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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114

[중국 칭다오박물관] 산동지방 신년 목판화

칭다오박물관에서는 중국인들이 집안 곳곳에 신년을 맞이하여 붙이는 목판화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입춘때 '입춘대길'이라고 적힌 글씨를 대문에 붙이는 것처럼 중국에서는 춘절에 대문을 비롯하여 문, 벽, 항아리, 창고 등에 그림을 붙여두는데 한국에서도 중국 음식점에 가면 곳곳에 붙혀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이런 그림들은 행운과 복을 바라는 꽃, 동물, 산수화 등 전통적인 그림 소재, 집안의 수호신이라 할 수 있는 문신, 부엌신, 복신 등 그리는 신을 숭배하고 복을 바라는 내용, 경극이나 민간에 회자되는 전설, 신화 등의 내용, 농부를 비롯하여 서민들이 살아가는 모습 등을 표현하고 있다. 전시된 판화들은 산동지방에서 춘절에 많이 사용되는 그림들로 오래된 것은 많지 않고 대체로 청나라말이나 20세기초..

해외 박물관 2014.02.14

[중국 칭다오박물관] 고봉한서화진열(高凤翰书画陈列, Gao Fenghan's Calligraphy and paintings)

고봉한(高凤翰, Gao Fenghan, 1638~1748년), 청나라대 저명한 문인화가로 오늘날 칭다오시에 속한 산동성 교주(膠州) 출신이다. 시와 그림에 능하였으며, 인장을 즐겨 새겼다고 한다. 옹정제대에 벼슬에 올랐으나 퇴작하고 낙향하였다. 서예는 초서와 행서가 능했다고하며 박물관에는 초서와 행서로 쓴 글씨를 볼 수 있다. 만년에 병으로 오른손을 다쳐서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그림은 산수화를 비롯하여, 하훼.초충도 등 다양한 소재를 그렸다. 또한 벼루에 관심이 많았으며, "연사(砚史)"라는 저서를 남겼다. 17세기 중국 예술가 그룹 중 "양주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고봉한(高凤翰, Gao Fenghan)은 17세기 중국 예술가 그룹 중 "양주학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좋은 교육을 ..

해외 박물관 2014.02.09

[중국 칭다오박물관] 고대공예품 (금속공예, 문방구, 도용)

중국에서도 다양한 공예가 발달했지만, China라는 영어 국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도자기공예가 중국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도자기 공예 외에도 중국에는 다른 공예들이 발달했는데 그 중 도자기 다음을 중국적인 분야가 문방구 분야일 것이다. 필구도구로서 개발된 먹과 벼루는 진.한대를 거치면서 종이의 발명과 함께 산업화되었으며, 명.청대에는 서예, 산수화 등과 연결되면서 예술품의 경지에 이른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문방구와 함께 공예품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전국시대부터 무덤의 부장품 등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행운을 상징하는 도기로 만든 인형이 많이 만들어졌으며, 이후에는 대나무, 목재, 상아, 뿔 등을 깎아서 조각하는 공예품들도 중국적인 형태를 나타내고 있는 공예품이라 할 수 있다. Carved..

해외 박물관 2014.02.02

[중국 칭다오박물관] 고대 공예품(칠기, 옥기, 청동향로, 당삼채)

공예는 실용적인 물건에 장식적인 가치를 부가하는 미술로 19세기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어온 용어이다. 우리나라의 전통공예는 금속을 가공해서 만든 불상을 비롯한 불교공예품, 도자기, 실생활에 많이 사용한 목공예품 등이 많이 남아 있다. 반면에 중국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기때문에 우리나라에 비해서 재료와 형태가 다양하고 풍부한 것으로 보인다. 칭다오박물관에서도 우리나라 중앙박물관처럼 공예품들을 별도의 전시품으로 분리하여 전시하고 있다. 전시된 유물들은 전국시대나 한대의 것도 있지만 주로 명.청대에 만들어진 것들이 대부분으로 칠기, 당삼채, 옥기, 청동향로, 문방구 등이 있다. 중국 전통공예품을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 우리나라 박물관과 마찬가지로 청동제기를 비롯한 금속공예, 칠기, 옥공예, 당삼채 등을 전시하고..

