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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탑 86

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 (국보 38호), 경주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석탑

경주박물관 뒷편에 우뚝 서 있는 국보 38호로 지정된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신라를 대표하는 고승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던 고선사 절터에 있던 것을 70년대 덕동댐 건설로 절터가 물에 잠기자 1975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 석탑이 세워져 있던 절터에서 1914년 원효대사의 업적을 기리는 서당화상비가 발견되어 원효대사가 입적한 686년(신문왕6)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석탑은 2층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놓은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전형적인 형태를 하고 있으며, 높이 10.2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석탑이다. 초기 신라 석탑의 형식을 잘 갖추고 있는 석탑으로 감은사지 3층석탑과 거의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은 여러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면에는 기둥..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실] 한국 석탑의 모범이 된 신라 석탑

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인도 산스크리트어 '스투파(Stupa)'에서 유래되었다. 스투파는 흙이나 돌로 쌓아 올린 무덤을 뜻하는 것으로 원래는 진흙을 구워서 만든 반원형돔형태였다. 인도 아소카왕이 기존에 봉안되었던 사리를 분배하여 8만 4천기의 탑을 세우면서, 무덤의 성격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불교가 여러 경로를 통해 전파되면서 여러 지역에서 탑이 세웠졌는데 탑의 형태른 각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문화적 특성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에서는 벽돌로 쌓아 만든 전탑이, 한국에서는 돌을 다듬어서 만든 석탑이, 일본에서는 목탑이 많이 세워졌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처음에는 목탑이 많이 세워졌으며, 사찰은 탑을 중심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여러 형태를 가람배치를 보였다. ..

[부여박물관] 야외 정원에 전시된 고려시대 석탑 外

부여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석조문화재 중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석탑들이다. 석탑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는 곳으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사찰의 가람배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며, 신앙의 중심이 되었던 공간이다. 탑은 석탑, 목탑, 전탑 등 여러가지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으며 통일신라시대 감은사지와 고선사지 석탑을 만든 이후에는 2개의 탑을 사찰 중심공간에 배치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며, 그 조각수법 또한 전성기를 이룬다. 통일신라 이후에는 석탑을 세우기 위한 부처님 사리의 희소성때문인지는 몰라도 신앙의 중심이 탑에서 부처를 형상화한 불상을 모신 금당으로 바뀐다. 통일신라 말기부터 정형화되기 시작한 석탑은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그 중요성이 많이 떨어져서 그런지 조각수법이 빼어난 석탑이 거의 등장하지 않고..

경주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 (보물 168호), 보문단지 앞 마을 절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 전성기 삼층석탑

경주시 천군동 마을 농경지 가운데 남아 있는 보물 168호로 지정된 경주 천군동 동.서삼층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 가람배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전형적인 '두 개의 탑' 모습을 하고 있는 삼층석탑이다. 원래는 들판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39년에 목원한 것으로 통일신라 전성기 삼층석탑 형식을 하고 있다. 현재 동탑은 기단과 탑신만 남아 있고, 서탑에는 머리돌 장식이 일부 남아 있다. 머리장식이 남아 있는 서탑의 높이가 7.7m로 전성기 석탑의 위용을 갖추고 있다. 두개의 탑은 같은 양식을 하고 있는데, 2층의 기단부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 놓고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석가탑과 마찬가지라 기단부와 탑신 몸돌에 특할한 장식을 하고 있지 않으며, 탑신 몸돌 모퉁이에 기둥을 새겨 놓..

경주 남산동 동.서삼층석탑(보물 124호), 형식이 다른 두개의 탑이 세워져 있는 절터

경주 남산 동쪽 서출지 남쪽편에는 불국사처럼 형식이 다른 두개의 탑이 세워져 있다. 통일신라 전성기가 끝나가는 9세경에 세워진 보물 124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모전석탑 형식의 동탑과 정형화된 통일신라 삼층석탑 형식을 하고 있는 서탑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남아 있는 두개의 석탑 배치 등으로 볼 때 어느정도 규모가 있는 사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사찰이 있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남산사 또는 양피사 등이 부근에 있었다는 후대의 기록이 있다고 한다. 부근에는 경주 외각의 오래된 저수지인 서출지와 통일신라 쇠퇴기의 왕릉인 헌강왕릉과 정강왕릉이 있다. 동탑은 탑신은 일반 석탑과 비슷해 보이지만, 기단부가 3칸의 큰 육면체돌을 벽돌처럼 쌓아서 만든 것으로 진흥왕릉 아래에 있는 서악동삼층석탑과 ..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 (보물 1429호), 통일신라 밀교를 대표하는 원원사 절터에 남아 있는 두개의 탑

