래 하남시 일대에 있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병자호란 최대의 패배가 있었던 곳

남한산성 북문에 해당하는 전승문이다. 이 성문은 원래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부터 있었던 성문은 아니고 인조때 신축한 성문이라 한다. 이 곳의 이름은 '전승문'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이 병자호란 당시 가장 큰 패전이 있었던 장소라서 그 사실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혔다고 한다. 남한산성에서 북문은 서울 강동지역 한강유역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문 아래쪽은 통일신라시대 한강유역을 관리하는 주요 방어시설인 이성산성과 고려초 크게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인 하남 춘궁동과 연결된다. 정문격인 서문과는 달리 일반적인 성곽의 성문과 비슷한 규모로 지었으며, 이 쪽 방면으로는 계곡을 통해서 접근하기는 쉽지만, 계곡과 주변 지역이 경사가 있는 편으로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형을 하고 있다. ..

남한산성 장경사, 산성을 쌓고 지키던 승병들어 거처하던 사찰

병자호란에 대비하면서 조선은 한강이남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였던 남한산성을 크게 개축하면서, 전국의 많은 승병들을 동원하였다. 이 때 벽암각성선사가 조선8도의 도총섭이 되어 승려를 지위하여 남한산성을 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후에도 남한산성 방어에 중요한 역할을 부여 받았다. 남한산성내에는 이때 동원된 승려들을 위해 9개의 사찰이 지어졌다고 하며, 산성내 중심지에 위치한 개원사가 그 중심이 되는 사찰이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에 세워진 9개의 사찰 중 현재는 본영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는 개원사를 비롯하여 망월사, 장경사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데, 이 사찰들은 대부분 남한산성 방어에 취약점을 가지고 있는 남쪽편 검단산 방향과 외성인 봉암성과 한봉성이 있는 망월봉 주변에 자리잡고 있다. 그..

전국 사찰 2012.04.25

남한산성, 동장대에서 북문인 전승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 청량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사방의 지형이 험한편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북쪽 하남 춘궁동은 고려시대 절터인 춘궁동사지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이성산성이 있으며, 고려초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을 관할하던 광주목 관아는 남한산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주향교는 아래쪽 춘궁동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관아가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산성 주변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지방 유적지로 한성백제의 수도인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가까이 있으며,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에 의지하여 외부세력의 공격에 대응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북문 아래의 계곡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

남한산성 봉암성과 한봉성, 동쪽편 벌봉과 한봉 주위 능선에 쌓은 외성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해발 498m 청량산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 동쪽의 망월봉과 벌봉, 남쪽의 여러 봉우리를 연결한 둘레 약 8km의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이다. 남한산성의 지형은 대체로 동쪽 계곡을 제외하고는 성벽 바깥쪽은 경사가 급한편이며, 내부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분지를 이루고 있어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천혜의 요새였던 이 곳에서 인조가 청나라에 마지막 항전을 하였던 곳으로 실제로 인조가 항복하게 된 것은 산성이 점령되었기때문이라기 보다는 강화도가 함락되고, 산성내에 비축한 식량이 부족하였기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기간 중 대체로 청나라군사의 공격을 적절히 막아낼 수 있었지만, 남쪽의 검단산과 연결된 능선, 동쪽의 벌봉,한봉과 연결된 능선에서 청..

남한산성, 장경사신지옹성에서 망월봉 정상 동장대까지

남한산성은 수어장대가 설치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발 497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봉우리와 능선을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부는 물이 풍부하고 병사와 주민이 머무를 수 있는 분지를 형성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쪽의 해발 542m의 검단산과 동쪽의 해발 515m의 벌봉 주변이 남한 산성 본성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곳을 통한 공격에 취약한 점이 있으며,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벌봉과 검단산 능선을 청군이 점령하여 강력한 화포로 본성을 공격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동쪽편에는 외성인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고 남쪽편 검단산에는 신남성 돈대를 쌓았다. 또한 외성과 돈대를 엄호하기 위해 주변 여러곳에 옹성도 설치하였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제1암문에서 장경사 신지옹성까지

남한산성 동쪽편 성벽은 장경사에서 정상부에 해당하는 벌봉부근까지는 아래쪽은 언덕의 경사가 있는 편으로 적의 침입을 제압하기는 수월하지만, 정상부에서는 동쪽의 벌봉 주변과 능선으로 연결되어 방어가 취약했던 부분으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이 동쪽편 봉우리를 장악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던 곳이다. 이런 까닭에 중턱부분에 장경사 신지옹성이 설치되었고, 본성 바깥쪽에 외성으로 봉암성과 한봉성이 설치되었있다. 이들 옹성과 외성들은 병자호란이 끝난후 당시 전투상황을 반성하면서 남한산성의 기능을 보완하는 측면에서 숙종대에 화포와 총포 사용을 전제로 신축된 것들이라고 한다. 남한산성을 축성하고 지키기 위해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지은 사찰인 장경사에서 언덕길을 따라서 올라가다보면 정상부에 조금 못미친 지점에 작은 출입문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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