해외 박물관 2014.01.27

[중국 칭다오박물관] 명.청대 다양한 유약을 바른 도자기 (Glazed porcelain, 清纯隽永色粙瓷)

유약(釉藥 , glaze)은 도자기 표면에 씌워 광택을 나게하고, 바탕의 흡수성을 엀애 도자기 자체 강도를 늘리는 기능을 한다. 유약의 색깔은 재료에 사용된 금속의 종류와 양, 소성할 때의 방법 등에 따라서 다향한 색깔을 보여주는데 철은 청자유,흑유, 황유 등이 되며, 동은 녹유와 홍유, 망간은 자유와 흑유, 코발트는 남유 등이 된다. 명.청대 도자기를 굽던 장인들은 이런 다양은 금속 재료와 활용과 산화물을 착색시키는 데 필요한 고도의 기술과 지식을 갖고서 최상 품질의 도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유약을 바른 도자기(Glazed porcelain, 清纯隽永色粙瓷) 명나라와 청나라에서는 가장 다양하고 최상의 품질, 풍부한 색상과 아름다운 조형미를 가진 도자기가 나타났다. 숙련된 도자기 장인들은 다양한 금..

해외 박물관 2014.01.26

[중국 칭다오박물관] 명.청시대 도자기, 청화자기(青花, Blue and White Porcelain)와 채색 자기(Colored porcelain)

청자와 백자로 전성를 이루던 중국의 도자기는 유약아래에 코발트의 청색이나 다양한 색상으로 장식하는 청화자기나 오채자기가 크게 성행한다. 청화(青花)는 흰바탕에 산화코발트안료로 그린 남청색 그림이나 문양이 있는 도자기이다. 중국에서는 원나라때 크게 성행하였으며, 중국 도자기를 대표하는 기술로 한국, 베트남, 일본 등 동양과 유럽에 도자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청화 안료는 페르시아에서 수입한 회회청과 중국산인 석청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선초기에 안료를 수입해서 청화백자를 만들기는 했으나 안료의 수입이 원활하지 못해서 조선중기 이후에는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청화자기와 함께 다양한 색상으로 그림이나 문양을 그려넣는 채색자기들도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으로 백색의 바탕에, 적.녹.황색으로 그림을 그려넣는 오..

해외 박물관 2014.01.23

[중국 칭다오박물관] 중국 화폐 이야기 (당나라~청나라)

남.북조시대는 여러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물가가 급등하고 경제는 혼란스러웠으며 다양한 화폐가 발행되기는 했지만, 한무제때 발행하기 시작한 오수전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혼란기를 통일한 수나라와 이를 계승한 당나라는 옛화폐를 폐지하고 통일된 새로운 화폐를 발행한다. 당고조는 당나라 개국을 의미하는 개원통보를 발행했는데 반량전, 오수전과 함께 중국 화폐 중 가장 잘 알려진 화폐이다. 송나라때에는 연호가 새겨진 화폐가 지속적으로 발행되었는데 발행된 화폐의 종류가 가장 많은 것이 특징이다. 당.송대에서 화폐는 왕조의 권위를 보여주는 의미가 강했는데 왕조를 상징하는 예서체와 전서체로 쓴 글씨가 새겨졌으며 송나라 휘종의 경우 직접쓴 글씨를 새긴 '숭녕통보'를 발행하였다. 또한 송대에 중앙으로 진출한 이..

