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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 81

북한산성 행궁터, 산성에 마련한 국왕의 임시 거처

조선시대 행궁은 왕이 임시로 머무는 별궁이다. 행궁은 전쟁 등 국가 비상상황시 왕이 잠시 피난할 때 머물거나 지방 순시나 휴양 등을 위해 지방관아에 설치한 임시 처소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행궁으로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서 조성한 강화행궁, 남한산성 광주행궁 등이 있고, 왕이 온천에서 휴양을 하기 위해 설치한 온양행궁과 이천행궁, 왕이 능묘에 참배를 하기 위한 화성행궁, 전주행궁 등이 있다. 행궁은 기본적으로 지방관아 기능을 유지하면서 국왕의 침소, 수행원을 숙소,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사무실용도 건물 등을 추가하여 일반적인 관아보다는 건물규모가 큰 편이다. 또한 강화행궁의 규장각 등 국가적으로 중요한 문서나 서적 등을 보관하기 위한 건물을 두기도 한다. 서울 북한산성내 동장대가 바라 보이는 상원봉 아래..

조선 관아 2013.05.08

화성 당성(사적 217호), 당항성이라 불렸던 신라의 대외 창구

당항성이라고도 불리는 당성은 수원 서쪽 대부도 부근 해안지역 가까이 위치한 구봉산에 소재하고 있는 산성이다. 당성은 동남향으로 경사진 계곡을 포용하여 대략 삼각형에 가까운 형상으로 석루를 돌렸으며 소규모나마 포곡식 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다. 삼각형의 2변에 해당되는 서북.동북면은 능선을 이용하여 구축하였는데 석축이 형태는 잘 남아 있느나 표면은 흙과 잡초가 덮혀 마치 토루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특히 서북 능선을 통과한 부분의 석축은 거의 잡초와 작은 수목이 우거진 토축처럼 바뀌어 있다. 성벽의 둘레는 약 1,200m로 산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편이다. 당성이 위치한 화성군 남양지역은 원래 백제의 영역이었으나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점유한 이후 당성군이라 불렀으며 조선 태종때 전국의 지방조직을 정비..

이천 설봉산성 (사적423호), 한강 유역을 다투던 삼국시대 산성

설봉산성은 이천시 도심 서쪽에 위치한 해발 394m 설봉산 정상 동북쪽 능선, 칼바위 주변에 남아 있는 옛 산성터이다. 능선 주변에 석축을 쌓은 테뫼식 산성이라고도 하며, 계곡을 감싸고 있는 포곡식 산성이라고 한다. 삼국시대에 처음 쌓은 산성으로 성벽은 대부분 흙으로 쌓고 일부 돌로 쌓은 석축도 있는데, 원래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고 칼바위 부근에 복원한 성벽을 볼 수 있다. 산성 내부에는 주춧돌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는 건물터와 봉수대가 있다. 이 성을 쌓은 축성연대는 백제시대 유물이 발굴되어 백제가 처음 쌓았다는 의견이 있으며, 백제.신라.고구려가 한강유역을 다투던 시기에 고구려군이 처음 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설봉산은 경기도 내륙 남한강 이남 지역에서 비교적 농토가 넓고 질좋은 쌀 생산지로..

태안 백화산성,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백화산(해발284m) 정상에 쌓은 테뫼식산성

충남 태안군 조선시대 관아가 있던 태안읍 뒷편 백화산 정상에 석축을 쌓아서 만든 백화산성이다. 백화산 정상에 성벽을 둘러 쌓은 테뫼식 산성으로 고려 충렬왕13년(1286)에 쌓았다고 하는데, 원래 산성이 있던 곳을 고쳐 쌓았다는 의견도 있다. 백화산성은 사방이 절벽으로 되어 있어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에 용이한 요새같은 지형을 갖추고 있다. 태안읍에 있는 관아와 가깝고, 백화산 정상이 해발 284m로 그리 높지 않은 편이라 읍성의 성격을 갖고 있기도 하다. 서해안 해상교역로를 지키기 위해 태안반도 일대에 쌓은 성곽 중 제일 먼저 축성되었다고 한다. 고려말.조선초 서남해안에 창궐했던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성벽은 백화산 정산부에 둘레619m 정도로 쌓았으나 지금은 정상주변 ..