경주에서 동남쪽을 20여 km 떨어진 외동읍 모화리 동쪽 산에 위치한 통일신라 밀교의 중심지였던 원원사 절터에 남아 있는 보물 1429호로 지정된 원원사지 삼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 전성기의 정형화되어가던 삼층석탑의 구조를 하고 있으며, 절터 가운데 두개의 탑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두개의 탑은 같은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며, 2단으로 기단부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려놓고 있다. 부분적으로 파손된 곳이 많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석탑의 기단부에는 연화좌에 앉아 있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으며, 탑신 1층 몸돌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무덤 등에는 각 방위를 지키는 신장으로 십이지신상을 새겨 넣는 경우는 많지만 석탑 기단부에 십이지신상을 새긴것..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국보 39호), 이끼가 끼지 않아 '나원 백탑'이라 불렸던 석탑

경주시 현곡면 나원리 산속에 홀로 남아 있는 나원리오층석탑이다. 높이 9m에 이르는 통일신라 전성기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석탑으로 2층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석탑이다. 탑의 기단이나 몸돌에 별다른 장식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기단부와 탑신의 비례가 뛰어난 석탑으로 조성당시의 원혀이 크게 파손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2층으로 된 기단부는 그리 높지는 않으나 5층의 탑신을 안정감있게 잘 받치고 있다. 5층으로 이루어진 탑신 1층 몸돌과 지붕돌은 상대적으로 큰 편이며, 위로 올라갈 수록 작아지고 있다. 이 석탑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석탑인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 또는 무영탑)과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그 조각수법이나 조형미에 있어서 완성되어가는 통일신라석탑의 조각기술을 잘..

경주 정혜사지십삼층석탑(국보 40호), 통일신라 석탑 중 보기 드문 13층으로 이루어진 석탑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이 있는 계곡에 남아 있는 국보 40호로 지정된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이다. 높이 5.9m의 이 석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단부는 단층으로 토축을 쌓아 놓고 있는데 원래의 모습인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석탑는 13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층에만 거대한 몸돌과 지붕돌이 있고, 2층부터는 몸돌.지붕돌이 급격히 작아진다. 기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1층 몸돌에는 4면에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고, 지붕돌 또한 위층에 비해서 상당히 큰 편이다. 2층부터는 몸돌이 거의 보이지 않아 마치 지붕돌만 13층으로 올려 놓은 것처럼 보인다. 정혜사지십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만들어진 많은 석탑 중에서도 그 층수가 보기 드물게 13층을 이루고 있으며, 기단 또한 토축을 쌓..

안성 죽산리 오층석탑(보물 435호), 고려시대 큰 사찰 봉업사 옛 절터에 남아있는 고려초기 석탑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들판에 홀로 서 있는 보물 435호로 지정된 죽산리오층석탑이다. 이 석탑은 고려초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부근에서 '봉업사'라 적힌 청동제 반자가 발견되어 봉업사지 오층석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석탑은 단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이 올려져 있는 정형화된 고려시대 5층석탑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단부가 단층인 대신에 탑신 1층 몸돌이 다른 층에 비해서 크게 만들어져 기단의 역할을 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가 왜소한 편으로 전체적인 균형미는 통일신라의 석탑에 비해서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기단부나 탑신의 몸돌에 특별한 장식을 하지 않고 있으며, 모서리에 기둥모양을 새겨 놓고 1층 몸돌에는 불상 등을 안치하는 작은 감실이 있을 뿐이다. 석탑의 조각수법이나 비례 등 전체적인 조형미..

평창 월정사 팔각구층석탑 (국보 48호),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석탑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오대산 기슭에 위치한 월정사는 643년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사리와 대장경일부를 가지고 돌아와 통도사와 함께 창건했다고 알려진 오래된 고찰이다. 오대산 깊은 산중에 위치해 있지만 국보 48호인 팔각구층석탑과 그 앞에 있는 보물 139호인 석조보살좌상을 제외하고 전각들은 한국전쟁으로 불타버렸기때문에 오래된 건물은 남아 있지 았다. 불교와 관련있는 오대산이라는 이름과 함께 문수보살이 머무는 땅으로 인식되고 있는 이 사찰은 조선초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세조의 영향으로 이곳에 오대산사고를 설치하고 상원사를 중창하는 등 왕실관 관련이 있는 원찰의 기능을 했던 사찰이라 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초에 세워진 석탑으로 8각모양의 2단 기단 위에 9층의 탑신을 올린 석탑으로 경..

