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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52

담양 성월리 월전고분, 삼국시대 지방세력 무덤

담양군 고서면 성월리 월전마을 입구에 남아 있는 삼국시대 이전에 조성된 고분인 담양 성월리월전고분이다. 이 고분은 방형(사각형)과 원형 분구가 이어져 있어 장고분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실제로는 마을에 입구에 있는 작은 무덤과 주변 숲으로 보이지만, 마을 안 능선쪽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 방형이고 논경지가 펼쳐진 동쪽편 원형분구이다. 원형분구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그 가운데 작은 무덤이 있다. 이 고분이 있는 담양 월전마을은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증암천 주변으로 형성된 충적지 평야지대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창평현이 있었던 지역으로 월전리 마을 동쪽 증암천변에는 창평향교가 있고 멀지 않는 곳에 창평현 관아가 있었던 구읍리가 있다. 이 지역은 넓은 충적평야의 경제력을 ..

연천 신답리고분, 한탄강변에 남아 있는 고구려고분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과 지천인 영평천이 만나는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에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 추정되는 연천 신답리고분이다. 한탄강 북안 평지에 남아 있는 신답리고분은 2기의 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의 특징인 지상식 석실구조를 하고 있는 원형의 석실봉토분으로 1호분은 너비 19m의 대형 고분이고, 2호분은 너비 7.7m 정도의 작은 고분이다. 출토된 유물이 많지 않아 고분의 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 고분이 남아 있는 연천군 신답리 일대는 한탄강과 포천에서 흘러내려오는 지류인 영평천이 만나는 지점으로 한탄강이 굽이져 흘러 반도와 같은 지형을 하고 있어,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에 용이하고, 포천과 연천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강 주요 지점에 남아 있는 고구려 ..

경주 배리삼릉(사적219호)과 경애왕릉(사적222호), 신라 마지막 박씨 왕들의 능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리삼릉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8대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700여년의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외형의 봉분을 하고 있어서 그 신빙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곳이다. 가운데 신덕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은 2차례 도굴을 당하여 내부 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 무덤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을 하고 있으며, 벽면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어서 벽화가 없는 경주의 신라고분에서 벽화의 흔적이 처음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경주 나정 부근의 경주남산 서쪽편 기슭 아래에는 일성왕릉, 지..

경주 일성왕릉 (사적 173호), 남산 신성아래에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무덤

경주시 탑동 남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능이다. 일성왕릉은 신라초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그 존재는 조선후기인 영조 6년(1730) 이후라고 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초기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던 왕들의 능인 경주 오릉과 비슷한 성격으로 정확한 조성내력이 알려지지는 않았고 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를 지냈다는 경애왕릉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성왕은 신라 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북방의 말갈족과 충돌이 있었으며, 농업을 권장하고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일성왕릉이 위치한 곳은 경주오릉에서 남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라 6촌 중 돌산고허촌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 신라가 멸망할 ..

경주 김유신장군묘(사적 21호),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장군의 무덤과 무덤둘레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경주 도심에서 형산강 서쪽편에 위치한 송화산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무덤이다. 신라 귀족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왕릉에 준하는 규모의 큰 무덤으로 지름 30m 크기로 둥근 형태의 봉분을 하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둘레석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고 있는데 세련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 앞에는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서구의 제단과 비슷한 형태의 상석이 놓여져 있다. 무덤의 전체적인 형태는 김유신장군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태종무열왕릉과 달리 성덕왕 이후 왕릉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후대에 보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덤의 봉분은 후대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였던 왕릉과 비슷하지만,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상들은 세워져 ..

경주 용강동 고분 (사적 328호), 통일신라시대 복식과 당나라와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통일신라 귀족의 무덤

경주 용강동고분은 경주시 용강동 밭 가운데에 남아 있던 고분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지금은 경주 신도심 중앙, 경주시청 북쪽편으로 아파트가 들어선 도심 한가운데 공원처럼 남아 있는 신라의 고분이다. 지금은 둘레석이 있는 통일신라시대 고분처럼 복원해 놓고 있지만, 원래는 밭 한가운데 작은 봉분만 남아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는 통일신라시대 무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을 돌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으로 오랜 기간동안 도굴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라고 한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어 여러차례 시신을 묻을 수 있는 형태로 가족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무덤의 형태는 지방에서 먼저 사용하고, 수도의 경주로 확산되어 통일신라시대 중앙 귀족들의 무덤 형태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경주 황오동고분군, 발굴이 진행중인 대릉원 동쪽편 쪽샘지구 고분군

경주 황오동 고분군은 대릉원 동쪽편 주택가에 흩어져 있는 신라 귀족들의 묘역으로 쪽샘지구라 불린다. 1960년대에 주택과 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고분의 훼손이 심해져서 2002년부터 국가에서 주택를 비롯한 사유지들을 매입하고 200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적석목관분 등 여러 형태의 고분 150여기 확인되고 있으며, 수천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낡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던 경주 쪽샘지구는 큰길 주변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가옥들이 지금은 철거되어 약간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곳에서는 예전부터 관리되어 왔던 큰 도로변 모통이와 경주빵으로 유명한 황남빵집 맞은편에 위치한 고분이 제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주택가 안쪽에 위치했던 고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