해외 박물관 2014.01.22

[중국 칭다오박물관] 중국 화폐 이야기 (선사시대~남.북조시대)

조선시대 숙종대에 발행된 상평통보로 대표되는 둥근모양에 4각형 구멍이 뚫린 동전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고대 이래로 사용된 화폐로 그 원형은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기존 화폐를 철폐하고 발행한 반량전과 한무제가 발행한 오수전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물품거래를 위한 화폐로 춘주전국시대가 시작하기 이전인 주나라때까지 조개껍질과 이를 모방하여 뼈나 동으로 만든 화폐가 사용되었다. 동전처럼 오늘날 화폐와 같은 개념은 춘추전국시대에 도구모양의 포전이 상인들간의 거래상 편의를 위해 만들어졌다. 또한 산동지방의 제나라와 베이징부근의 연나라, 황하하류지역 조나라에서는 칼모양의 도전이 만들어졌는데 포전과는 달리 국가 주도로 발행한 화폐였다. 또한 휴대의 편의성이 고려된 환전이라..

해외 박물관 2014.01.20

[중국 칭다오박물관] 5.4혁명 이후 근대산업도시로의 발전

중국 5.4운동은 중국 베이징대학 교수, 강사,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으로 중국 공산당과 민주주의의 출발점이자 아시아 근.현대사에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차세계대전이 독일을 패배로 종결됨으로써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칭다오시를 중심으로 한 산동지방에 일본군이 참여하여 점령하고 일본은 중국정부와 협상을 통해 독일이 가지고 있던 이권을 승계받고자 하였으며, 파라강화회의에서 이를 승한하는 것으로 결정하자, 베이징대학 학생과 교수를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시위운동이 일어났으며, 중국 전역으로 반일, 반제국주의 운동이 확산되었다. 5.4운동의 결과로 중국 정부는 칭다오에 대한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후 일본이 산동지방에서 영향을 가지고 있기는 했으나 중국정부는 칭다오를 적극..

해외 박물관 2014.01.15

[중국 칭다오박물관] 독일의 식민지 도시개발

명.청대를 지나면서 계속이어져 온 중국의 대외무역금지조치로 산동성의 작은 어촌에 지나지 않았던 칭다오는 19세기 아편전쟁에 영국에 패한 이후 청나라 정부는 해안방어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칭다오의 존재를 1891년 승인하였으며, 1897년 독일함대가 칭다오지역을 점령하면서 청나라정부는 칭다오를 독일에 조차하는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후 독일은 칭다오에 항만시설을 건설하고, 칭다오-지난 철도를 부설하고, 칭다오 도시기반시설을 건설함으로써 칭다오는 현대화된 도시로 급속히 변모하였으며, 산동지방을 통한 식민지교역의 관문이 되었다. 1914년 1차대전에 참전한 일본이 칭다오에서 독일세력을 몰아내고 칭다오를 중심으로 산동지방에 영향력을 미쳤으며 이는 청나라의 종말을 가져온 5.4혁명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해외 박물관 2014.01.14

[중국 칭다오박물관] 남북조시대 이후 대외교역 창구로 크게 번성했던 칭다오지역

한나라때 칭다오 지역은 전국 36개 군 중 낭야군에 속했으며, 진시황과 한무제가 동쪽끝 낭야군까지 순행을 하면서 칭다오지역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남북조시대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사찰터에서 석조불상이 출토되고 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칭다오 지역은 교역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으며, 특히 송나라때 북방민족이 세원 정권이 서하, 요, 금의 압박을 받아 칭다오 지역에 있었던 판교진(현 교주시)을 제외하고는 산동반도에 있던 항구들을 폐쇄하였기때문 산동반도의 유일한 항구로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원나라때에는 산동반도 교주와 래주를 관통하는 운항하게 개통되었다. 또한 명나라대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큰 해안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는 무역을 금지하는 정책을 ..

해외 박물관 2014.01.12

[중국 칭다오박물관]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경제적 요충지 지모(即墨)와 진.한대 낭야군(瑯琊郡)

칭다오는 춘추전국시대 국가중 비교적 크고 강성한 국가였던 제나라에서도 속해있었다. 칭다오지역은 해안에 접한 항구가 발달하고 주변에 넓은 농지가 있어 경제력이 풍부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 칭다오시에 속한 현급 도시인 지모(即墨)시는 이곳에서 발행된 연나라 명도전과 비슷한 칼모양의 화폐를 즉묵도폐(卽墨刀幣)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지모시는 전국시대 유명고사이자 전투였던 '화우진(火牛阵)' 또는 '화우지계(火牛之計)'의 무대이기도 하다. 연나라가 진,초.한,조,위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침략했을 때 제나라는 크게 패하여 거(莒)와 즉묵(卽墨)성만 남기고 70여성을 잃었으나 지모(即墨)에서 제나라 사람 전단이 소를 이용하여 대대적인 반격을 연나라군을 몰아냈다고 한다.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칭다오는 전국을..

