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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13

강화 충렬사(忠烈祠), 김상용을 비롯한 병자호란때 순절한 인물들을 모신 서원.

1641년(인조19)에 김상용을 비롯하여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인물들을 모시기 위해 세운 강화 충렬사(忠烈祠)이다. 김상용(金尙容)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병자호란때 왕자들을 모시고 강화로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우의정 김상용을 비롯하여 순절한 6인을 모셨으나, 이후 당시 같이 순절한 인물들을 추가하여 총 28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처음에는 현충사(顯忠祠)라 불렀으며, 효종으로부터 '충렬사(忠烈祠)'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받았다. 강화도에 남아 있는 유일한 서원으로 원래는 유생들이 공부하는 교육기관의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제사기능만 남아 있다. 강학공간인 명륜당과 동.서재가 없고 사당, 외삼문, 수직방과 전사청 등만 남아 있다. 구한말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은 전국 ..

남한산성 수어장대(서장대), 청량산 정상에 세운 군사를 지휘하던 장대

남한산성에 쌓은 4개의 장대 중 서장대에 해당하는 수어장대이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안에서 최고 높은 곳인 청량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어 성내부와 주변을 잘 살펴볼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특히 도성인 한양과 한강, 그리고 한양과 남한산성까지의 길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군이 주둔하고 있던 삼전도비가 있는 송파구 일대를 잘 살펴볼 수 있는 곳이라 인조가 직접 수어장대에 올라 전행을 지휘했다고 한다. 수어장대는 원래 1층 누각이었으나, 영조때 다시 위에 2층 누각을 지었으며, 바깥에는 '수어장대', 안쪽에는 병자호란의 시련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무망루'라는 현판을 걸어 놓았는데, 현재 '무망루'현편은 수어장대 오른쪽에 별도의 보호각을 만들어서 전시해 놓고 있다. 인조때..

남한산성, 영춘정에서 서암문까지 산성 서쪽 성벽

남한산성 남문에서 출발하여 영춘정까지의 성곽길은 오르막길이 많고, 성곽 바깥쪽으로 수목이 우거져서 산성아래의 풍경이 잘 보이지 않으나, 전망 좋았던 곳에 설치된 영춘정부터는 산성아래 풍경이 잘 보이기 시작한다. 산성 아래쪽에는 옛날 문무대가 있었던 육군군사학교와 남성대 골프장이 보이고 그 너머로 가락동을 비롯하여 멀리 한강까지 서울 도심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성남과 서울 방향으로 산성자체가 평지에서 상당히 높은 곳에 위치해 있고 성곽 바깥쪽은 경사가 심한 언덕으로 되어 있어 천연적인 요새처럼 적이 산성까지 오르기 어려운 지형을 하고 있다. 실제 병자호란 당시 한강을 건넜던 인조 일행은 산성 서쪽으로 들어왔지만, 실제 서쪽 성벽은 지형이 험하기때문에 큰 전투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나라군은 남..

남한산성, 남문(지화문)에서 영춘정까지

남한산성 경기도 성남시 동쪽 광주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청량산과 남한산 사이에 위치한 조그만 분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산성으로 들어오는 길은 광주시에서 계곡을 따라서 올라오는 길과 성남시에서 능선을 따라서 올라오는 길이 있다. 평지에서 산성까지 들어오는 길은 상당히 험한 편이고 산성 바깥쪽으로는 경사가 심한 반면에 산성에서는 서울을 가로 질러 흐르는 한강을 비롯하여 서울 전체와 성남지역이 막힘없이 잘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어 산성으로서는 조건을 상당히 잘 갖추고 있는 곳이다. 남한산성 남문은 지화문이라고도 부르며, 성남쪽과는 능선을 따라서 만들어진 도로를 통해서 들어올 수 있다. 이번에는 남한산성 성곽을 돌아보는 가장 편한 길 중 하나인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서 ..

서울 삼전도비(사적101호), 병자호란 패전의 치욕적인 상징물

서울 송파구 잠실동 석촌호수 동쪽편에 위치한 삼전도비는 병자호란에 승리한 청나라 태종이 조선에 요구하여 세운 전승비로 치욕적인 역사를 상징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남한산성에세 패전한 인조는 청태종에 땅바닥에 머리를 9번 찧는 굴욕적인 항복의식을 치루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라 할 수 있다. 정식명칙은 "대청황제공덕비"로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출병한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청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회군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높이 5.7m로 거북받침돌 위에 대리석으로 세운 비석에 앞면에는 만주어, 몽골어로, 뒷면에는 한자로 글자를 새겨 놓고 있다. 원래 한강 나루터 인조가 항복했던 장소에 세워졌던 것을 치욕의 역사물이라는 이유로 1895년 청일전쟁 이후 고종이 강물에 수장시..

남한산성, 동장대에서 북문인 전승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 청량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사방의 지형이 험한편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북쪽 하남 춘궁동은 고려시대 절터인 춘궁동사지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이성산성이 있으며, 고려초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을 관할하던 광주목 관아는 남한산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주향교는 아래쪽 춘궁동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관아가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산성 주변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지방 유적지로 한성백제의 수도인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가까이 있으며,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에 의지하여 외부세력의 공격에 대응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북문 아래의 계곡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

남한산성, 동문인 좌익문(左翼門)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서장대를 중심으로 주변 산능선을 따라서 석축을 쌓은 둘레 8km의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에 4개의 대문을 두고 있으며 좌익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동문은 광주지역과 연결되는 성문으로 한반도 중부내륙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동문은 산성내 행궁을 중심으로 좌측에 위치하고 있어서 좌익문이라고 부른다. 동문은 남문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가장 통행이 많았던 성문으로 광주에서 계곡을 따라 평탄한 길이 나 있기때문에 아마도 산성내 필요한 물자는 동문을 통해서 공급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동문은 지형적인 이유로 계단을 쌓고 그 위에 성문을 축조했기때문에 실제 우마차나 사람들의 통해은 남쪽편에 있는 제11암문을 이용했을 것..

