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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 10

북한산성 행궁터, 산성에 마련한 국왕의 임시 거처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이다. 행궁은 전쟁 등 국가 비상상황시 왕이 잠시 피난할 때 머물거나 지방 순시나 휴양 등을 위해 지방관아에 설치한 임시 처소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행궁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조성한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등이 있고, 왕이 온천에서 휴양을 하기 위해 설치한 온양행궁과 이천행궁, 왕이 능묘에 참배를 하기 위한 화성행궁, 전주행궁 등이 있다. 행궁은 기본적으로 지방관아 기능을 유지하면서 국왕의 침소, 수행원을 숙소,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사무실용도 건물 등을 추가하여 일반적인 관아보다는 건물규모가 큰 편이다. 또한 강화행궁의 규장각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서나 서적 등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을 두기도 한다. 서울 북한산성내 동장대가 바라 보이는 상원봉 아래..

조선 관아 2013.05.08

광주 남한산성 행궁(사적480호), 비상시 국왕이 머물수 있는 행궁이자 광주부 관아 건물

남한산성에 있는 옛 광주부 관아 건물이자 국왕이 임시로 머물수 있는 행궁이 설치된 사적 480호로 지정된 남한산성 행궁이다. 이 행궁은 비상시 국왕이 임시 거처로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 역할을 하는 좌전과 우실을 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남한산성 행궁은 일제강점기 이후 없어졌다가 최근에 옛 기록을 참조하여 복원하였다. 행궁은 국왕의 거처로 정전과 편전에 해당하는 하궐과 국왕이 머무는 내전에 해당하는 상궐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쪽편에 광주부 관아 건물인 좌승당과 광주유수의 숙소라 할 수 있는 일장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국왕을 수행한 인원들이 머물 수 있는 많은 행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한강이남 일대를 다스렸던 큰 규모의 지방관청이 광주부 관아는 원래 남한산성 아래 하남시 일대에 있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국방상..

화성행궁, 정조대왕이 수원 화성에 설치한 대표적인 조선시대 별궁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건설한 신도시인 수원 화성의 서쪽편에 위치한 팔달산 정상 서장대 아래에서 동쪽인 창룡문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행궁이다. 행궁은 왕이 한양 도성의 궁궐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별궁으로 국가가 위급할 때나 각지에 흩어지 왕릉을 행차할 때 잠시 머무는 공간으로 수원 화성의 행궁은 화성에 위치한 사도세자의 묘인 융릉을 방문할 때 잠시 머무를 목적으로 수원 화성과 함께 건설되었다. 수도인 한양 부근에는 여러 곳의 행궁이 있었지만, 그 규모면에서 화성행궁은 궁궐에 준하는 규모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화성행궁은 연회를 베풀던 누각인 낙남헌을 제외하고는 없어졌던 것을 최근에 복원하여 옛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 있다. 수원화성은 지방관직 중에 높은 직급인 종2품의 화성유수가 다스리던 지역으로 화..

조선 관아 2010.05.24

[화성 행궁] 북군영, 집사청, 느티나무

수원 화성행궁 입구인 신풍루 오른편에 위치한 건물군으로 수원 화성 장용외영 친군위가 숙직하던 북군영과 행궁의 잡무를 맡아 보던 집사청이 자리잡고 있다. 화성행궁에는 기병으로 구성된 장용외영의 핵심 병력인 친군가 수직근무하던 북군영과 남군영이 신풍루 좌.우에 자리잡고 있으며 각기 100명씩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다. 장용외영 기병들이 숙직근무하던 북군영. 지휘부가 숙식하던 건물로 보이며, 주위에 행각들로 둘러져 있다. 북군영 행각들 북군영 '화성성역의궤'에는 관아건물로 분류해 놓았다. 장용외영의 친군위(화성의 기병)는 처음 좌.우열로 각 100명씩 입직숙위하는 곳이 남.북군영이다. (화성행궁 전체는 동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방위로 볼때 남쪼과 북쪽방향에 군영이 있다.) 1789년 군영 24칸을 지은데다..

조선 관아 2010.03.18

[화성 행궁] 정조대왕 어진을 모신 화령전 운한각

수원 화성행궁에서 정전격이 봉수당과 각종 연회나 행사가 열리던 화성행궁내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물인 낙남헌을 지나면 오래된 큰 목조 건물을 중심으로 한 건물군을 볼 수 있다. 이 곳 수원화성과 화성행궁을 건설한 정조대왕 어진을 모신 화령전으로 정조대왕의 아들인 순조가 세운 봉안각이다. 화령전은 정전인 운한각을 중심으로 재실인 풍화당,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 비상시 어진을 옮겨놓은 이안청, 내삼문, 외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령전은 1800년대에 세운 건물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으로 화령전 정전 내부에는 군복을 입고 있는 정조대왕의 어진이 있다. 조선후기에 세워진 대표적인 목조건물이라 한다. 화령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을 한 목조 건물로 앞에는 월대가 세워져 있는데, 궁궐 정전 건물과 비슷..