청주 상당산성, 동장대와 진동문에서 공남문까지

청주 상당산성은 충청병영이 있었던 청주성 동쪽 상당산을 중심으로 쌓은 둘레 4.1k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 내륙 지방 거점에 대한 방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서해안과 가까운 서산 해미읍성에 있던 충청병영을 청주로 옮기면서 대대적으로 보수한 산성으로 남한산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산성이다. 상당산성에는 약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었으며 성내에는 병마우후가 근무하는 관아와 마을, 승군들이 머무는 사찰 등이 설치되었다. 청주의 상당산성은 중부내륙 지방의 중심지인 청주서쪽 상당산에 자리잡고 있다. 상당산성의 서쪽은 매우 가파르고 산성 아래는 평야지대를 이루는 반면에 동쪽은 완만하며 계곡을 이루고 있다. 산성내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 주변에 마을을 ..

청주 상당산성, 동암문에서 동문(진동문)까지

상당산성은 충청병영과 청주목 관아가 있던 청주읍성 동쪽편에 위치한 요새로서 청주지역의 넓은 벌판과 중부지역 주요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지형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산성이다. 청주도심이 있는 산성 동쪽편과 서울로 향하는 교통로가 있는 북쪽편으로는 경사가 심하고 지형히 험하여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용이한 반면에 동쪽편은 평지에 비해서 고도가 높은 편이며,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위치한 큰 산인 속리산을 거쳐서 경상북도 문경지역과 연결된다. 상당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동쪽편으로는 계곡을 형성하고 있으며, 주위의 크고 작은 산을 통해서 경상도지역으로 퇴각하기도 용이하다. 상당산성에는 3개의 성문과 2개의 암문이 있는데, 남암문과 서문을 제외하고는 동쪽편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현재는 산성내 마을..

청주 상당산성, 서문(미호문)에서 동암문까지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가 이곳에 토성을 쌓았을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시대까지도 산성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당산성은 서쪽의 청주도심과 북쪽의 청원, 증평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지형적 특징으로 볼 때 청주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산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거친 후 내류지역 주요 거점에 대한 방어의 중요성이 부각되어 충청병영을 청주로 옮기면서 크게 증축한 것이다. 산성에서 청주도심이 내려다 보이기 시작하는 남암문을 지나서 서문인 미호문까지는 상당산성을 둘러싸고 있는 봉우리 정상부 능선을 따라서 성벽을 쌓고 있으며, 청주도심과 연결되는 지역이라 성벽을 상당히 높고 견고하게 쌓고 있다. 반면에 서문에서 산성 동북쪽 출입문인 동암문까지는 대체로 크고 작은 산봉우리..

청주 상당산성, 남암문에서 서문(미호문)까지

조선후기 충청병영이 있던 청주 도심 동쪽편에 위치한 사적 212호로 지정된 상당산성은 남한산성과 함께 조선후기 축성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산성이다. 상당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중부 내륙지역 교통로 거점에 쌓은 군사적인 요새로 충청병영을 엄호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곳에는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의 성곽시설은 대부분 조선후기에 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당산성은 지형적 특징이 동쪽은 경사가 완만하며, 서쪽은 경사가 심하고 가파른 언덕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산성 서쪽편 언덕 아래에 주변지역을 관장하던 청주목 관아와 충청병영이 위치한 청주읍성이 있고, 주변에는 무심천을 중심으로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다. 지형에서 알 수 있듯이 상당산성은 ..

청주 상당산성(사적 212호), 공남문(남문)에서 남암문까지

청주 상당산성은 청주도심 동쪽 해발 419m의 상당산을 주봉으로 하여 능선을 따라서 성벽을 쌓은 포곡식 산성이다. 상당산성은 청주 도심 주변 넓은 들판이 내려다 보이는 서쪽과 남쪽은 경사가 급하고, 동쪽으로는 경사가 완만한 지형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조선후기 충청병영이 있었던 청주 도심 배후에 위치한 요새같은 산성이다. 이곳에는 백제가 처음 토성을 쌓았다고 하며, 삼국시대 청주지역 유력자였던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가 산성을 쌓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상당산성이 갖고 있는 전략적 중요성과 지형적인 잇점으로 삼국시대 이후에도 산성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는 하지만, 현재의 상당산성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대규모 전쟁에 대비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청주지역으로 서산 해미읍성이 있던 충청병영을 청주..