남한산성, 제3남옹성에서 동문(좌익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서장대가 있는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작은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서쪽으로는 서울 송파나루를 비롯하여 성남을 거쳐 서울로 연결되고 있으며, 남쪽은 검단산, 동쪽으로는 경기도 광주를 거쳐 이천, 여주, 진천 등 한반도 중부내륙지역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성곽은 병자호란 당시 드러난 방어상 취약지점인 남쪽편 성벽 앞으로 설치된 3개의 옹성을 지나면 동문인 좌익문까지는 약간 경사진 지형을 따라서 성벽을 쌓고 있다. 남장대 부근의 평탄한 지형이 끝나는 지점에 설치된 방어시설인 치(雉)를 지나면 특별한 방어시설은 설치되어 있지 않고, 지형에 따라서 성벽과 여장만 설..

[경기도박물관] 남한산성특별전, 병자호란 47일간 기록

남한산성은 수도를 방어하고 한강이남 주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쌓은 천혜의 요새이지만, 병자호란 47일간 항전의 현장이자 치욕의 장소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626년 청나라는 백마산성을 비롯하여 주요 공격로에 배치된 산성을 이용하고자 했던 조선의 방어전략을 무력화시키면서 이를 우회하여 무려 10여일만에 수도인 한양을 직접 공략하였다. 워낙 청나라의 전략과 군사적 능력이 출중하였던 까닭에 원래 강화도로 피신할 계획이었던 인조는 불가피하게 남한산성에서 농성을 하였으나, 식량의 부족과 청나라의 효과적인 공략으로 47일만에 항복하게 되었다. 병자호란은 17세기 동아시아 역사를 크게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전쟁기간은 47일에 불과하기때문에 이 전쟁에서 개별 사건이나 인물은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고, 당시 ..

남한산성, 남장대에서 제3 남옹성까지

한강 이남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남한산성은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작은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한강과 서울이 내려다 보이는 북쪽과 동쪽은 경사가 심한편으로 적이 공격하기가 쉽지 않고, 동쪽은 경사가 원만한 편이지만, 계곡을 형성하고 있어서 쉽게 공략하기는 힘든 지형을 하고 있다. 반면에 남쪽은 약간 떨어진 곳에 검단산이 있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능선에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어 검단산에서는 쉽게 공략할 수 있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검단산까지 성곽으로 연결하게 되면 방어해야하는 범위가 너무 넓어지는 단점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는 남쪽 검단산 지역에을 점거하여 강력한 화포로 남쪽편 성벽을 공략하여 남한산성에서 농성하..

남한산성, 제1남옹성에서 남장대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에 위치한 청량산을 중심으로 동쪽의 남한산, 남쪽의 검단산 사이에 형성된 분지를 둘레 8km의 석축으로 쌓은 조선시대 산성이다. 남한산성은 한성백제시대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후기 인조대에 청나라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쌓은 대표적인 산성으로 장대.돈대.암문 등 다양한 방어시설과 행궁 등 관아 건물들을 두고 있다. 남한산성은 전체적으로는 높고 경사진 지형에 석축을 쌓았기때문에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으며, 역사 이래로 성이 함락된 적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남한산성에서도 상대적으로 취약한 부분은 남쪽편 검단산 정상과 연결되는 능선지역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검단산과 약간 떨어져 있어서 전체적으로 산성을 쌓아서 방어하기에는 그 범위가 넓어지는 약점..

남한산성, 남문인 지화문(至和門)

남한산성은 한성 백제시대에 처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는 통일신라가 이 곳에 주창성을 쌓고 한강유역을 지키는 중요 산성으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까지도 남한산성이 존재하기는 했지만 임진왜란 이후 청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서 수도인 한양을 지키는 성곽으로서 그 역할이 크게 중요시 되었으며,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피신했던 성으로 45일간 이곳에서 항전하였다. 지금에 와서 볼 수 있는 견고한 석축과 방어시설이 완비된 산성으로의 모습은 상당부분 숙종때 쌓은 것이며, 정조대에 크게 개축하였다고 한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방향으로 4개의 성문을 두고 있는데, 그 중 성남에서 올라오는 출입문인 남문에 제일 큰 규모로 실제 남한산성의 정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송파나루와 ..

[중앙박물관 조선실] 병자호란과 그후, 붕당정치와 새로운 질서의 모색

조선중기 임진왜란으로 동아시아 각국에는 크나큰 변화가 발생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종식하고 중앙집권적인 동경중심의 막부정치가 시작되었고, 북방에서는 만주 여진족이 크게 성장하여 명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허약함을 드러낸 국왕과 집권층에서는 중립외교를 추구한 광해군을 축출하고 명분론적이며 친명을 표방한 서인세력이 집권했다. 인조대 조선을 침략한 청나라에 허망하게 굴복하고, 명나라 또한 농민혁명과 청나라의 침입으로 멸망하면서 새로운 국제질서 정립되었다. 병자호란은 한반도에서는 보기 드물게 허무하게 북방민족에게 굴복한 사례라서 그런지 우리나라에서는 병자호란을 상징하는 유적이나 유물이 남한산성이나 강화도를 제외하고는 별로 찾아 보기 힘든 형편이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중앙박물관조차도 병자호란..

중앙박물관 2010.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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