궁궐_종묘 2010.03.18

[화성행궁] 행궁건물 중 유일하게 남은 낙남헌, 득중정과 노래당

화성행궁의 많은 건물 중에서 원래 있었던 건물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이 낙남헌이라고 한다. 행궁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건물로 화성유수가 사용하는 건물과는 별개로 국왕 자신을 위해서 세운 건물로 보이면, 넓은 마루가 있고 앞 쪽에는 마당이 있어 행사하기 좋았던 장소로 보인다. 이 곳에서 정조의 화성 행차시 과거나 양로연 등 각종 행사가 펼쳐졌던 곳이다. 낙남헌 안쪽으로는 작은 정자건물로 지은 득중정이 있고, 건물 뒷쪽편에는 정조자신이 양위 후 쉴 곳으로 마련한 노래당이라는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이 세건물은 각각 독립된 이름이 있지만 건물들이 연결되어 있고, 화성행궁에서 정조대왕 자신을 위해서 마련한 건물로 보인다. 낙남헌은 앞면 5칸은 대형 건물로 누각의 성격을 같이 가지고 있는 건물로 보인다. 건..

조선 관아 2010.03.17

[화성행궁] 화성유수 거처인 복내당, 대장금 촬영지

화성행궁 복내당은 행궁의 내당이자 실제 이 곳을 집무를 보던 화성유수 가족이 거처하던 내아이다. 화성행궁의 성격자체가 국왕이 잠시머무르는 행궁의 성격과 수원화성을 책임지던 화성 유수의 집무공간이었던 까닭에 이 곳 화성행궁 복내당은 화성유속 가족들이 거처하던 주택과 행궁을 방문하는 국왕을 비롯한 고위급 인사들의 숙식을 지원해야하는 역할이 있었다. 그래서 복내당은 행각들이 상당히 많고, 국왕이 잠시 거처하던 봉수당과 장락당이 바로 붙어 있다. 아마도 정조대왕 시절에는 화성유수부 가족들이 거처하는 공간이었지만 실제로 거처하기는 힘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국왕을 보필하는 인원들이 이 곳 복내당에 머무러면서 행사를 준비했을 것으로 보인다. 화성유수 내아인 복내당. 건물자체로는 커지 않고 일반 저택과 비슷한 형..

조선 관아 2010.03.17

[화성행궁] 침전으로 쓰였던 장락당과 출입문 경룡관

화성행궁 장락당은 행궁의 침전으로 쓰였던 건물로, 봉수당 남쪽에 세워졌다. 정조가 화성을 행차할 때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침전으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정전이자 편전건물인 봉수당과 연결되어 있으며, 행궁으로써 많은 방을 두고 있지는 않다. 경룡관은 장락당을 출입하는 바깥문으로 2층누각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2층에는 누마루가 있고 그 아래로 출입하는데 지락문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고 있다. 화성행궁 장락당은 옆면3칸, 앞면 4칸 규모의 크지 않은 건물로 봉수당과 연결되어 있다. 장락궁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장락궁이라는 이름을 짓고 직접 편액을 썼다고 한다. 원래의 건물과 편액은 남아 있지 않고, 복원한 것이라 한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홍씨가 침전에 드는 모습을 재현..

조선 관아 2010.03.16

[화성행궁] 정전인 봉수당과 출입문인 중앙문

봉수당은 화성행궁의 정전이자 화성유수부 동헌건물로 원래의 이름은 정남헌이었다 한다. 정조는 화성행차시 이 곳에 머무르면서 정전으로 사용하였다. 정면 9칸의 대형 건물이지만, 월대는 궁궐건물 전각보다 낮고, 지붕 귀마루에 잡상을 올려놓음으로써 궁궐건물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곳 봉수당에서는 정조대왕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비인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렸다고하며 이 곳에 그 모습들을 재현해 놓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원래부터 있던 화성행궁 건물은 아니고 1997년에 복원한 건물이다. 원래 건물이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원래대로 고증을 거쳐서 복원했다면 후손들에게 역사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도록 하고 있는 점이 좋아 보인다. 앞면 9칸의 팔작지붕을 한 화성행궁 정전격인 봉수당. 화성행궁의 침전격인 장락당과는 건..

조선 관아 2010.03.16

[화성행궁]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 두번째 출입문인 좌익문

수원 화성행궁은 정조대왕이 임시로 머물던 행궁으로 전국의 행궁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곳이다. 원래의 목적은 수원유수가 업무를 보던 건물로 그 격에 맞게 출입문인 신풍루는 일반 지방관청의 출입문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신풍루의 원래 이름은 진남루가 하였는데 정조의 명으로 신풍루로 이름이 바뀌었다. 신풍루는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신풍루는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2층누각을 하고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관찰사가 있던 감영이나, 목사가 있는 목, 부윤이 있던 부 등 규모가 큰 지방행정 기관의 출입문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화성행궁의 성격이 수원유수부 부윤의 집무장소이기 때문이다. 신풍루 앞 고목과 홍살문 신풍루(新豊樓)는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신풍루는..

조선 관아 201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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