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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사박물관 19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조국으로 가는길,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고난을 같이 했던 김가진 일가

1922년 김가진이 서거한 이후에도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가 임시정부에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이어온다. 며느리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살림꾼으로, 여성단체 주요 멤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아들 김의한은 아들 김의한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적을 두고 광복국 기관지 '광복'편찬을 책임지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 가족은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본의 압박을 받아 상하이를 떠나 자싱으로 떠난 이후 중.일전쟁으로 소주, 항주, 광주를 거쳐 중칭으로 이동하는 힘든 피난생활을 임정인사들과 같이 했다. 다른 중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귀국하였으나, 큰 환대를 받지 못한 쓸쓸한 귀국이었다. 또한 한국전쟁때 아들 김의한은 북한으로 납북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

지역박물관 2013.12.06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난 사람들, 김가진 일가

김가진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 70세가 넘은 노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김의한과 함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상해 교민사회와 임시정부에 있어서 김가진은 구한말 고위관료를 지내고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인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었으며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김가진은 국내에서부터 대동단 총재로서 활동하였으며, 대동단은 김가진의 망명에 이어 의친왕을 망명시키려다 실패하고 국내조직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대동단 또한 상해로 본부를 옮겨 활동하게 된다. 이후에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존재는 국내 대동단이 와해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 동력이 되었다. 상해..

지역박물관 2013.12.05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조국으로 가는길, 구한말 통상전문 관료로서의 김가진

김가진은 권문세가 서얼 출신으로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대에 관직에 출사한다. 학문적인 측면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뛰어난 자질과 역랑을 가졌던 김가진은 젊은 시절에는 당시 경제적 기반을 갖추면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의 집인 백운당은 자연스럽게 당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무대가 되었다. 30대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처음 관직에 진출한 이후 김가진은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지만 두각을 보였던 부분은 인천항에서 통상업무를 맏은 이래로 외교와 통상분야였으며, 이후 주일공사를 역임하는 등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높았던 인물이다. 이런 경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비롯하여 대한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

지역박물관 2013.12.03

[서울박물관 특별전] 조국으로 가는길, 구한말 관료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동농 김가진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2013년 "조국으로 가는 길 - 한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구한말 고위관료 출신으로 한일합방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 가족이 살아왔던 길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번에 소개된 김가진(1846~1922)은 권문세가였던 북촌 안동김씨 일가로 예조판서를 지낸 김응균의 아들이다. 서얼출신이었던 김가진는 비교적 늦게 관료로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규장각참서관에서 시작하여, 청직이라 할 수 있는 규장각, 사헌부, 홍문관 등에서 초기에는 관직생활을 했으며, 개항 이후에는 외교업무를 했다. 동학혁명 이후 갑오경장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나, 실질적으로 실패한 이후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당시 대부분의 고위관료와 마찬가지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

지역박물관 2013.12.02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풍속과 놀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농업사회였던 조선 사회에서도 세시풍속과 놀이, 살아가는 모습 등에서 농업에 종사했던 지방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수도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대로 권문세가였거나,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관직에 진출하여 서울에 살았던 관료들, 중앙부처에 속한 전문직 관료 또는 하급관리 등의 중인 계층과 군인들, 상업에 종사했던 상인들, 이들의 삶을 지원하면서 살았던 하층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농업사회에서 세시풍속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도시민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활력을 주는 의미가 강했으며, 농민들과는 달리 농사를 준비하거나 농사를 짓기위한 필요한 공동체로서의 의미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사람들의 세시 풍속은 대부분 계..

지역박물관 2013.11.26

[서울역사박물관] 도성밖 성저십리와 한강나루

조선시대 성저십리는 도성밖 10리까지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대체로 북으로는 북한산, 남으로는 한강, 동으로는 중랑천, 서로는 홍제천까지 지역을 일컫는다. 이들 지역은 도성안과 함께 오늘날 서울시청에 해당하는 한성부 관할 지역이었으며, 지금의 그린벨트처럼 많은 규제를 받던 지역이었다. 성서십리 지역은 성묘, 벌목 등이 금지되었으며, 농사를 짓거나 주민이 거주하는데에서 많은 규제를 받았기때문에 조선초기에는 인구가 상당히 적었다고 한다. 조선중기 이후 지방에서 서울로 인구가 유입되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상업에 종사하거나 날품을 파는 빈민을 중심으로 이들 지역에 사는 인구가 증가하여 조선후기에는 전체 인구의 50% 이상이 성밖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한양도성 밖에는 숭례문(남대문), 돈의문(서대문), 흥인문(동대문..