해외 박물관 2014.01.09

[중국 칭다오박물관] 신석기시대, 동이문명의 시작(东夷文明溯源, BC 7000~3600년)

칭다오박물관(Qingdao Municipal Museum)은 컨벤션센터를 비롯한 각종 시설들이 들어서고 있는 칭다오 신도심지역에 최근 세워진 박물관이다. 시립역사박물관 형태의 박물관으로 칭다오와 주변지역의 역사를 소개하고 다양한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첫번째 전시실이라고 할 수 부분은 "칭다오의 유구한 역사와 정통문화"라는 이 지역의 신석시대부터 확장되어온 역사를 보여준다. 칭다오가 있는 산동지방에는 기록에는 동이(东夷)족이 살아왔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이족을 한반도와 만주지역 민족을 일컫는다고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는 황화유역 동쪽 산동지방에 살았던 민족을 일컫는다. 산동지방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은 제남시에 있는 산동성박물관에 대부분 전시되고 있으며, 칭다오시박물관에 지역의 역사를 보여주는 일부 ..

해외 박물관 2014.01.08

[중앙박물관특별전, 이슬람의 보물] 이슬람 미술의 형상 표현(The Figurative in Islamic Art)

초기 기독교에서 성상에 대한 많은 분쟁과 갈등이 있었던 것처럼 이교도의 우상숭배와 비슷하다고 하여 모스크를 비롯한 종교적인 건축물을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를 표현한 조각상 등으로 장식하는 것을 비교적 엄격히 제한하였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이슬람에서 유럽의 카톨릭과는 달리 사실적인 표현의 대형회화나 조각상이 발달하지 않은 반면, 이슬람사원인 모스크 등 건축물을 장식하기 위해 식물 형상에서 발전한 아라베스크나 기하학적 무늬 등 추상적 형태의 미술이 발전하였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슬람에서 인간과 동물 형상의 표현이 쿠란에서 공식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고, 개인적인 용도에 생활 장식이나 그림 등에서는 사람과 동물의 형상을 표현하였다. 특히 오늘날 같은 사진과 같이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그림이 많..

중앙박물관 2014.01.05

[중앙박물관특별전, 이슬람의 보물] 이슬람 금속공예

아라비아반도에서 출발한 이슬람은 스페인에서 중앙아시아, 인도, 중국에 걸쳐서 광범위한 영역을 포함한다. 특히 이슬람의 중심인 중동지역은 고대문명 중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문명이 발생한 지역으로 고대 이래로 금속을 이용한 다양한 화려한 금속공예품을 만들어 왔다. 또한 이슬람은 고대 그리스.로마와 페르시아의 전통을 계승하여 동시대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도 문화가 발달했으며 뛰어난 금속공예문화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는 금속가공기술이 상당히 뛰어났던 지역으로 다양한 재료와 기법으로 금속공예품을 만들어 여러 지역으로 수출하였으며, 이들의 금속공예기술은 세계 여러지역에 영향을 미쳤다. 유리공예 또한 시리아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혁신적인 가공기술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성으로 이슬람 또한 금속..

