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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 152

청주 상당산성, 동장대와 진동문에서 공남문까지

청주 상당산성은 충청병영이 있었던 청주성 동쪽 상당산을 중심으로 쌓은 둘레 4.1km의 비교적 큰 규모의 산성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친 이후 내륙 지방 거점에 대한 방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서해안과 가까운 서산 해미읍성에 있던 충청병영을 청주로 옮기면서 대대적으로 보수한 산성으로 남한산성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산성이다. 상당산성에는 약 3,500명의 병력과 승군이 배속되었으며 성내에는 병마우후가 근무하는 관아와 마을, 승군들이 머무는 사찰 등이 설치되었다. 청주의 상당산성은 중부내륙 지방의 중심지인 청주서쪽 상당산에 자리잡고 있다. 상당산성의 서쪽은 매우 가파르고 산성 아래는 평야지대를 이루는 반면에 동쪽은 완만하며 계곡을 이루고 있다. 산성내 동쪽으로 흐르는 계곡 주변에 마을을 ..

청주 상당산성, 동암문에서 동문(진동문)까지

상당산성은 충청병영과 청주목 관아가 있던 청주읍성 동쪽편에 위치한 요새로서 청주지역의 넓은 벌판과 중부지역 주요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한 지형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산성이다. 청주도심이 있는 산성 동쪽편과 서울로 향하는 교통로가 있는 북쪽편으로는 경사가 심하고 지형히 험하여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용이한 반면에 동쪽편은 평지에 비해서 고도가 높은 편이며,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위치한 큰 산인 속리산을 거쳐서 경상북도 문경지역과 연결된다. 상당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포곡식 산성으로 동쪽편으로는 계곡을 형성하고 있으며, 주위의 크고 작은 산을 통해서 경상도지역으로 퇴각하기도 용이하다. 상당산성에는 3개의 성문과 2개의 암문이 있는데, 남암문과 서문을 제외하고는 동쪽편에 출입문을 두고 있다. 현재는 산성내 마을..

[서울성곽] 인왕산 정상 부근 성벽

한양 도성을 이루고 있는 성곽 중 경복궁 서북면에 둘러싸고 있는 인왕산 성곽이다. 북악산 성곽과 함께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성곽 중 제일 중요한 곳으로 지금도 청와대를 방어하기 위해서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이다. 인왕산은 정선의 산수화 '인왕제색도'에서 그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듯이 조선시대 한양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경치를 보여주던 산이다. 인왕산은 높이 338m로 화강암으로 된 암반이 노출되어 있어 각양 각색의 모양을 하고 있는 바위들이 곳곳에 솟아 있어 북악산과 함께 서울의 명산이라 할 수 있는 곳이다. 60년대 북한의 기습으로 인해서 한때는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되었으나 지금은 등산로가 개방되어 있다. 인왕산 성곽은 서울의 서쪽인 사직단 부근에서 시작해서 인왕산 봉우리를 거쳐서 한양 도성의 북소문인..

[서울성곽] 사직터널에서 인왕산 범바위까지

인왕산은 서울을 둘러싸고 4개의 진산 중 서쪽편 우백호에 해당하는 산으로 해발 338.2m로 그리 높지는 않은 편이다. 산전체가 대부분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암반이 노출되어 있는 것이 특징으로 기차바위,선바위, 범바위 등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많은 바위들이 있다. 서울도심에서 백색의 화강암 바위산 경치가 아름다우며 그 풍경은 '인왕제색도'를 비롯하여 많은 그림에 볼 수 있다. 조선이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면서 능선을 따라서 성곽을 쌓고 있는데, 서대문에서 사직터널과 인왕산 정상을 지나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까지 성벽이 이어지고 있다. 인왕산 성곽은 사직터널 부근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민가가 없는 지역이라 현재 남아 있는 서울 성곽 중 그 모습이 제대로 남아 있는 편이다. 서울을 지키는데 있어서 주요..

순천 낙안읍성, 서문과 관아 주변 성벽

순천 낙안읍성으로 조선초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남해안과 서해안 지방에 쌓은 많은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남아 있는 읍성이다. 읍성은 동남.북서 방향 대로를 축으로 남쪽에는 민가, 북쪽에는 관아건물이 배치되어 있다. 낙안읍성에는 동남 방향에 동문, 남서방향에 남문, 북서방향에 동문이 있고, 관아 뒷편 북동방향으로는 성문을 두고 있지 않다. 성벽은 상당히 큰 돌을 다듬어 석축을 쌓고 있는데, 안쪽에 토축을 쌓고 바깥쪽에 석축을 쌓는 일반적인 조선시대 읍성과는 달리 전체를 석축으로 쌓은 석성이다. 낙안읍성 서문은 북동쪽의 조계산과 이어지고 교통로와 연결되고 있으며, 조계산의 선암사, 송광사를 지나 승주, 구례, 곡성, 남원과 연결된다. 성문이 문루가 남아 있는 남문, 동문과는 달리 서문에는 문루가..

