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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탑 7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보물228호)과 석종비(보물229호)

신륵사는 고려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선사가 마지막으로 입적하면 그의 제자들이 크게 중창한 사찰로 세종대왕 영릉이 여주로 옮겨지면서 원찰로 크게 번창한 사찰이다.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주지로 있으면서 왕실과 관련이 깊었던 대표적인 원찰인 양주 회암사와 관련이 깊은 사찰이기도 하다. 현재의 신륵사는 조선중기 성종대에 크게 중창될 때의 모습이 여러차례 중건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려말.조선초를 대표하는 승려인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의 영정이 모셔진 조사당 뒷편 남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는 신륵사를 크게 중창시킨 나옹선사의 사리를 봉안한 승탑이 있다. 나옹선사의 승탑은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정형화된 목조 건물 형태를 하고 있는 승탑과는 달리 인도의 승탑인 스투파와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다. ..

강릉 굴산사지 승탑 (보물 85호), 굴산사를 창건한 통일신라 범일국사의 승탑

강릉시 구정면에 있는 굴산사 옛절터에 남아 있는 보물85호로 지정된 굴산사지 승탑이다. 이 승탑은 굴산사를 세운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탑으로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팔각형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가운데 받침돌에 악기를 연주하는 조각상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며, 윗받침돌은 연꽃모양을 새겨놓고 있다. 사리를 모시는 몸돌은 상대적을 작고 낮게 만들어졌으며 지붕돌은 상대적으로 크게 만들어 균형미가 떨어지는 편이다. 이 승탑은 통일신라 진성여왕대에 활동한 범일국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이라고 하는데 전체적인 구조나 조각수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선종 9산 중 하나로 강릉지역을 대표하는 큰 절이었던 굴산사가 있던 곳이다. 굴산사는 ..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보물 326호)

국립 중앙박물관 외부에 전시된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은 통일신라시대 후기의 사리탑이지만 다양한 후대의 양식이 보이는 것으로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전체적으로 눈에 띄는 조형미를 갖추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탑신에는 특별한 조각상이 없고 머리돌 끝에 있는 꽃봉우리 장식이 인상적이다. 이 승탑은 통일신라 후기 승려이 진경대사의 사리탑으로 창원 봉림사 절터에 있던 것을 1919년에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현재는 중앙박무관으로 옮겨졌다. 이 승탑은 전형적인 8각형 부도로 장식이 많지 않고 조각 수법 또한 빼어나다지는 않다. 기단부는 8각형의 바닥돌위에 안상이 새겨진 아래받침돌과 북모양의 가운데돌, 연꽃모양의 윗받침돌로 이루어져 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몸돌은 가늘고 날렵한데 비해서 지..

양양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보물 439호),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 승탑으로 추정되는 부도

설악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진전사지는 우리나라에 선종을 들여온 도의선사가 창건한 절로이다. 도의선사는 당나라에서 유학한 후 우리나라에 선종을 소개한 분으로 염거화상과 보조국사로 이어져온 선종계열로 현재 학국불교의 주류인 조계종의 원류가 되는 분이라 할 수 있다. 진전사는 구룡령 아래에 있는 선림원과 함께 대표적인 선종의 수행도량이라고 할 수 있는 사찰로 지금은 그 절터에 국보 122호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부도만 남아 있다.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은 진전사 옛절터 중에서 안쪽편에 있는 절터에 위치하고 있다. 이 부도의 탑신부는 8각형으로 전형적인 승탑인 부도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기단부는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2층으로 만들어진 기단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기단부에는 각면마다 중앙과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두고 ..

양양 선림원지 승탑(보물 447호)

양양 선림원지는 양양에서 백두대간을 넘어서 서울로 가는 중요한 교통로인 구룡령을 넘어가기 직전에 위치한 절터이다. 선림원은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가 창건한 사찰로 부근의 진전사와 함께 우리나라에 처음 선종을 도입한 사찰 중의 하나로 보인다. 선림원으니 10세기경에 산사태로 매몰되었던 것을 1960년대에 발굴 복원한 것이라 한다. 선림원지 부도는 일제강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1965년에 각 부재를 수습하여 복원한 것으로 지금은 기단부만 남아 있다. 원 위치는 뒷산 중턱의 50m 쯤 올라간 곳이었다고 한다. 이 부도의 네모난 지대와 8각의 아래받침돌은 같은 돌로 2매로 구성되어 있다. 아래받침돌 8각의 각 면에는 각기 안상이 1구씩이 있으며, 안상안에 교대로 사자 1쌍씩 4쌍이 새겨져 있다. 아래받..

[여주 고달사지] 고달사 원종대사혜진탑

여주 고달사지는 남한강 이북지역에 있는 오래된 절터로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 있었던 자리이다. 삼국시대 이래 이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고려초기에 크게 번창했던 사찰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사찰이 없어지고 되었지고 석조유물만이 남아 있게 되었다. 고달사지를 비롯하여 역사이래로 한반도에서 중요한 내륙수운이었던 남한강변에는 미륵사지, 청룡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 고달사지 등 규모가 상당히 큰 절터가 있는데 대부분 고려말 이후에 사찰은 없어지고 절터만이 남아 있고, 지금은 신륵사를 제외하고는 규모가 있는 사찰이 거의 없다. 그냥 추론해 보면 고려시대에는 사찰들이 많은 토지를 가지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등 민심에 반하는 일을 많이 했었는데 고려말과 조선초에 이에 대한 개혁이 일어나면서 산중에 있었던 사찰과는..

[실크로드 둔황] 막고굴(둔황석굴) 입구 사막에 세워진 승탑들

둔황은 서역의 출발점이 되는 도시로 한나라 때 세워진 만리장성이 남아 있으며, 당나라까지는 서역으로 출발하는 출발점으로 당나라 현장법사나 신라의 혜초스님깥이 인도로 순례를 떠났던 많은 승려들이 출발지로 삼았던 곳으로 불교전파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도시이다. 둔황 시내에서 자동차로 사막길을 약 1시간쯤 달려오면 사막 한 가운데에 메마른 강이 흘러가고 강 너머로 높지않은 바위산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이 곳이 그 유명환 둔황 석굴(막고룰)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천불동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바위를 뚫어 만든 수많은 석굴들을 이 곳에서 볼 수 있게 된다. 둔황 석굴(막고굴) 입구에 들어서면,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안내를 따라서 석굴을 감상할 수 있는데 한국어를 할..

중국(China) 201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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