중앙박물관 2013.12.12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조국으로 가는길,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고난을 같이 했던 김가진 일가

1922년 김가진이 서거한 이후에도 아들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가 임시정부에서 적극적인 활동으로 독립운동을 이어온다. 며느리 정정화는 임시정부의 안살림꾼으로, 여성단체 주요 멤버로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며, 아들 김의한은 아들 김의한은 김구가 이끄는 한국독립당에 적을 두고 광복국 기관지 '광복'편찬을 책임지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 가족은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본의 압박을 받아 상하이를 떠나 자싱으로 떠난 이후 중.일전쟁으로 소주, 항주, 광주를 거쳐 중칭으로 이동하는 힘든 피난생활을 임정인사들과 같이 했다. 다른 중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마찬가지로 해방 이후 귀국하였으나, 큰 환대를 받지 못한 쓸쓸한 귀국이었다. 또한 한국전쟁때 아들 김의한은 북한으로 납북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

지역박물관 2013.12.06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일제강점기 고국을 떠난 사람들, 김가진 일가

김가진은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10월 70세가 넘은 노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김의한과 함께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하기 위해 상해로 떠나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된다. 상해 교민사회와 임시정부에 있어서 김가진은 구한말 고위관료를 지내고 대한제국 대신을 지낸 인물로 특별한 의미를 가진 인물이었으며 임시정부 고문으로 추대되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다. 김가진은 국내에서부터 대동단 총재로서 활동하였으며, 대동단은 김가진의 망명에 이어 의친왕을 망명시키려다 실패하고 국내조직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대동단 또한 상해로 본부를 옮겨 활동하게 된다. 이후에도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대동단 총재 김가진의 존재는 국내 대동단이 와해되지 않고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중요 동력이 되었다. 상해..

지역박물관 2013.12.05

[서울역사박물관 특별전] 조국으로 가는길, 구한말 통상전문 관료로서의 김가진

김가진은 권문세가 서얼 출신으로 비교적 늦은 나이인 30대에 관직에 출사한다. 학문적인 측면을 비롯하여 다양한 방면에서 뛰어난 자질과 역랑을 가졌던 김가진은 젊은 시절에는 당시 경제적 기반을 갖추면 뛰어난 자질을 보였던 비슷한 처지의 인물들과 많은 교류를 가졌다. 그의 집인 백운당은 자연스럽게 당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무대가 되었다. 30대에 규장각 검서관으로 처음 관직에 진출한 이후 김가진은 다양한 관직을 역임했지만 두각을 보였던 부분은 인천항에서 통상업무를 맏은 이래로 외교와 통상분야였으며, 이후 주일공사를 역임하는 등 서양문물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높았던 인물이다. 이런 경험과 능력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비롯하여 대한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다..

지역박물관 2013.12.03

[서울박물관 특별전] 조국으로 가는길, 구한말 관료로 임시정부에 참여했던 동농 김가진

서울역사박물관에서는 2013년 "조국으로 가는 길 - 한가족의 독립운동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구한말 고위관료 출신으로 한일합방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한 한 가족이 살아왔던 길을 보여주는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이번에 소개된 김가진(1846~1922)은 권문세가였던 북촌 안동김씨 일가로 예조판서를 지낸 김응균의 아들이다. 서얼출신이었던 김가진는 비교적 늦게 관료로서 출발하기는 했지만 규장각참서관에서 시작하여, 청직이라 할 수 있는 규장각, 사헌부, 홍문관 등에서 초기에는 관직생활을 했으며, 개항 이후에는 외교업무를 했다. 동학혁명 이후 갑오경장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으나, 실질적으로 실패한 이후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당시 대부분의 고위관료와 마찬가지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

지역박물관 2013.12.02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풍속과 놀이

조선의 수도였던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농업사회였던 조선 사회에서도 세시풍속과 놀이, 살아가는 모습 등에서 농업에 종사했던 지방사람들과는 약간 다른 모습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수도 한양에 살았던 사람들은 대대로 권문세가였거나,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관직에 진출하여 서울에 살았던 관료들, 중앙부처에 속한 전문직 관료 또는 하급관리 등의 중인 계층과 군인들, 상업에 종사했던 상인들, 이들의 삶을 지원하면서 살았던 하층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농업사회에서 세시풍속을 따르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날 도시민과 마찬가지로 생활의 활력을 주는 의미가 강했으며, 농민들과는 달리 농사를 준비하거나 농사를 짓기위한 필요한 공동체로서의 의미는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한양사람들의 세시 풍속은 대부분 계..

지역박물관 2013.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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