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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고분 24

[중앙박물관 특별전] 금관총과 이사지왕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2014년 여름 '금관총과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는 제목으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는 2013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리자루칼을 보존처리하는 과정에서 '이사지왕尒斯智王'이라 적힌 글자를 확인하면서 금관총 발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는 금관총에서 발견된 유물과 함께 당사 일본인들이 작성한 발굴보고서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일제강점기 유물 조사와 발굴과정을 살펴볼 수 있게 한다. 금관총은 경주지역에 산재해 있는 많은 신라 고분 중에서 금관이 처음으로 발견된 고분이다. 당시 일본인 학자들은 신라고분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해 유물들을 돌무지덧널무덤에서 유물들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이곳에서 우연히 금관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을 발견하면서 신라고..

중앙박물관 2014.10.24

경주 배리삼릉(사적219호)과 경애왕릉(사적222호), 신라 마지막 박씨 왕들의 능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리삼릉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8대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700여년의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외형의 봉분을 하고 있어서 그 신빙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곳이다. 가운데 신덕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은 2차례 도굴을 당하여 내부 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 무덤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을 하고 있으며, 벽면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어서 벽화가 없는 경주의 신라고분에서 벽화의 흔적이 처음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경주 나정 부근의 경주남산 서쪽편 기슭 아래에는 일성왕릉, 지..

경주 지마왕릉 (사적 221호), 신라 6대 지마왕의 능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 이후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돌아가며 계승하였으며, 내물왕대 이후 김씨의 왕위세습이 이어졌으며, 마지막 왕인 경순왕 이전인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이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왕들 중 김씨와 석씨 왕들은 경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반면에 박씨로서 왕위를 계승한 왕들은 대부분 초기의 왕들은 박혁거세 왕릉이 있는 경주 오릉에, 그 이후 6대 지마왕 이후 일성왕, 아달라왕과 통일신라말 3명의 왕들의 무덤은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남산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포석정이 신라 왕실의 연회장소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신라를 건국한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을 비롯하여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신라 지배계층 중 박씨들에게 의미있는 장소로 이와 관련이 있..

경주 일성왕릉 (사적 173호), 남산 신성아래에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무덤

경주시 탑동 남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능이다. 일성왕릉은 신라초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그 존재는 조선후기인 영조 6년(1730) 이후라고 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초기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던 왕들의 능인 경주 오릉과 비슷한 성격으로 정확한 조성내력이 알려지지는 않았고 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를 지냈다는 경애왕릉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성왕은 신라 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북방의 말갈족과 충돌이 있었으며, 농업을 권장하고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일성왕릉이 위치한 곳은 경주오릉에서 남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라 6촌 중 돌산고허촌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 신라가 멸망할 ..

경주 김유신장군묘(사적 21호),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장군의 무덤과 무덤둘레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경주 도심에서 형산강 서쪽편에 위치한 송화산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무덤이다. 신라 귀족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왕릉에 준하는 규모의 큰 무덤으로 지름 30m 크기로 둥근 형태의 봉분을 하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둘레석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고 있는데 세련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 앞에는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서구의 제단과 비슷한 형태의 상석이 놓여져 있다. 무덤의 전체적인 형태는 김유신장군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태종무열왕릉과 달리 성덕왕 이후 왕릉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후대에 보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덤의 봉분은 후대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였던 왕릉과 비슷하지만,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상들은 세워져 ..

경주 용강동 고분 (사적 328호), 통일신라시대 복식과 당나라와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통일신라 귀족의 무덤

경주 용강동고분은 경주시 용강동 밭 가운데에 남아 있던 고분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지금은 경주 신도심 중앙, 경주시청 북쪽편으로 아파트가 들어선 도심 한가운데 공원처럼 남아 있는 신라의 고분이다. 지금은 둘레석이 있는 통일신라시대 고분처럼 복원해 놓고 있지만, 원래는 밭 한가운데 작은 봉분만 남아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는 통일신라시대 무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을 돌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으로 오랜 기간동안 도굴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라고 한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어 여러차례 시신을 묻을 수 있는 형태로 가족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무덤의 형태는 지방에서 먼저 사용하고, 수도의 경주로 확산되어 통일신라시대 중앙 귀족들의 무덤 형태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신라 탈해왕릉 (사적 174호), 월성 석씨 시조인 탈해왕을 모신 왕릉과 사당인 숭신전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한 사적 174호로 지정된 신라 4대 탈해왕을 모신 탈해왕릉이다. 탈해왕은 월성 석씨의 시조로 설화에 의하면 석탈해는 일본 북쪽지방에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되면서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왕을 지낸 성씨로는 박씨, 김씨, 석씨가 있으며, 신라에서는 8명의 석씨가 왕으로 재위하였는데 그 기간은 합쳐서 171년 정도였다고 한다. 월성석씨는 그 유래가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후손이 번창하지 않아 현재 4,500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탈해왕릉은 경주오릉과 마찬가지로 초기의 왕릉으로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아무런 시설이 없이 봉분만 남아 있다. 봉분 앞에는 일제강점기에 경주 시내에 지어졌던 숭신전을 ..