순천 낙안읍성, 동문인 낙풍루와 주변 성벽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 소재한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이 지역에 있었던 낙안군 관아가 있던 곳으로 남해안 지역에서는 꽤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는 낙안들판 북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동쪽으로는 순천과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승주, 구례를 거쳐서 남원과, 서쪽으로는 보성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고려말, 조선초에 왜구의 침입이 많았던 지역으로 해안에서 비교적 안전한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에 읍성을 쌓아 대비했던 곳이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읍성들 가운데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된 곳으로 평지에 장방형의 석축성을 쌓고 있다. 낙안읍성에 있는 동.서.남 3개의 성문 가운데 지금은 정문처럼 사용하고 있는 동문은 실제로 남해안이 있는 벌교지역과 연결되는 곳으로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는 경로이기도 하다. ..

포천 반월성 (사적 403호), 한강유역과 함경도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는 신라산성

포천 반월성은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에 있는 해발 283.5m의 청성산을 중심으로 축조된 테뫼식 산성으로 그 형태가 반달과 같다고 하여 반월산성이라고 부른다. 포천지역은 추가령지구대를 따라서 형성된 서울과 함경도 동해안 원산, 함흥지역을 연결해 주는 주요 교통로 위치해 있는 지역으로 동쪽으로는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려온 한맥정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로 화악산, 명지산, 운악산 등 해발 1,000m 이상의 산들 즐비하며, 서쪽으로는 소요산, 왕방산 등 500m 이상 놀은 산들이 연결되어 있다. 포천은 대체로 양쪽 산맥사이에 형성된 비교적 넓은 분지에 형성된 넓은 농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반월성이 있는 청성산은 포천지역 분지의 북쪽 끝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이지만, 지형적으로 남쪽분지의 평야지대와 철원지역으로..

[베로나] 카스텔베키오(Castelvecchio), 베로나를 방어하기 위해 세운 르네상스시대 요새

베로나의 도심 동쪽편과 아디제강 북안을 연결해 주는 오래된 다리가 있는 곳에 남아 있는 오래된 성채인 카스텔베키오(Castelvecchio)이다. 다른 도시의 성채는 도시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에서 시청사나 궁전을 둘러싸고 있는 방어시설인데 비해서, 베로나의 성채는 궁전이나 청사 건물 등이 성채 안에 없고, 그 위치도 도심 외곽에 위치하고 있다. 이는 로마시대 도시외곽 주요 주요 교통로에 설치한 요새(Fortress)와 같은 입지적 조건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 성은 중세 Scaliger 왕조가 베로나 지역을 통치했던 시절에 세워졌던 주요한 요새 중 하나이다. 이 성은 북부 이탈리아반도 서안의 항구도시 제노바와 동안의 베네치아를 거쳐 오스트리아와 독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인 Via Postumia와 아디..

이탈리아(Italy) 2012.09.14

연천 호로고루, 임진강변에 쌓은 고구려군의 요새

연천 호로고루성은 임진강 중류에 위치한 고구려군의 요새이다. 임진강이 지천과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삼각형 모양의 지형에 쌓은 강안평지성이다. 이 곳은 동쪽을 제외하고는 약 20~30m 정도의 현무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천연의 요새라 할 수 있다. 성벽전체의 둘레는 400여m, 면적은 600여㎡로 큰 편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남벽과 북벽은 현무암 절벽을 성벽으로 삼아 상단부에 1~2m의 토축을 쌓고 목책을 설치하였고, 성안으로 출입하는 동쪽에 토축과 석축이 섞여 있는 높이 10여m의 성벽을 쌓았으며, 동벽에 성문을 두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북측 성벽에는 작은 암문을 두어 성벽 아래쪽 임진강으로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 유역은 한반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어 고구려,백제, 신라 ..

경주 명활성 (사적47호), 경주와 동해안을 연결하는 교통로를 지키던 산성

경주시 보문관광단지 입구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인 명활성은 남산성.선도산성.북형산성과 함께 경주를 방어하는 외곽의 주요 산성 중 하나로 주로 동해안과 경주를 연결해 주는 교통로인 4번국도가 경주시내로 들어오는 관문에 위치하고 있다. 토함산에서 흘러내려오는 북천(알천)이 평지로 접어드는 입구이기도 하다. 명활성은 주로 동해안을 통해 접근해 오는 왜(倭)의 공격에 대비하여 쌓은 산성으로 이 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기록에는 실성왕 4년(405)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전 시기부터 동해안을 통한 왜군의 침입이 여러 차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는 내물왕의 아들을 왜(倭)에 인질로 보내고, 박제상 이야기가 전해지는 등 왜(倭)와 신라의 관계가 상당히..