지역박물관 2013.11.22

[서울역사박물관] 전문직의 마을 중촌과 선비의 마을 남촌

조선의 수도 한양은 인구 20~30여만명이 살았던 당대의 대도시였다. 한양에는 국왕을 중심으로 양반관료, 의관.역관 등의 중인계층, 관청의 서리, 훈련도감에 속한 군인들, 운종가에서 상업에 종사하던 상인에서 최하층민까지 다양한 신분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지방조직으로 한성부가 설치되었으며, 하부조직으로 남부, 북부, 서부, 동부, 북부의 5부로 나뉘었다. 도성의 북쪽 북악산과 서쪽 인왕산을 등지고 있는 궁궐 주변에는 권문세가를 비롯한 훈구세력과 조선중기 이후 주도층으로 등장한 사림세력들이 주로 살았으며,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중부에는 의관.역관 등 전문직에 종사한 중인계층과 운종가에서 상업에 종사한 상인계층들이 주로 살았으며, 남산 아래에는 남촌에는 일부권문세가들도 살기는..

지역박물관 2013.11.15

[서울역사박물관] 운종가, 조선제일의 번화가

시전은 일제강점기 이전 성읍이나 도시에 있었던 상설점포를 말하는데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이래로 수도를 건설할 때 설치하여 국가에서 감독.관리하던 공설시장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태조 이성계가 1394년 한양을 새로 건설하면서 역사이래 중국의 국가 경영의 기본이 되었던 『주례』의 「고공기」를 참조하여 궁궐과 종묘.사직을 건설하고, 도시를 구성하는 한양도성을 쌓았으며, 도시내에는 행정.사법기능을 갖는 관청을 궁궐 정면 대로인 육조거리에 짓고, 국가경제의 중추라 할 수 있는 공설시장인 시전은 동.서를 연결하는 대로에 지었다. 운종가의 범위는 처음에는 육조거리에서 육의전이 있던 종각부근까지였으나 상업이 발달하면서 동쪽으로 계속 확장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농업을 중시하는 유교사회로 상업을 중시하지 않았으..

지역박물관 2013.11.14

[서울역사박물관] 피맛길이 있던 청진동 600년, 서울의 재발견

서울 청진동은 조선시대 육의전을 비롯하여 국가에서 종각주변에 조성한 공식적인 상업지구였던 운종가에서 광화문 육조거리 뒷편에 위치하고 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고관대작들이 운종가 대로를 말을 타고 지나갈때 행차에 인사를 하기 싫었던 서민들이 지나다니던 골목길인 피맛길이 남아 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이곳에는 국가에 공물을 공급하면서 도성내 독점적인 거래를 하던 시전들 중 돗자리를 팔던 인석전, 쌀과 잡곡을 팔던 상미전과 잡곡전 등이 들어서 있었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이후 시전이 없어지면서 서민들이 주로 찾는 청진동 해장국을 비롯하여 작은 골목길 음식점들이 즐비하던 서울의 대표적인 맛집 골목길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 도심재개발사업으로 피맛골에 있었던 크고 작은 맛집들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상업..

지역박물관 2013.11.08

[서울역사박물관] 육조거리, 조선시대 의정부와 육조 관청들이 들어서 있었던 광화문 광장 대로

육조거리는 조선시대 의정부와 6조를 비롯한 주요 관청들이 들어서 있던 거리로 법궁인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현재의 광화문 4거리까지 조성된 대로를 말한다. 국왕이 거처하는 궁궐과 더불어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중요 관청들로 국가를 상징하는 거리라 할 수 있다. 지금도 넓은 대로 좌.우에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하여 세종문화회관, 주한미국대사관, KT본사 건물 등이 들어서 있다. 조선시대 육조거리 동쪽편에는 국가 최고 의사결정기구라 할 수 있는 의정부를 비롯하여 이조, 서울시청이라 할 수 있는 한성부, 재경부라 할 수 있는 호조, 국가원로들을 위한 공간인 기로소가 들어서 있고, 서쪽편에는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예조를 중심으로 감사원격인 사헌부, 주요 정책을 집행하는 병조, 형조, 공조를 비롯한 크고 ..