경주 신라 흥덕왕릉(사적30호), 통일신라 전성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왕릉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사적 30호로 지정된 신라 42대 흥덕왕릉이다. 이 왕릉은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인 원성왕의 괘릉과 함께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반영한 무덤으로 석물의 배치에 있어서 약간 다른면이 있지만 구성요소는 괘릉과 거의 유사하다. 왕릉은 둘레석을 두르고 있으며, 둘레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바깥에 난석이 둘러져 있다. 왕릉 중앙에는 전대나 후대의 왕릉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그리스.로마신전의 제단에서 볼 수 있는 큰 제단이 놓여져 있다. 석물은 왕릉입구임을 알려주는 화표석 1쌍, 문.무인상 1쌍, 2쌍의 사자상 중 하나가 없어진 3개의 사자상이 남아 있다. 특히, 무인석은 괘릉과 마찬가지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왕릉 앞쪽에는 비석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북..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호), 밭으로 변해버린 금관가야 고분군

김해 예안리 고분군은 낙동강 서쪽편 대동리 들판에 소재한 고대국가인 금관가야의 고분군이다. 다른 고분들과는 달리 봉분이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버린 곳이다.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분은 금관가야 지배층이 아닌 일반인들이 묻혔던 곳으로 덧널무넘, 구덩식돌넛무덤, 독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등 총 181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은 가야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천한 가야의 매장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약 2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부산대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고 하며 일부는 김해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예안라 고분군은 도로변에 있는 밭에서 발견된 것으로 얼마전까지는 다..

창녕 교동고분군 (A군), 비화가야 왕들의 묘역

창녕 고동고분군은 창녕에서 밀양으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5~6세기 경 비화가야 왕들의 무덤이다. 창녕중심부에서 화왕산 북쪽방면으로 나가는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가 고분군 중심을 지나고 있다. 편의산 국도를 기준을 서쪽을 A군, 동쪽을 B군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특별한 차이는 없어 보인다. 가야 고분을 특징을 들라면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산능선을 따라서 고분이 분포되고 있는데 이는 신라나 백제, 마한의 고분에서는 볼 수 없는 가야 고분만의 특징이다. 그래서 가야 고분이 있는 곳에 올라서면 주변이 거의 확 틔여있어서 아주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이 곳 창녕 교동고분군의 특징을 들라면, 높은 곳이 있는 고분은 봉분주위에 호석을 쌓아 놓은 것이 많고 아래쪽은 거의..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341호), 대표적인 금관가야 고분

김해시 구도심 중심부에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길이 약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가야고분군들과는 달리 거대한 봉분을 만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가 자리잡고 있던 김해중심부에 건국설화와 관련된 구지봉, 대성동고분군, 수로왕릉, 봉황동유적지가 하천을 따라 남북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대성동고분군은 1~5세기에 걸친 오랜 시기에 걸쳐서 조성된 무덤군으로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기존의 무덤위에 새로운 무덤을 중복 축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이지역 지배세력의 교체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중국제 거울..

군포 산본동 고분군, 경기도박물관에 이전 복원된 통일신라고분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 일대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 고분들 중 일부를 경기도박물관 마당에 옮겨 놓은 것이다. 아마도 산본에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발굴조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9기의 고분이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중 1,2,3호분만 이전 복원되어 있다. 봉분의 크기는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귀족의 무덤에 비해서 그 크기가 작은 편이지만 일반적인 무덤에 비해서는 큰 편이다. 고분내 발굴된 유물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고 경기도박물관 내에 전시된 유물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중요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산본은 고대 이래로 한반도 연안항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부도 안쪽의 안산과 가까운 곳으로 세력이 크지는 않지만 통일신라의 지방 귀족층이 살았던 지역으로 보인다. 경기도박물관 야외에 이전되어 있는..

충주 누암리 고분군 (사적 463호),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하고자 이주시킨 귀족들의 무덤

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일대에 남아 있는 누암리고분군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일대를 장악하면서 이 지역을 경영하고자 했던 의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적지로서 이 일대에는 약 230여기의 고분이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던 지역으로 누암리고분군들의 주인은 진흥왕이 이 지역으로 이주시킨 신라귀족들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앞쪽에 위치한 고분은 그 규모나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진골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암리고분군이 있는 가금면 일대에는 고구려가 쌓은 산성인 장미산성을 비롯하여 충주 고구려비 (국보205호), 충추 탑평리 칠층석탑(국보6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탄금대 등의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현재 사적 463호로 지정된 누암리고분군..