경주 관문성(사적48호), 만리성이라 불렸던 왜(倭)의 침입을 막기 위해 울산과의 경계에 쌓은 12km이르는 장성

경주와 울산을 연결하는 국도7호선을 중심으로 두도시의 경계가 되는 지점에 있었던 삼국시대 성벽인 관문성이다. 이 성은 왜구가 신라의 수도 경주에 침입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쌓은 삼국시대 신라에서는 보기드문 장성(Wall)형태의 성벽이다. 경주시 외동읍 서쪽 해발 765m의 치술령 줄기 남쪽에서 시작해서 경주시 녹동리 마을과 해발 250m정도인 순금산 정상부 아래를 지나, 경주에서 울산 태화강으로 흘러드는 동천을 지나 외동읍 모화리 동쪽 산아래까지 길게 이어진 전체 12km 정도의 큰 규모의 성곽이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성덕대에 각간 원진이 3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쌓았다고 한다. 성벽은 길이 40~50cm로 다듬은 돌을 5단 내지 6단으로 쌓고 그 위에 자연석을 쌓았는데, 위로 쌓아 올리면서 ..

김포 문수산성(사적139호), 문수산(해발 376m) 정상의 장대지와 주변 성곽

사적139호로 지정된 김포 문수산성은 한강 하구에 자리잡고 있는 해발 376m의 문수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서쪽 강화도 방향으로 연결된 2개의 산줄기와 강화도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갑곶진을 연결하는 해안가를 성벽으로 연결하여 쌓은 산성이다. 문수산 정상부에서는 서울로 연결되는 한강수로, 김포지역의 넓은 벌판, 조선시대 국방상 중요한 요지였던 강화도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지이다. 이 곳에는 병자호란때까지 산성이 없었으며, 그 이전에는 주로 강화도 해안을 중심으로 성곽과 군사기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 곳에 산성을 쌓은 것은 병자호란때 청나라군의 추격을 피해 강화도를 피난할 때 나룻배를 타고 염하(강화해협)을 건너는 동안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기때문 이를 보완하기 위해 숙종대에 이 곳에서..

김포 문수산성, 남문에서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성벽길

한강이 서해바다와 만나는 해발 376m의 문수산을 중심을 쌓은 문수산성은 강화도의 갑곶진과 더불어 비상시 강화와 육지를 연결하는 뱃길의 안전에 아주 중요한 국방상의 요지이다. 문수산성은 전체 6,123m로, 서문.남문.북문과 암문 등이 있었으나 해안쪽 성벽과 성문은 무너져서 남아 있지 않고, 문수산 능선을 따라서 쌓은 성벽이 약 4,640m 정도 남아있다. 문수산성 바깥쪽에 해당되는 김포시 월곶면 지역에서 강화로 연결되는 길은 현재의 국도가 지나가는 곳과 한강변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문수산으로 막혀 있고 경사도 심한편이어서 실제로 육지에서 문수산성을 공략할 수 있는 곳은 남문과 북문의 좁은 지역뿐이다. 이 산성은 실제로 바다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요새라기보다는 서울에서 강화도로 피난할 때 뱃길의 안전을 도모..

김포 문수산성, 남문인 희우루와 산성마을

김포 문수산성은 한강이 서해바다로 나가는 출구에 위치한 문수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계굑을 성벽으로 연결한 포곡식 산성이다. 조선후기 숙종대에 쌓은 산성으로 강화 해안에 세웠던 많은 돈대들과 함께 비상시를 대비하여 강화도를 요새화하기 위하여 쌓은 산성이다. 둘레는 2.4km로 상당히 큰 규모의 산성으로 바다로부터 공격에 대비한 산성이라기보다는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로 피신할 때 청나라군의 공격으로 큰 곤경에 처했던 경험을 살려 육지에서 강화도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갑곶진까지의 뱃길을 안전하에 유지하기 위해 쌓은 산성이라고 할 수 있다. 문수산성에는 원래 3개의 성문이 있었는데 북문인 공해루, 남문인 희우루와 함께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해안철책으로 막혀 있는 강화 방향의 취예루가 있었다. 산성내부 면적은 ..

남한산성 북문(전승문), 병자호란 최대의 패배가 있었던 곳

남한산성 북문에 해당하는 전승문이다. 이 성문은 원래 남한산성을 축조할 때 부터 있었던 성문은 아니고 인조때 신축한 성문이라 한다. 이 곳의 이름은 '전승문'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이 병자호란 당시 가장 큰 패전이 있었던 장소라서 그 사실을 잊지말자는 뜻에서 그런 이름을 붙혔다고 한다. 남한산성에서 북문은 서울 강동지역 한강유역과 연결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북문 아래쪽은 통일신라시대 한강유역을 관리하는 주요 방어시설인 이성산성과 고려초 크게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인 하남 춘궁동과 연결된다. 정문격인 서문과는 달리 일반적인 성곽의 성문과 비슷한 규모로 지었으며, 이 쪽 방면으로는 계곡을 통해서 접근하기는 쉽지만, 계곡과 주변 지역이 경사가 있는 편으로 쉽게 공략할 수 없는 지형을 하고 있다. ..