지역박물관 2013.11.01

[서울역사박물관] 수도 한양을 구성하는 궁궐을 비롯한 관아와 수도를 관리하는 한성부

서울은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나라의 수도로 1394년 건설된 철저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당시 새로운 수도로 장단 불일사, 도라산, 계룡산 일대, 서울 무악(안산) 기슭 등 여러곳이 추천되었지만 북한산을 외산으로 하여 백악, 인왕, 타락, 목멱산으로 둘러싸여 분지를 이루고 있었던 오늘날의 서울 도심이 새로운 수도로 선정되었다. 수도 건설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중국 주나라의 제도를 기록한 『주례』의 「고공기」를 기본으로 하여, 풍수리리사상과 군사,경제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건설되었다. 조선의 수도 한양은 성곽으로 둘러싸인 오늘날 서울 구도심과 성저십리라 하여 도성밖 10까지를 포함하는 영역을 말한다. 수도는 주산이라 할 수 있는 백악산(북악산)을 중심으로 법궁인 경복궁이 건설되었고, 동쪽..

지역박물관 2013.10.28

[서울역사박물관] 수도 한양에 살던 사람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수도로 정한 한양은 중국 주나라 제도를 기록한 를 참조하여 건설된 철저한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 주산이라 할 수 있는 백악산 아래 궁궐인 경복궁을 짓고 그 동쪽편에 종묘, 서쪽편에 사직을 지었다.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성도시였던 한양은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청계천을 중심으로 북쪽으로는 궁궐, 관아, 권문세가들의 주거지가 형성되었으며, 남쪽으로는 일반인들이 터를 잡고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수도 한양에 거주했던 사람으로는 지배계층이라 할 수 있는 국왕을 중심으로 한 양반관로, 의관.역관 등 전문직 중인과 관청의 서리, 훈련도감 등에 소속된 군인들이 주로 살았으며, 이들은 조선이라는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수적인 인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자나 ..

지역박물관 2013.10.24

[서울역사박물관] 조선시대 가구와 생활 용품

서울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유물 중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했던 가구와 생활용품들이다. 박물관에 전시하는 유물로서는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없는 것들로 단순히 당시 사람들이 사용했던 가구들이나 생활용 등을 통해서 당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는 것 같다. 가구로는 조선시대 양반 남자들의 생활공간이었던 사랑방에 비치되었던 책상이나 문방구, 식탁이라고 할 수 있는 소반, 백자나 분청사기, 유기 등으로 만들어졌던 그릇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골동품이나 유물로서 큰 가치가 있는 것들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생활용품으로 전국의 고택 등을 방문하게 되면 전시되어 있는 옛 생활용품과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사랑방 가구, 사랑방은 남자 주인이 늘 거처하는 ..

지역박물관 2011.11.30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사람 일생을 보여주는 유물

조선시대 서울 사람들의 일상생활은 왕도다운 품격을 갖추고 있었다. 서울사람들의 의식주 생활은 다른 지역에 살았던 사람보다 고급스러웠다. 그들의 생활은 대도시답게 다채롭고 번잡하였으며, 지방과는 다른 품격을 가지고 있었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서울사람의 일생을 보여주는 생활과 관련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풍속화의 일종인 평생도이다. 평생도는 주로 잔치 등에서 사용했던 병풍에 그려졌던 그림으로 당시 사람들의 소방을 그려 놓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로 과거에 급제에 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환 관직을 거치는 삶을 살아간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는 유물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전시된 유물들은 그리 다양편은 아니다. 평생도. 사람의 일생 중에서 주요 장면..

지역박물관 2011.11.29

[서울역사박물관] 옛문서로 본 조선의 수도 한양

서울은 1394년 조선이 수도로 정한 이래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의 수도로 역할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서울은 이름은 한성부로 실제로 그 영은 현재의 종로구와 중구를 포함한 영역보다 좁은 범위로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한양도성과 도성 바깥 일부를 관할하기도 했지만 원칙적으로 도성안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한성부는 정2품인 한성판윤이 최고 책임자 였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오부와 방, 계.동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군 10만명 내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 도성은 태조대에 처음 성곽을 쌓고 종묘와 사직, 궁궐 등을 짓기 시작하여 태종대에 궁궐과 관아, 가로와 시전, 그리고 수많은 주택들이 제각각 자리를 잡아 수도로서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한양도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쳐면서 도시의 상당부분이 ..