경주 노서리 고분군, 금관이 최초 발견된 금관총을 비롯하여 서봉총, 호우총이 있는 경주 도심의 고분군

삼국시대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서북방향으로는 신라 황금문화 절정기인 마립간 시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군을 들어서 있다. 마립간시기는 내물왕에서 왕이란 호칭을 처음사용한 지증왕 이전까지인 4~5세기를 말하며, 돌무지덧널무덤과 화려한 황금문화 등 신라문화를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났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노서리, 노동리, 황오동, 미추왕릉지구 등으로 구분하여 사적지로 관리했는데 이들 고분들은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출토유물이나 무덤의 조성방식에서도 동일한 특징을 보이기때문에 지금 대릉원으로 일괄하여 부르고 있다. 노서리고분군은 신라왕릉에서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어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한 금관총을 비롯하여, 스웨덴국왕이 황태자 시절 경주를 방문하여 무덤발굴에 참여하여 금관을 ..

경주 노동리 고분군, 신라 최대의 고분인 봉황대와 식리총,금령총

경주 노동리고분군은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 북서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마립간시기의 신라 왕과 귀족들을 무덤인 대릉원의 끝단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원래는 여러지역으로 나뉘어 관리되어 노동리고분군이라고 했지만, 대릉원 주변 고분들은 시기적, 지리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대릉원의 일부로 분류하고 있다. 이 곳은 경주도심과 제일 가까이 있는 까닭에 가장 빠른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노동리고분군은 왕릉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봉황대와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현재 봉분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는 금령총과 식리총이 있다. 금령총은 봉황대 남쪽에 있는 작은 봉분으로 1924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발굴이 되었었는데 구조는 ..

경주 황남동고분군, 계림 서쪽편 이름없는 4기의 고분

경주 황남동고분군은 신라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는 내물왕에서 지증왕까지의 마립간시기에 조성된 신라 지배층의 무덤이 다수를 이르는 경주 대릉원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고분들은 금관을 비롯하여 화려한 금.은을 비롯한 금속세공품, 화려한 토기와 서역에서 수입한 유리잔 등 오늘날 남아 있는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들 상당수가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이 지역고분들은 월성북쪽 계림 앞에 있는 내물왕릉을 비롯하여,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왕릉, 화려한 유물들이 출토된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무덤들이 평야지대 들판에 분포하고 있다. 황오동의 쪽샘지구나 대릉원 입구처럼 왕릉 사이에 주택가가 형성된 곳도 있고, 고분 주변을 논밭으로 경작하던 곳도 있었다...

[경주박물관 고고관] 신라의 금.은 그릇, 유리잔, 청동자루솥

신라의 고분에서는 많은 껴묻거리들이 출토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발굴된 금관총과 서봉총에서도 많은 유물이 출토되기는 했지만, 70년대에 시범적으로 발굴한 천마총과 황남대총에서는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그 중에서는 당시 신라인들이 사용했던 것들을 금.은으로 만들어서 무덤의 껴묻거리로 묻은 화려한 금.은 그릇들과 서역에서 수입했을 것으로 보이는 유리잔, 제사의식에 사용하는 청동제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들 중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주로 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으며, 천마총을 비롯한 여러 고분들에서 출토된 것들은 경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현재 경주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은 그 중 동시대를 대표하는 유물로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출토된 유물 중 금..

지역박물관 2011.10.06

경주 진평왕릉 (사적 180호), 수.당 교체기 신라를 안정적으로 이끈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신라 26대왕 (재위 579~632)으로 진흥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라 중흥기를 이끌었던 진흥왕 이후 신라가 삼국간 경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었던 선덕여왕대까지의 과도기를 이끌었던 국왕으로 재위 기간이 52년에 이른다. 고구려의 장수왕, 조선의 영조에 비견할 만큼 오랜 기간 왕위에 머무르면서 국가의 안정을 꽤했던 왕이다. 진평왕 재위기간동안에는 수나라와 고구려간의 전쟁으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는 등 국제적으로 격변기였다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진평왕은 국내젹으로 여러 관청을 설치하는 등 내정을 안정시키고, 명활산성과 남산산성을 쌓는 등 경주 방위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수나라.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삼국통일이 기틀을 마련하고 불..

경주 성덕왕릉 귀부, 생동감이 넘치는 거북받침돌

신문왕의 둘째아들이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손자인 성덕왕릉 앞에 세워졌던 비석의 받침돌이다. 비몸과 머릿돌은 남아 있지 않으며 거북머리 또한 남아 있지 않다. 비석으로서 전체적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조각수법이나 돌의 재질이 상당히 뛰어난 걸작으로 보인다. 거북은 모양은 근육질이 있어 보이는 크고 강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발은 앞으로 나아 가련는 형상이다. 비몸이 없어져서 비석에 적힌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경덕왕때 만들었다고 삼국사기 기록에 남아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일명 '에밀레종'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신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성덕왕은 당나라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으며 유교를 적극적으로 ..

경주 성덕왕릉 (사적 28호),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성덕대왕의 능

성덕왕과 효소왕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손자이자 신문왕의 아들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국도와 철도가에 토함산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이 평지와 만나는 곳에 나란히 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문무왕대에는 왜(倭)의 침입에 대해서 상당힌 긴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무왕의 능을 동해 대왕암에 수중능으로 마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들인 신문왕과 손자인 효소왕, 성덕왕은 일본이 침입할 수 있는 예상 통로라고 할 수 있는 울산과 경주를 연결하는 큰 길가에 나란히 마련하고 있다. 성덕왕은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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