신라 헌덕왕릉(사적 29호), 경주 북천(알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왕릉

헌덕왕은 신라 41대왕(재위 809~826년)으로 난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헌덕왕은 원성왕의 손자로 39대 소성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의 안정기가 지나고 지배계층간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던 시기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안정화하고,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였다. 헌덕왕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웅주도독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동강 지역에 장성을 쌓고 국방을 강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헌덕왕 자신 또한 조카인 반란을 통해 조카를 죽이고 즉위하였던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반기 귀족세력간의 갈등을 이끌었던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헌덕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경주시 동천동 지역은 경주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알천) 북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북천..

경주 황오동고분군, 발굴이 진행중인 대릉원 동쪽편 쪽샘지구 고분군

경주 황오동 고분군은 대릉원 동쪽편 주택가에 흩어져 있는 신라 귀족들의 묘역으로 쪽샘지구라 불린다. 1960년대에 주택과 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고분의 훼손이 심해져서 2002년부터 국가에서 주택를 비롯한 사유지들을 매입하고 200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적석목관분 등 여러 형태의 고분 150여기 확인되고 있으며, 수천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낡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던 경주 쪽샘지구는 큰길 주변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가옥들이 지금은 철거되어 약간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곳에서는 예전부터 관리되어 왔던 큰 도로변 모통이와 경주빵으로 유명한 황남빵집 맞은편에 위치한 고분이 제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주택가 안쪽에 위치했던 고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문왕릉(사적 181호)과 통일신라말 혼란기를 보낸 효공왕릉(사적 183호)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김정명)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이 귀족들을 제압하고 통일이후 사회안정의 기반을 마련한 왕이다. 또한 최고교육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를 증진하는 정책을 펼쳐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대체로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에 비유되는 왕으로 귀족세력을 탄압하고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여러차례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대에는 9주와 주.군.현을 정비하는 등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관리에게 지급되던 녹읍폐지하여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켰다. 신문왕릉은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끝에 위..

충주 누암리 고분군 (사적 463호),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하고자 이주시킨 귀족들의 무덤

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일대에 남아 있는 누암리고분군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일대를 장악하면서 이 지역을 경영하고자 했던 의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적지로서 이 일대에는 약 230여기의 고분이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던 지역으로 누암리고분군들의 주인은 진흥왕이 이 지역으로 이주시킨 신라귀족들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앞쪽에 위치한 고분은 그 규모나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진골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암리고분군이 있는 가금면 일대에는 고구려가 쌓은 산성인 장미산성을 비롯하여 충주 고구려비 (국보205호), 충추 탑평리 칠층석탑(국보6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탄금대 등의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현재 사적 463호로 지정된 누암리고분군..

경주 노동리 고분군, 신라 최대의 고분인 봉황대와 식리총,금령총

경주 노동리고분군은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 북서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마립간시기의 신라 왕과 귀족들을 무덤인 대릉원의 끝단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원래는 여러지역으로 나뉘어 관리되어 노동리고분군이라고 했지만, 대릉원 주변 고분들은 시기적, 지리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대릉원의 일부로 분류하고 있다. 이 곳은 경주도심과 제일 가까이 있는 까닭에 가장 빠른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노동리고분군은 왕릉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봉황대와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현재 봉분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는 금령총과 식리총이 있다. 금령총은 봉황대 남쪽에 있는 작은 봉분으로 1924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발굴이 되었었는데 구조는 ..

경주 황남동고분군, 계림 서쪽편 이름없는 4기의 고분

경주 황남동고분군은 신라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는 내물왕에서 지증왕까지의 마립간시기에 조성된 신라 지배층의 무덤이 다수를 이르는 경주 대릉원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고분들은 금관을 비롯하여 화려한 금.은을 비롯한 금속세공품, 화려한 토기와 서역에서 수입한 유리잔 등 오늘날 남아 있는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들 상당수가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이 지역고분들은 월성북쪽 계림 앞에 있는 내물왕릉을 비롯하여,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왕릉, 화려한 유물들이 출토된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무덤들이 평야지대 들판에 분포하고 있다. 황오동의 쪽샘지구나 대릉원 입구처럼 왕릉 사이에 주택가가 형성된 곳도 있고, 고분 주변을 논밭으로 경작하던 곳도 있었다...