지역박물관 2011.11.27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신분을 뛰어넘고자 했던 중인들, 웃대에서 청계천으로

조선시대 중인은 경국대전에 정확하게 그 신분에 대해서 명시한 바가 없으며, '경국대전'에 정의된 '한품사용조'라는 규정에 의하여 그 적용범위가 기술직을 비롯한 하급관리에 관례적으로 적용되었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한품사용자'란 2품이상을 지낸 자의 서얼들을 기술직이나 하급직으로 진출하게 해주는 제도로 과거진출에 제한이 있었던 당시 고위직의 서얼들에게 특혜를 주는 조항이었으나, 조선중기 인조대에 의관이 세습직으로 변하면서 관례적으로 계층화되면서 일반 기술직에도 일괄적으로 이 조항이 적용되면서 이들은 관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홍문관 등 삼사관직에 오를 수 없도록 왜곡하여 운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영.정조대 이후에 이들은 다양한 형태의 청원 등을 통해 신분을 한계를 뛰어 넘고자 했다. 이들은 구한..

지역박물관 2011.09.25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조선시대 중인계층, 전의감 의관과 사역원 역관

조선시대 중인은 양반 사재부와 일반 평민인 양인의 중간 신분에 속하는 계급층이나 실제로 경국대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법전 등에는 중인신분에 대한 특별한 규정이 없으며, 조선의 법제도에 따르면 양인이면 누구나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기때문에 법률적으로 속박되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서을출신은 관직진출 등에서 제한이 있었기때문에 이들을 일반 양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중인이라는 관습적인 명칭이 생긴것으로 보이며, 서울 인왕산 자락 웃대에 살던 관아의 서리, 역관, 의관, 음양관, 화원 등 기술직에 종사했던 하급관리들과 지방의 향리.아전 등 중간계층을 통칭해서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사회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장자상속에 따른 토지겸병에 따른 계급의 고착화에 따라서 이들 중간계층..

지역박물관 2011.09.20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웃대의 시사, 중인들의 시모임

조선후기 중인들이 모여살았던 웃대라 불렸던 인왕산 자락 아래 마을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양반들의 전유물이었던 한시를 향유하는 모임인 시사를 들 수 있다. 이들 시모임은 17세중반 삼청동 일대 의관,역관 등이 중심이 된 6인의 시모임에서 시작되어 관청 서리 등으로 확대되었다. 이들은 중인이지만 통역을 하던 역관이나 의관, 중앙부처의 서리들로 오늘날의 견해로 볼 때도 의사,중앙부처 공무원, 외교관 등 상당히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요하는 전문직에 속하는 직업군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경제적으로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이며, 시사 이외에도 이들의 계모임이 상당히 활성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인들의 시모임은 18세기 옥계시사를 통해 절정을 맞았는데 이들은 공..

지역박물관 2011.09.19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웃대 사람들, 조선시대 중인들이 살았던 인왕산 아래 마을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조선시대 한양의 중인들이 살았던 모습을 '웃대사람들'이라는 주제로 특별전시회를 했다. 웃대라 인왕산 기슭 아래 지금의 종로구 사직동.통인동.옥인등의 지역으로 경복궁 서쪽에서 인왕산 아래까지의 지역을 말한다. 이 지역은 북한산과 인왕산을 배경으로 한 경치가 좋은 곳으로 정선의 대표작 '인왕재색도'에 나타난 지역을 말하며, 실제로 겸재 정선은 이외에도 이지역 풍경이 담긴 작품을 여러점 남겨놓고 있다. 중인들이 살았던 웃대는 인왕산에서 내려오는 옥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지역의 실제 면적은 여의도의 절반정도로 조선시대 이지역에는 궁궐과 육조를 비롯한 관아와 가까웠기때문에 관아의 하급관리인 서리나, 궁궐의 신부름 등 잡일을 보던 별감 등이 주로 많이 살았다. 이 들 중인들은 조선후..

지역박물관 2011.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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