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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12

연천 경순왕릉(사적 244호), 경주로 돌아가지 못한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능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 나루터였던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다. 신라를 고려에 넘겨 준 마지막 왕으로 신라왕릉 중에서는 유일하게 경주에서 벗어난 이곳에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경순왕 사후에 경주에 묻힐려고 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경주지역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우려하여 운구행렬이 이곳 고랑포에서 막았고 이곳에 왕릉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경순왕릉은 고려와 조선시대 여러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관리가 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가 영조대에 조선시대 왕릉의 격식에 따라서 재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 왕릉이나 조선 왕릉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도 작고, 능표.양석.장명등.망주석 등의 석물 또한 간소하게 마련되었다. 경순왕릉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휴전선과 가까운 민통선..

경주 배리삼릉(사적219호)과 경애왕릉(사적222호), 신라 마지막 박씨 왕들의 능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리삼릉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8대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700여년의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외형의 봉분을 하고 있어서 그 신빙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곳이다. 가운데 신덕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은 2차례 도굴을 당하여 내부 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 무덤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을 하고 있으며, 벽면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어서 벽화가 없는 경주의 신라고분에서 벽화의 흔적이 처음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경주 나정 부근의 경주남산 서쪽편 기슭 아래에는 일성왕릉, 지..

경주 지마왕릉 (사적 221호), 신라 6대 지마왕의 능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 이후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돌아가며 계승하였으며, 내물왕대 이후 김씨의 왕위세습이 이어졌으며, 마지막 왕인 경순왕 이전인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이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왕들 중 김씨와 석씨 왕들은 경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반면에 박씨로서 왕위를 계승한 왕들은 대부분 초기의 왕들은 박혁거세 왕릉이 있는 경주 오릉에, 그 이후 6대 지마왕 이후 일성왕, 아달라왕과 통일신라말 3명의 왕들의 무덤은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남산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포석정이 신라 왕실의 연회장소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신라를 건국한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을 비롯하여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신라 지배계층 중 박씨들에게 의미있는 장소로 이와 관련이 있..

신라 헌덕왕릉(사적 29호), 경주 북천(알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왕릉

헌덕왕은 신라 41대왕(재위 809~826년)으로 난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헌덕왕은 원성왕의 손자로 39대 소성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의 안정기가 지나고 지배계층간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던 시기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안정화하고,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였다. 헌덕왕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웅주도독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동강 지역에 장성을 쌓고 국방을 강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헌덕왕 자신 또한 조카인 반란을 통해 조카를 죽이고 즉위하였던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반기 귀족세력간의 갈등을 이끌었던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헌덕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경주시 동천동 지역은 경주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알천) 북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북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문왕릉(사적 181호)과 통일신라말 혼란기를 보낸 효공왕릉(사적 183호)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김정명)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이 귀족들을 제압하고 통일이후 사회안정의 기반을 마련한 왕이다. 또한 최고교육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를 증진하는 정책을 펼쳐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대체로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에 비유되는 왕으로 귀족세력을 탄압하고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여러차례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대에는 9주와 주.군.현을 정비하는 등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관리에게 지급되던 녹읍폐지하여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켰다. 신문왕릉은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끝에 위..

신라 헌강왕릉(사적187호)와 정강왕릉(사적186호), 경주 남산 동쪽 통일신라 쇠퇴기 왕릉

경주 남산 동쪽편 통일전과 서출지 근처 북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헌강왕릉(사적187호)와 정강왕릉(사적 186호)이다.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던 괘릉 이후의 신라 왕릉과는 달리 소박한 느낌을 주는 통일신라 쇠퇴기 왕릉이다. 괘릉 이후에 정착되어가는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물과 둘레석의 십이지신상, 난간석 등 왕릉을 구성하던 장식은 보이지 않고, 서구의 신전 제단같은 상석도 단순한 장방형 화강석 석단으로 바뀌어 있다. 봉분에는 단순하게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둘레석을 둘렀을 뿐이다. 외형에 있어서는 신라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릉과 비슷하며, 복고적인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진흥왕릉 부근의 문성왕릉이나 헌안왕릉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헌강왕은 신라..