경주 구정동 방형분 (사적 27호),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특이한 신라 귀족층 무덤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사적 27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귀족층의 무덤이다. 불국사역 부근 경주에서 불국사로 들어가는 길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분은 봉분의 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방형분으로 불린다. 신라의 무덤 중에서는 유일한 사각형 무덤으로 그 형태는 고려전기에 무덤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지인 불국사를 들어가느 길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고분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지했을 수 있지만, 지나치는 길에 있어서 방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곳이다. 무덤내부는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봉분의 남쪽에 출입구가 있는 형태로 직사각형으로 축조된 굴식돌방무덤을 하고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장식구.은제띠고리.은제행엽 등이 있다고 하며 경주박물관에 ..

경주 괘릉 (사적 26호), 신라 왕릉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춘 원성왕의 능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괘릉은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원성왕은 혜공왕 16년에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786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고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대에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 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한다. 사적 26호로 지정된 괘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

경주 서악동 진흥왕릉 (사적 177호)과 진지.문성.헌안왕릉

경주 형산상 서쪽에 있는 선도산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 서악동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4기의 왕릉이다.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구분군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가 작고 잘 꾸미지 않은 왕릉으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등 신라를 크게 중흥시키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의 왕릉, 신라 쇠퇴기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제압한 문성왕과 그 뒤를 이은 헌안왕의 왕릉이 나란히 있다. 이 곳에는 4기의 왕릉 외외에도 약 10여기 정도 정비되지 않은 신라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들이 능선을 따라서 들어서 있다. 진흥왕 신라 역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왕으로 전국각지에 그가 다녀간 순수비를 남아 있는 왕이지만, 그가 남긴 업적..

경주 금척리 고분군(사적 43호), 경주 외곽에 소재한 삼국시대 신라 귀족의 무덤

사적 43호로 지정된 금척리고분군은 대구와 경주를 연결해주던 옛 국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에 소재한 삼국시대 신라의 고분군이다. 건천읍소재지에서 경주방향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경주 시내 평지에 위치한 고분들보도 그 규모가가 작아서 삼국시대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척리 고분군은 박혁거세왕이 병을 고칠 수 있는 하늘로 부터 받은 금척을 숨기면서 40여기의 봉분을 조성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금척리 고분군은 모두 50여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현재 봉분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32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 국도를 개설하면서 동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당시 훼손된 2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 뒤 몇차례 조사기 이루어지기는 했..

양산 신기리 고분군 (사적94호), 신라 지방귀족의 무덤

사적 94호로 지정된 양산 신기리 고분군은 북정리 고분군과 얕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는 신라의 고분군이다. 북정리 고분군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고, 출토 유물에 있어서 큰 차이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북정동 고분군과 구분하여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신기리 고분군으로 지정된 고분은 약 10여기가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래쪽에 있는 고분이 다른 고분에 비해서 이른 시기에 조성되었다고하며 무덤형식이 변모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고분군에서는 통모양의 토기와 독모양의 토기로 만든 합구식옹관이 발굴된 것이 특이하다고 한다. 무덤의 형태는 구덩이식돌방무덤과 앞트기식돌방무덤이 같이 발굴되고 있으며, 구덩이식 돌방무덤에서는 부산 복천동 고분에서 출토된 것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

양산 북정리 고분군(사적 93호), 5~6세기 신라의 고분

양산 북정리 고분군은 양산 도심에서 동북쪽 경부고속도로가 지나가는 길 옆 성황산에서 뻗어내린 능선에 위치하고 있는 5~6세기 신라의 고분이다. 능선 위쪽에는 대형 고분이, 아래쪽에는 소형고분이 20여기 분포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이른 시기인 192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부부총에 처음 발굴조사되었다. 1990년대에 동아대 박물관에 의해 재조사되었다고 한다. 부부총에서 출토된 금동관 등 다수의 유물들은 현재 일본 도쿄박물관에 전시되있으며, 동아대에 발굴한 금조총에서도 다수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김해지역과 가까운 이 고분은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던 시기의 지역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북정리 고분군이 있는 지역은 양산시가 도시화되어 가면서 주택가로 변하고 있는 지역으로 보이며, 실제로는 현재 ..

[중앙박물관 신라실] 신라와 실크로드, 서역과의 교류

서기 5~6세기 신라 고분으로 알려진 황남대총을 비롯하여 여러 고분에서는 서역과의 교류관계을 보여주는 여러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그 중 유리그릇이나 유리잔 등은 서아시아지역에서 전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유물들은 비단길 또는 바닷길로 신라에 전해졌다고 한다. 당시의 바닷길로는 인도와 아라비아 상인들과의 교역을 통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에는 여러차례 교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삼국시대의 바닷길 교류는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들 물품들은 신라가 서역과 직접 교류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지만, 불교의 전파와 함께 당시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가 활발했던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는 견해도 있다. 고구려는 국방.외교상 서역과 직접 교류할 필요도 있었고, 교류의 흔적도 많이 남아 있어서 서역국가와 직접 교..

중앙박물관 2011.05.1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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