[경주박물관 미술관] 사리갖춤, 황룡사 목탑 찰주본기와 감은사 사리갖춤(보물 366호)

사리(舍利)는 부처나 성자의 유골을 의미하며, 사리를 숭배하는 신앙은 불교가 처음 생긴 이래로 성행했다. 석가모니가의 사리를 8등분하여 인도 각지에 탑을 세운 것이 불탑의 시초이며, 아소카왕이 이를 세분하여 84,000개의 탑을 인도 각지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불교가 동아시아로 전래되면서 불상이 신앙의 중심이 되기 이전에는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이 사찰의 중심이 되었으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탑을 중심으로 사찰의 가람을 배치하였다. 부처의 사리를 모신 탑(Pagoda)은 인도나 서역에서는 반구를 엎어 놓은 모양이었으나 중국으로 전해지면서 전각의 형태를 취하게 되면서 목탑의 형태를 하게 되었다. 목탑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 비슷한 형태로 많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이며, 이후에 중국에는 벽돌로 쌓은..

지역박물관 2011.10.31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국보 37호), 효소왕이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구황리 삼층석탑

황복사지는 신라에서 신성시 여기던 선덕여왕릉이 있는 경주 낭산 북쪽 끝자락 동쪽편에 있던 사찰로 경주에 있었던 많은 사찰 중에서도 큰 규모의 사찰에 속했던 사찰이었다. 황복사 옛절터에는 효소왕이 그의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석탑으로 효소왕의 아들 성덕왕이 다시 사리와 불상을 넣으면서 두왕의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1943년 이 탑의 해체복원 과정에서 금동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어 이 탑이 건립된 경위와 발견된 유물들의 성격이 기록되어 있다. 이 석탑은 높이 7.3m로 이중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쌓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탑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에 각면에는 2개의 기둥이 새겨져 있고 탑신부도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국보 21호), '석가탑' 또는 '무영탑'으로 불리는 통일신라 석탑의 걸작

불국사 경내에 있는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는 불국사 삼층석탑은 우리에게 석가탑 또는 무영탑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인 석탑이다. 불국사 삼층석탑은 현세의 부처인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탑이라 하여 석가탑이라 불리었으며, 아사달의 슬픈 전설이 담긴 그림자가 보이지 않는 무영탑으로도 많이 불린다. 60년대 석가탑 해체 복원시 석탑 내부에서 '무구정광 다라니경'과 사리함이 발견되기도 한 탑이다. 불국사는 우리가 아는 현재의 대부분의 사찰처럼 대웅전을 비롯한 법당과 불상이 신앙의 중심이 아니라 사방의 회랑이 사찰의 신앙 공간을 이루며 중앙에 위치한 탑이 주된 신앙의 상징물이었다고 하며, 당시에 만들어진 많은 탑들이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불국사 삼층석탑은 국보 2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형적인 통일신라의 삼층..

경주 불국사 다보탑 (국보20호), 석가탑과 함께 '2개의 탑'을 연상시키는 통일신라 석탑의 걸작

불국사를 대표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석가탑과 다보탑일 것이다. 많은 전란등으로 불국사가 타버렸을 때도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었기 때문에 불국사는 계속 재건되어왔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룡사의 목탑이 불타버렸을때 그 복구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 황룡사는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불국사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중심으로 언제나 예전같이 재건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국사 마당에 있는 석가탑과 다보탑을 보면 그림,사진,동전 속에서 볼때의 약간 왜소함에 비해 실물의 크기에 감탄을 하게된다. 이 두개의 탑을 중심으로 불국사의 역사는 계속되는 것 같다. 국보 20호로 지정된 다보탑은 석가탑과 함께 대웅전 경내에 나란히 서 있는 '2개의 탑'이라는 의미를 잘 보여주는 석탑으로 높이 10.34m의 대형 석탑으로..

경주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국보 236호), 토함산 기슭 절터에 남아 있는 두개의 탑

토함산 동남쪽 대종천 상류에 위치한 절터인 장항리사지는 그 내력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마을 이름을 따라서 장항리사지라고 부른다. 이 절터에는 2개의 오층석탑이 남아 있는데 국보 236호로 지정된 서탑만이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고, 동탑은 1층몸돌과 탑신 지붕돌만이 남아 있어서 그 석자재를 그냥 쌓아두고 있다. 장항리사지에는 석탑이외 금당터에 석조불대좌가 남아 있고 석조불상은 지금 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국보 236호로 지정된 장항리사지 서오층석탑은 이중기단을 가진 오층석탑으로 동.서에 같은 모양의 석탑이 나란히 서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근처에 있는 감은사지석탑과 비슷한 개념의 가람배치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은 경주에서는 많지 않은 오층석탑을 하고 있는데, 그 양식에 있어서는 감은사지석탑이..