경주 신라 흥덕왕릉(사적30호), 통일신라 전성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왕릉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사적 30호로 지정된 신라 42대 흥덕왕릉이다. 이 왕릉은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인 원성왕의 괘릉과 함께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반영한 무덤으로 석물의 배치에 있어서 약간 다른면이 있지만 구성요소는 괘릉과 거의 유사하다. 왕릉은 둘레석을 두르고 있으며, 둘레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바깥에 난석이 둘러져 있다. 왕릉 중앙에는 전대나 후대의 왕릉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그리스.로마신전의 제단에서 볼 수 있는 큰 제단이 놓여져 있다. 석물은 왕릉입구임을 알려주는 화표석 1쌍, 문.무인상 1쌍, 2쌍의 사자상 중 하나가 없어진 3개의 사자상이 남아 있다. 특히, 무인석은 괘릉과 마찬가지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왕릉 앞쪽에는 비석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북..

경주 진평왕릉 (사적 180호), 수.당 교체기 신라를 안정적으로 이끈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신라 26대왕 (재위 579~632)으로 진흥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라 중흥기를 이끌었던 진흥왕 이후 신라가 삼국간 경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었던 선덕여왕대까지의 과도기를 이끌었던 국왕으로 재위 기간이 52년에 이른다. 고구려의 장수왕, 조선의 영조에 비견할 만큼 오랜 기간 왕위에 머무르면서 국가의 안정을 꽤했던 왕이다. 진평왕 재위기간동안에는 수나라와 고구려간의 전쟁으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는 등 국제적으로 격변기였다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진평왕은 국내젹으로 여러 관청을 설치하는 등 내정을 안정시키고, 명활산성과 남산산성을 쌓는 등 경주 방위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수나라.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삼국통일이 기틀을 마련하고 불..

경주 신무왕릉 (사적 185호), 통일신라 후기 왕위쟁탈전을 통해 왕위에 오른 신무왕의 능

신무왕은 원성왕의 증손으로 흥덕왕 사후에 희강왕과 상대등이었던 균정의 왕위쟁탈 싸움에서 패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에 숨어 있다가, 민애왕 2년(839)에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같은해 병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문성왕과 동생 헌안왕이 뒤를 이었다. 왕족간의 왕위쟁탈전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신무왕.문성왕.헌안왕대의 통일신라는 장보고의 난을 비롯하여 끊임없는 귀족들의 반란이 있었던 시기로 신문왕의 왕릉은 문무왕대 이래로 왕릉이 주로 조성되었던 일본과의 교통로가 할 수 있는 경주와 울산간의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지만, 문성왕과 헌안왕의 능은 지방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륙과의 교통로인 경주.대구간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신무왕릉은 높이 3m, 지름 16m로 흙으..

경주 효소왕릉 (사적 184호),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효소왕의 능

신라 32대왕(재위 692~702)인 효소왕은 신문왕의 큰 아들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손자이기도 하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관제를 정비하고 당.일본 등과 수교하였다. 이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하고,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어 경주의 시장을 활성화 시켰다. 동생인 성덕왕과 함께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효소왕릉은 경주 남쪽 불국사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생인 성덕왕릉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밑둘레 57m, 지름 15.5m, 높이 4.3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으로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았으나 지금은 몇개만 드러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가 도입되기 직전에 조성된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은 고분에서 비슷하게 ..

경주 성덕왕릉 (사적 28호),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성덕대왕의 능

성덕왕과 효소왕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손자이자 신문왕의 아들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국도와 철도가에 토함산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이 평지와 만나는 곳에 나란히 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문무왕대에는 왜(倭)의 침입에 대해서 상당힌 긴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무왕의 능을 동해 대왕암에 수중능으로 마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들인 신문왕과 손자인 효소왕, 성덕왕은 일본이 침입할 수 있는 예상 통로라고 할 수 있는 울산과 경주를 연결하는 큰 길가에 나란히 마련하고 있다. 성덕왕은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노..

경주 괘릉 (사적 26호), 신라 왕릉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춘 원성왕의 능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괘릉은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는 능이다. 원성왕은 혜공왕 16년에 상대등 김양상 (선덕왕)과 함께 김지정의 난을 평정한 후 그 공을 인정받아 선덕왕 즉위 후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원성왕으로 즉위하였다. 786년에 당나라에 조공을 하고 유교정치를 지향하여 독서삼품과를 두어 인재를 등용하고 김제 벽골제를 증축 농사를 장려하였다. 선덕왕과 원성왕대에 귀족들이 요직을 장악하고 그 들 사이의 권력투쟁을 통해서 왕위를 계승하는 통일신라 후대의 정치 혼란상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한다. 사적 26호로 지정된 괘릉은 12지신상으로 둘레돌을 돌린 원형봉토분으로 봉토 주위에는 수십개의 기둥을 세우고 난간을 설치했으며, 중앙에는 안상이 조각된 서역풍의 상석이 놓여 있다. 봉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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