남한산성, 동장대에서 북문인 전승문까지

남한산성은 한강 남쪽 청량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성으로 사방의 지형이 험한편으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남한산성 북쪽 하남 춘궁동은 고려시대 절터인 춘궁동사지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중요한 산성이었던 이성산성이 있으며, 고려초 세력을 떨쳤던 광주지역 호족의 근거지이기도 한다. 조선시대 이 지역을 관할하던 광주목 관아는 남한산성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주향교는 아래쪽 춘궁동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원래 관아가 있는 곳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성산성 주변은 대표적인 통일신라시대 지방 유적지로 한성백제의 수도인 몽촌토성, 풍납토성과 가까이 있으며,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에 의지하여 외부세력의 공격에 대응하기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북문 아래의 계곡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

남한산성, 장경사신지옹성에서 망월봉 정상 동장대까지

남한산성은 수어장대가 설치된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해발 497m의 청량산을 중심으로 여러개의 봉우리와 능선을 성벽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내부는 물이 풍부하고 병사와 주민이 머무를 수 있는 분지를 형성하고 있어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남쪽의 해발 542m의 검단산과 동쪽의 해발 515m의 벌봉 주변이 남한 산성 본성과 떨어져 있으면서도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곳을 통한 공격에 취약한 점이 있으며,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벌봉과 검단산 능선을 청군이 점령하여 강력한 화포로 본성을 공격하여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병자호란 이후 동쪽편에는 외성인 봉암성과 한봉성을 쌓고 남쪽편 검단산에는 신남성 돈대를 쌓았다. 또한 외성과 돈대를 엄호하기 위해 주변 여러곳에 옹성도 설치하였다. 남한산성..

남한산성, 동문에서 장경사 입구 제1암문까지 성벽길

남한산성은 한강유역이 내려다 보이는 남한산을 중심으로 둘레 8km의 석축을 쌓은 대표적인 조선시대 산성이다. 산성의 지형은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서울 방향으로는 경사가 급한편이며, 동쪽과 남쪽으로는 크고 작은 봉우리와 연결되면서 지형이 약간 완만한 편으로 동문인 좌익문은 중부내륙지방과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 중의 하나로 광주,이천을 거져서 충주와 청주 지방으로 연결된다. 남한산성 동문에서 동북방향으로는 여러개의 봉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남한산성을 건설하고 지키기 위해서 동원한 승병들을 위해 세운 사찰인 망월사와 장경사가 자리잡고 있다. 동문에서 2개의 사찰까지는 도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성곽은 동쪽방향으로 돌출된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동문인 좌익문에서 장경사가 있는 제1암문까지는 동..

김해읍성 공진문, 김해읍성 옛터에 남은 유일한 성문

김해는 낙동강 하구 김해평야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옛 금관가야의 도읍지이다. 삼국시대에는 금관소경이 설치되었다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대체로 종3품 부사가 수령인 김해도호부가 설치된 지역이다. 금관가야의 중심지였던 역사적 배경과 우리나라 최대 성씨인 김해김씨의 본향인 까닭에 가야와 관련된 유적들은 많이 남아 있지만, 조선시대 유적은 그리 많지 않은 편이다. 현재 김해는 김해향교와 김해관아 객사 후원, 최근 복원된 김해읍성 북문이 남아 있다. 김해읍성은 고려말에서 조선초에 우리나라 남서해안에 출몰했던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쌓았던 읍성 중 하나로, 김해의 지리적 위치가 일본과 가까운 까닭에 상당히 견고하게 쌓았던 읍성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 16년에 석성으로 축조된 김해읍성은 둘레 4,4..

안성 죽주산성, 동문에서 북치성.포루까지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에 소재한 죽주산성은 고려시대에 죽주성이라 불렸던 곳으로 대몽항쟁기에 몽고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죽주산성이 있는 죽산면 일대는 지금은 안성시에 속해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안성과는 별개의 지역으로 종3품의 부사가 고을수령으로 있었던 제법 큰 규모의 고을이다. 죽주산성과 죽산도호부가 있는 이 지역은 지금도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가고 있으며, 청주에서 진천을 거쳐서 서울로 향하는 길과 충주에서 장호원을 거쳐 서울로 향하는 큰 길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이러한 지리적, 전략적인 중요성으로 인해서 이 곳에 산성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 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아마도 신라나 백제가 한강이남 주요지역에 국방을 위해서 처음 쌓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주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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