경주 서악동 삼층석탑 (보물 65호), 진흥왕릉 아래에 남아 있는 모전석탑

경주 형산강 서쪽 선두산 동쪽 능선에 자리잡고 있는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구분군에서 약간 북쪽편 능선에 위치한 진흥왕릉을 비롯한 여러 왕릉들과 함께 있는 서악동 삼층석탑이다. 이 곳에 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왕릉을 지키는 원찰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사실들과 함께 다른 여러가지 정황을 종합하여 서악동고분군보다는 이 곳이 왕릉으로 공식화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 모전탑 계열을 탑으로 흙을 구운 벽롤로 쌓은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은 석탑이다. 이 석탑과 비슷한 형태로 경주 남산리동삼층석탑이 있다고 하며 형식적으로 간략화되어 있어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

속초 향성사지삼층석탑(보물 443호), 외설악으로 들어가는 도로에 외로이 서 있는 통일신라 석탑

속초시 설악동 설악산국립공원으로 들어가는 길 옆에 외로이 서 있는 향성사지삼층석탑이다. 보물 443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2층의 기단부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이다. 높이 4.33m로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석탑이 정형화되기 시작하는 시점에 만들어진 석탑이다. 인근에 있는 국보 1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 삼층석탑에는 이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부조상이 새겨져 있지만, 이 석탑 몸돌이나 기단부에는 조각상이 새겨져 있지 않고 간결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석탑이 있는 자리는 설악산 신흥사의 전신인 신라고승 자상이 653년에 건립하였다고 전해지는 향성사가 있었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향성자시삼층석탑은 설악켄싱턴스타호텔과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 아마 호텔이 있는 자..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보물 250호), 통일신라 후기의 정형화된 양식의 석탑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은 보물 250호로 지정된 통일신리시대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이층의 기단부에 3층 탑신을 쌓아 올린 석탑으로 석탑이 정형화되어가던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경북내륙지역 3층석탑에서 볼 수 있는 기단부나 탑신에 새겨진 팔부중상 등의 부조상은 보이지 않고 간략하게 안상만 새겨 놓고 있다.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 1개의 돌에 기둥 등을 새겨놓고 있다. 제작수법이 간단하면서도 정형화된 통일신라 후기와 고려초기의 석탑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부산 금정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범어사는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전국 화엄십찰 중 하나로 남해안 침략하는 왜(倭)를 물리치고하고자 하는 바램으로 세운 사찰로 국왕을 보위하는 화엄종 사찰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사찰로 임진왜란 때 ..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보물799호),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은 고려말 석탑

마곡사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나서 주불전인 대광보전이 있는 경내로 들어서면 고려말에 세워진 오층석탑을 볼 수 있다. 이 석탑은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을 받아서 세워진 탑으로 다보탑이라고도 부른다. 이 오층석탑은 높은 이중 기단 위에 오층의 탑신을 올려 놓고 있으며 탑의 끝부문에는 라마탑과 비슷한 장식을 세워놓고 있다. 경천사탑, 원각사탑과 함께 원나라 탑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마곡사오층석탑은 통일신라나 고려초에 만들어진 석탑에 비해서 각 구성요소들의 비례가 안정적이지 못하며, 조각수법 또한 수준이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2층으로 쌓은 기단부는 전체 탑을 받치고 있는데 안정감이 많이 떨어지며, 5층으로 쌓은 탑신의 몸돌에는 부서, 보살 등을 조각해 놓고 있다. 이 탑의 가장 특징적인 머리장식은 라마탑..

양양 낙산사 칠층석탑 (보물499호)

낙산사 원통보전 앞에 세워진 보물 499호인 칠층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세월때 만든 3층석탑을 조선초 세조가 중건하면서 7층석탑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불교중심의 고려 사회에서 유교사회 조선으로 변화함에 따라 불교미술의 수준은 크게 위축되었다고 하며, 이 석탑은 고려시대 양식이 적용된 대표적인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양식을 많이 적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기단부는 정사각형으로 지대석이 놓여 있는데 윗면에 겹연꽃 무늬를 장식한 것 고려시대 이후의 양식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탑신부는 조선시대 다층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상륜부에는 청동 복발.보륜 등을 장식하고 있다. 상륜부의 형식은 원나라의 영향을 받은 라마탑과 닮은 장식들의 거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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