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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7

[창경궁] 영춘헌과 집복헌, 후궁들의 거처로 사도세자가 태어나고 정조가 승하한 곳

창경궁 내전의 중심건물인 통명전과 양화당 일대는 대비를 비롯하여 왕실이 어른이 거처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궁궐에 속한 많은 후궁들과 궁녀, 어린 왕실 가족들이 거처하는 왕실의 생활공간으로 궁궐내 마을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다. 조선전기에는 경복궁이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되기도 했지만, 창덕궁에 국왕이 주로 머물렀던 조선후기에는 동궐 중 창경궁과 서궐인 경희궁 일대가 궁궐에 속한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공간이다. 궁궐에 머물렀던 사람들로는 국왕과 왕비, 세자와 가족들, 어린 왕자들, 많은 후궁들, 대비를 비롯한 선왕대의 후궁 등과 이들에 딸린 많은 궁녀와 왕을 호위하는 내시 등을 들 수 있으며, 대부분 이들은 창경궁에 거처했다고 할 수 있다. 대비의 거처로 주로 쓰였던 양화당 아래쪽에는 이 ..

궁궐_종묘 2012.09.16

[중앙박물관 조선실] 영조의 탕평정치와 정조대 문화의 진흥

18세기에서 19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휴유증을 극복하고 새로운 변화를 가져온 시기였다. 병자호란 이래로 송시열을 중심으로 계속되어온 당쟁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지만, 영조라는 사람의 개인적인 역량과 권위로 조금이나마 제압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또한 중국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중심으로 안정화된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영.정조대를 대표하는 정책으로는 탕평책으로 대변되는 당쟁의 극복과 왕권의 확립, 균역법으로 대표되는 조세개혁을 통한 경제 안정화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정조대는 규장각을 중심으로 활성화된 학문장려, 중국 문물됩과 함께 크게 융성한 실학, 대량 출판을 통한 지식의 확산 등이 있다. 우리나라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큰 변화를 겪었던 시기였지만, 당시 영국과 프랑스를 중..

중앙박물관 2011.02.04

화성 융건릉, 융릉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합장릉

화성 융릉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와 그의 비 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원래 양주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 곳 화산으로 옮기면서 영우원으로 했다가, 장조로 추존하면서 융릉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곳 화성 융릉,건릉이 있게 했으며, 수원 화성을 건축하게 된 동기중이 하나가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이다. 정조의 정성이 깊었던지 서쪽편 정조대왕의 건릉보다도 사도세자의 융릉이 더 웅장해 보인다. 사도세자의 능인 수원(화성) 화산의 융릉. 원래 조성시에는 세자의 능으로 조성했지만, 왕릉 보다도 잘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러 방향에서 본 사도세자의 융릉 제사를 올리는 공간이 융릉 정자각 측면에서 본 정자각 정자각 뒷쪽. 정자각 월대를 오르는 계단 정자각 월대 위 제사를 올리는 공간 융릉 정자각 추녀마루..

화성 융건릉 왕릉 들어가는 숲속길과 입구 재실

화성 화산에 위치한 융건릉은 사도세자가 묻힌 융릉과 정조대왕이 묻힌 건릉을 통칭하여 융건릉이라 부른다. 현재는 행정구역상 화성에 속하지만 통칭은 수원 화산이라고 부르며, 근처에 있는 용주사와 더불어 왕릉 영역을 이루고 있다. 화산은 수원 남쪽의 넓은 벌판에 자리잡고 있으며 왕릉을 숲을 아주 정성스럽게 이백년 정도로 가꾸어 왔기때문 숲이 상당히 우거지고 아름답다. 융건릉 입구에서 건릉과 융릉을 한바퀴 돌고 나면, 숲의 기운을 듬뿍받고 나올 수 있다. 융건릉 입구에서 조금 걸어서 들어가면 동쪽 융릉방향과 서쪽 건릉방향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을 만난다. 길 양쪽으로 송림이 우거져 있다. 갈림길에서 서쪽편 건릉으로 들어가는 길. 중간에 숲은 송림에서 다른 활엽수로 바뀐다. 숲길을 걸어서 조금더 들어가면 정조대왕의 ..

함춘원지, 서울대학교 병원 안에 있는 조선시대 궁궐 정원

함춘원은 조선시대 궁궐 정원이었던 곳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병원인 대한의원을 세움으로써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변한 곳이다. 지금은 함춘원 유적은 사도세자의 사당이 있었던 경모궁 건물터와 출입문인 함춘문만이 남아 있어 이 곳이 함춘원 터였음을 말해주고 있다. 넓은 궁궐 정원터였던 이 곳 함춘원지에 남아 있는 유일한 흔적인 함춘문. 삼문의 형태로된 사당 출입문으로 경모궁 신문이 정식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본관 건물 뒷쪽편에 위치한 함춘원지. 대학건물들로 둘러져 있다.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경모궁 신문. 삼문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측면에서 본 경모궁 신문(함춘문) 사도세자 사당인 경모궁 건물터. 사도세자 위패가 종묘로 옮겨감에 따라 관리가 소흘해져서 건물이..

궁궐_종묘 2010.09.06

화성 용주사, 정조대왕과 사도세자 융건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

화성 화산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을 지키는 원찰로 사실상 정조대왕이 창건한 사찰이다. 여주 신륵사, 서울 강남의 봉은사와 함께 왕릉을 지키는 대표적인 원찰이다. 원래부터 사찰이 있었던 자리인것으로 보이지만 현재 사찰의 건물 대부분은 정조대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재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찰의 가람배치도 일반 사찰과는 유교식 사당의 양식이 혼합되어 있으며, 출입문으로 왕릉이나 사당처럼 삼문의 형식을 하고 있으며, 삼문에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던 호성전까지는 박돌을 깔아 놓은 신도가 조성되어 있다. 당대의 화가인 김홍도를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 사찰의 건축에 관련되어 있으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국보급 문화재인 용주사 범종이 이 곳에 있다. 특히 이 곳에서 부..

전국 사찰 2010.06.05

화성 용주사 호성전, 사도세자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

호성전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으로 용주사 창건의 동기가 되는 건물이다. 지금 이 곳에는 사도세자, 혜경궁홍씨, 정조대왕, 효의왕후 김씨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일 여섯번의 재를 오렸다고 한다. 용주사 경내의 박석이 깔린 길, 삼문, 홍살문 등 궁궐식 예법이 들어간 건물들이 용주사에 있는 이유가 호성전에서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며, 당시 정조대왕이 이 곳 용주사로 여러번 행차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한국전쟁때 불타버린 것을 새로 중건하였다고 한다.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전각인 호성전. 그 앞에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보이는 부모은증경탑이 있다. 호성전은 앞면3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로 소박하고 검소해 보인다. 부모은중경탑. 취지는 좋으나 예술적인 면이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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