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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공예실 7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후기의 백자

조선후기의 백자는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결과로 백자의 질이 많이 떨어졌다가 17세기말부터 다시 원래의 수준으로 질이 나아져 하얀백자가 다시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조선후기는 세계적으로 백자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시기로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의 기술을 받아들여서 상당한 수준의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게 되었고, 일본의 도자기는 유럽으로 수출되는 한편 유럽의 도자기 생산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도자기 생산 기술이 발전했던 시기인 조선 후기에는 우리나라은 전대에 비해서 도자기 생산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며, 세계적인 도자기 교역에서도 소외되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백자의 질은 전대에 비해서 발전하기는 했지만 세계적으로 인상적인 도자기술을 만들지 못했으며, 그 기..

중앙박물관 2011.02.18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분청사기의 발전과 쇠퇴

분청사기는 고려 상감청자를 계승한 도자기제작기법으로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뜻으로 20세기에 들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초에 많이 사용되었던 분청사기는 일반적으로 보기에는 고려청자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쇠퇴한 느낌을 주고 있지만, 가장 한국적인 도자기라고도 할 수 있는 도자기이다. 분청사기의 전성기는 15세기로 왕실에서부터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도자기이다. 고려 청자가 주로 귀족층에서 많이 사용되었으며 소량생산을 했던 것에 비해서 분청사기는 고려말 전국적으로 확산된 가마터 덕분에 대량생산되었다고 하며, 그 작품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양질의 것과 일반적인 것과는 수준차이가 상당히 많이 났던 것으로 보인다. 전국 각지에서 약 150여년간 생산되었던 분청사기는 세계적으로 순백의..

중앙박물관 2011.02.16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조선초기 분청사기

조선전기를 대표하는 도자기인 분청사기는 회청색 그릇에 흰 흙을 입혀 다양하게 장식하는 도자기로 그 기술의 근원은 고려시대 상감청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말 청자의 주요 생산지인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의 가마들이 왜구의 침략으로 피폐화되면서 도자기를 만들던 장인들이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생기게 되었다고 한다. 분청사기는 만들어진 시기가 15~16세기에 걸쳐 약 150년의 기간 동안 만들어졌다. 투박하면서도 서민적인 면모를 보이는 분청사기는 다른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는 한국적인 미를 잘 담아내고 있어, 고려청자, 조선백자와 더불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자기라 할 수 있다. 분청사기는 주로 민간에서 운용하는 가마에서 많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서 광주지역에 관..

중앙박물관 2011.02.15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고려 상감청자의 발전

고려청자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도자기 제작기술 중 가장 독창적이면서 뛰어난 것은 아마도 고려 상감청자일 것이다. 상감청자는 바탕에 무늬를 새기고 다른 종류의 흙을 메워 넣는 방법으로 나전칠기나 금속공예의 입사기법에서 이전부터 볼 수 있었던 것인데, 이를 고려시대에 도자기에 적용한 것이다. 제작기법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상감무늬를 만든 후 고온의 가마에 구우야만 했기때문에 재질의 차이 등으로 실제로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이라고 한다. 고려시대의 상감기법은 12세기에 그 기술의 절정을 보였다고 하며, 상당히 많은 수작들을 오늘날까지 남겨 놓고 있다.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많은 도자기들이 이 상감기법을 이용해서 만든 도자기로 고려청자의 아름다운 비색과 함께 세계적으로 그 기술과 예술성을 인..

중앙박물관 2011.02.15

[중앙박물관 도자공에실] 고려후기의 청자

고려후기에는 몽골의 침입으로 오랜 기간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적으로 경제가 상당히 어려웠던 시기이다. 이는 청자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전반적으로 전성기의 청자에 비해서 고려후기에는 그 제작수법의 단순해졌으며, 이전의 세련된 기술들이 많이 쇠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 중기 청자기술의 발달이 남송과의 교역 등을 통해서 크게 발전할 수 있었는데 그 경제적 기반이 약해짐으로써 생기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고려후기 해안지역에는 일본의 왜구가 서남해안 지방을 침입하여 고려청자를 만들던 가마들이 있었던 전남 강진과 전북부안의 장인들이 내륙으로 피난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한강유역을 중심으로 도자기 생산의 새로운 거점이 생기고 조선시대 분청사기가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용어리..

중앙박물관 2011.02.14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고려 전성기의 도자기

고려시대 도자기의 제작은 차문화의 확산과 관련이 깊으며, 초기 가마터에 출토된 유물 중에는 차을 마시는 찻잔인 완의 비율이 50%를 넘기도 한다. 고려의 자기문화가 가장 세련되게 꽃피었던 시기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였던 것으로 보이며, 국보로 지정된 고려청자의 상당수는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에는 완이 주로 만들었으나 중기에는 매병, 향로, 주전자, 베개 등 다양한 형태의 도자기가 만들어 졌으며 그 형태나 빛깔에 있어서도 고려청자 고유의 특징을 형성하였다. 이 시기에는 청자를 생산하는 가마 또한 개경 중심에서 전북 부안, 전남 강진 등의 가마에서 우수한 품질의 도자기를 생산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당시 중국 남송과 일본의 교역이 활발해짐에 따라서 그 교역로 중간에 위치한 전북 부안이나..

중앙박물관 2011.02.13

[중앙박물관 도자공예실] 고려의 자기문화, 비색청자

우리나라에서 자기가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통일신라 말기인 9~10시에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많았던 것 같다. 중국에서는 당삼채에서 시작되어 당나라때 청자가 만들어졌다고 하며, 통일신라말에서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크게 발전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며 중국에서 수입한 것들을 일부 계층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획기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황소의 난에서 시작된 당나라 말기의 혼란상을 피해서 우리나라로 넘어온 중국 기술자들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들이 있는데 세계 문화 교류를 돌이켜 보면 크게 무리가 없는 주장인 듯 하다. 고려 초기의 가마들은 수도 개경을 부근에서 중국 월주요의 자기들을 생산했다고 하며, 11세기에 들어서는 중국 송나라와 ..

중앙박물관 201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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