파주 오두산성(사적 351호),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곳에 쌓은 관미성으로 추정되는 백제 산성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북한 지역이 내려다 보이는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는 한성백제 시기 한강하구를 지키는 백제의 중요한 요새였던 오두산성이 있던 곳이다.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작은 곶처럼 돌출된 오두산은 해발 119m로 그리 높지않은 산이지만 임진강 건너편 옛 장단군 지역과 한강 이남 김포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한강과 임진강을 오가는 선박을 감시하기에 좋은 지형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30여분 정도 걸리는 가까운 곳에 있지만 최전방 휴전선지역으로 관광객들을 위한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실제 오두산성은 최전방 군사지역으로 전망대와 도로만 개방되어 있기때문에 발굴.조사가 끝난 오두산성의 성벽이나 시설들을 찾아보기는 힘들지만 전망대에 올라 주변 경관을 둘러보면 왜 오두산성..

인천 문학산성과 문학산(해발 312m), 백제 비류가 처음 정착했던 미추홀을 지키던 산성

문학산은 인천사 남구 문학동에 위치한 해발 312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인천항 주변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다. 문학산의 이런 지형적인 잇점으로 정상부에서는 남쪽으로는 안면도와 시화호 바깥쪽 바다가, 서쪽으로는 인천항을 지나 강화해협으로 연결되는 해로가, 동쪽으로는 시흥, 북쪽으로는 부평을 지나 김포공항 주변의 한강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국방상 요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문학산 북쪽편 문학경기장 부근은 백제 시조 온조왕의 형이자, 고구려 동명왕의 둘째아들인 비류가 이끄는 세력이 정착한 미추홀이 있던 지역이다. 이 지역은 한.중.일 해상무역로에서 중요한 곳으로 백제 세력이 이곳에 정착하기 이전부터 해상무역에 관여했던 세력이 정착해 있던 지역으로 보인다. 주변에서는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을 비롯하여 신석..

포천 반월성 (사적 403호), 한강유역과 함경도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는 신라산성

포천 반월성은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에 있는 해발 283.5m의 청성산을 중심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그 형태가 반달과 같다고 하여 반월산성이라고 부른다. 포천지역은 추가령지구대를 따라서 형성된 서울과 함경도 동해안 원산, 함흥지역을 연결해 주는 주요 교통로 위치해 있는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온 한맥정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화악산, 명지산, 운악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 즐비하며, 서쪽으로는 소요산, 왕방산 등 500m 이상 놀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포천은 대체로 양쪽 산맥사이에 형성된 비교적 넓은 분지에 형성된 넓은 농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월성이 있는 청성산은 포천지역 분지의 북쪽 끝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이지만, 지형적으로 남쪽분지의 평야지대와 철원지역으로..

하남 이성산성(사적 422호), 삼국시대 한강유역을 장악한 신라가 쌓은 산성

경기도 하남시 춘궁동에 위치한 이성산성은 삼국시대 신라가 쌓은 산성이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발 209m의 이상산 정상을 중심으로 남쪽편 계곡을 막은 형태의 포곡식 산성이다. 이성산성은 한성백제의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어 한성백제시기에도 산성이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남아 있는 석축과 출토유물들은 대부분 신라의 것으로 보아 신라가 쌓은 산성으로 보고 있다. 이성산은 남한산성을 이루고 있는 주요 봉우리 중 청량산과 연결되어 있으며, 서울 강동지역에서 하남지역의 한강유역을 통제하기 위한 주요 군사적 거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성산성 북쪽 한강 너머로는 고구려 산성인 아차산성이 있고, 남쪽으로는 남한산성이 위치하고 있다. 이성산성은 배후의 평야지..

경주 명활성 (사적47호), 경주와 동해안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던 산성

경주시 보문관광단지 입구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인 명활성은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로 주로 동해안과 경주를 연결해 주는 교통로인 4번국도가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북천(알천)이 평지로 접어드는 입구이기도 하다. 명활성은 주로 동해안을 통해 접근해 오는 왜(倭)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산성으로 이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에는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전 시기부터 동해안을 통한 왜군의 침입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내물왕의 아들을 왜(倭)에 인질로 보내고, 박제상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왜(倭)와 신라의 관계가 상당히..

경주 관문성(사적48호), 만리성이라 불렸던 왜(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울산과의 경계에 쌓은 12km이르는 장성

경주와 울산을 연결하는 국도7호선을 중심으로 두도시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있었던 삼국시대 성벽인 관문성이다. 이 성은 왜구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 침입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삼국시대 신라에서는 보기드문 장성(Wall)형태의 성벽이다. 경주시 외동읍 서쪽 해발 765m의 치술령 줄기 남쪽에서 시작해서 경주시 녹동리 마을과 해발 250m정도인 순금산 정상부 아래를 지나, 경주에서 울산 태화강으로 흘러드는 동천을 지나 외동읍 모화리 동쪽 산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전체 12km 정도의 큰 규모의 성곽이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대에 각간 원진이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성벽은 길이 40~50cm로 다듬은 돌을 5단 내지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는데, 위로 쌓아 올리면서 ..

김포 문수산성(사적139호), 문수산(해발 376m) 정상의 장대지와 주변 성곽

사적139호로 지정된 김포 문수산성은 한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376m의 문수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서쪽 강화도 방향으로 연결된 2개의 산줄기와 강화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갑곶진을 연결하는 해안가를 성벽으로 연결하여 쌓은 산성이다. 문수산 정상부에서는 서울로 연결되는 한강수로, 김포지역의 넓은 벌판, 조선시대 국방상 중요한 요지였던 강화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지이다. 이 곳에는 병자호란때까지 산성이 없었으며, 그 이전에는 주로 강화도 해안을 중심으로 성곽과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곳에 산성을 쌓은 것은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의 추격을 피해 강화도를 피난할 때 나룻배를 타고 염하(강화해협)을 건너는 동안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기때문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숙종대에 이 곳에서..

김포 문수산성, 남문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길

한강이 서해바다와 만나는 해발 376m의 문수산을 중심을 쌓은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과 더불어 비상시 강화와 육지를 연결하는 뱃길의 안전에 아주 중요한 국방상의 요지이다. 문수산성은 전체 6,123m로, 서문.남문.북문과 암문 등이 있었으나 해안쪽 성벽과 성문은 무너져서 남아 있지 않고, 문수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성벽이 약 4,640m 정도 남아있다. 문수산성 바깥쪽에 해당되는 김포시 월곶면 지역에서 강화로 연결되는 길은 현재의 국도가 지나가는 곳과 한강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수산으로 막혀 있고 경사도 심한편이어서 실제로 육지에서 문수산성을 공략할 수 있는 곳은 남문과 북문의 좁은 지역뿐이다. 이 산성은 실제로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요새라기보다는 서울에서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의 안전을 도모..

김포 문수산성, 남문인 희우루와 산성마을

김포 문수산성은 한강이 서해바다로 나가는 출구에 위치한 문수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계굑을 성벽으로 연결한 포곡식 산성이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쌓은 산성으로 강화 해안에 세웠던 많은 돈대들과 함께 비상시를 대비하여 강화도를 요새화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이다. 둘레는 2.4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으로 바다로부터 공격에 대비한 산성이라기보다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신할 때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큰 곤경에 처했던 경험을 살려 육지에서 강화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곶진까지의 뱃길을 안전하에 유지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문수산성에는 원래 3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북문인 공해루, 남문인 희우루와 함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해안철책으로 막혀 있는 강화 방향의 취예루가 있었다. 산성내부 면적은 ..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병자호란 최대의 패배가 있었던 곳

남한산성 북문에 해당하는 전승문이다. 이 성문은 원래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부터 있었던 성문은 아니고 인조때 신축한 성문이라 한다. 이 곳의 이름은 '전승문'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이 병자호란 당시 가장 큰 패전이 있었던 장소라서 그 사실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혔다고 한다. 남한산성에서 북문은 서울 강동지역 한강유역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문 아래쪽은 통일신라시대 한강유역을 관리하는 주요 방어시설인 이성산성과 고려초 크게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인 하남 춘궁동과 연결된다. 정문격인 서문과는 달리 일반적인 성곽의 성문과 비슷한 규모로 지었으며, 이 쪽 방면으로는 계곡을 통해서 접근하기는 쉽지만, 계곡과 주변 지역이 경사가 있는 편으로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형을 하고 있다. ..

남한산성, 동장대에서 북문인 전승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 청량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사방의 지형이 험한편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북쪽 하남 춘궁동은 고려시대 절터인 춘궁동사지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이성산성이 있으며, 고려초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을 관할하던 광주목 관아는 남한산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주향교는 아래쪽 춘궁동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관아가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산성 주변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지방 유적지로 한성백제의 수도인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가까이 있으며,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에 의지하여 외부세력의 공격에 대응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북문 아래의 계곡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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