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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회암사 4

양주 천보산 회암사, 무학대사 수도했던 옛 회암사 절터 뒷편에 있는 사찰

양주 회암사는 고려시대 인도이 승려 지공선사가 처음 지었으며, 나옹선사와 무학대사가 수도했으며, 태조 이성계가 머물기도 했던 회암사 옛 절터 뒷편에 위치한 크지 않은 사찰이다. 현재의 사찰을 중건한 것이 언제인지는 설명이 없어서 잘 알 수 없고, 그 위치는 옛 회암사를 창건하고 크게 부흥시킨 지공선사, 나옹선사, 무학대사 세분의 사리가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있다. 회암사는 대웅전, 조사당, 삼성각 그리고 강당이 있는 그리 크지 않은 규모로 국가의 지원을 받아 크게 융성했던 회암사 옛절터에 비하면 약간은 초라한 느낌을 주고 있다. 사찰 건물 또한 그 역사가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다. 원래의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함께 이 곳에 머물렀으며, 성종때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가 절을 크게 넓혔으며, 명..

전국 사찰 2010.09.30

양주 회암사 선각왕사비, 화재로 받침돌인 귀부만 남아 있는 나옹선사 부도 탑비 (보물387호)

양주 회암사 동쪽편에 있는 3기의 부도 중 제일 윗쪽에 위치한 나옹선사 부도에는 부도탑이 없어서 형식에 잘 맞지 않아 보였는데 그 탑비는 현재 회암사 서쪽편 언덕에 홀로 서 있었다. 나옹선사는 고려말 회암사를 크게 중창시킨 고승으로 그의 호칭은 나옹선사, 보제존자, 선각왕사로도 불리며 그의 사리탑은 이 곳 회암사 외에도 그가 입적한 여주 신륵사와 원주 영전사지에도 남아 있었고, 그의 영정이 신륵사 조사당에 모셔져 있다. 특히, 신륵사에 있는 사리탑은 조선전기를 대표할 수 있는 석종형 사리탑을 하고 있으며, 영전사지 사리탑은 부처을 사리를 모신 석탑의 형태를 하고 있다.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무학대사와 함께 국가적으로 존경을 받았던 고승이었던 같다. 양주 회암사에 있던 그의 부도탑비인 진각선사 왕사비는 최..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양주 회암사 동쪽 언덕에 있는 3기의 부도 중 제일 위쪽에 위치한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이다. 다른 부도와는 달리 앞쪽에 탑비는 남아 있지 않다. 나옹선사는 고려말 승려로 무학대사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으며, 양주 회암사를 아주 크게 중창한 인물이다. 나옹선사의 명성에 비해서 그 부도탑은 단촐하면서도 소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앞쪽에 있는 지공선사 부도탑과 함께 전통적인 고승의 부도탑 모양을 하고 있으나, 고려전기의 화려한 부도탑에 비해서는 조형미가 많이 떨어지는 것 같다. 아마도 고려말에서 조선초에는 전국적으로 부도탑을 만들 수 있는 조각가들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양주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 나옹선서 부도는 8각을 기본형으로 하고 있는 전통적이 부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받침..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홍융탑을 구성하고 있는 무학대사묘비로서 홍융탑 앞에 위치하고 있다. 비문에는 그가 원나라에 들어가 나옹선사의 제자가 된일, 한양천도에 역할을 한 일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원래는 태종 10년에 변계량이 지은 비문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나, 순조되 파괴되었다고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비석은 고려시대에 만든 많은 탑비에 비해서 제작수법이 많이 떨어지고 단순한 4각받침돌 위에 비석을 세워놓고 있다. 그 옆에는 원래 탑비가 세워졌던 이수가 놓여 있다. 양주 회암사 동쪽편 언덕 무학대사 홍융탑 앞에 세워진 탑비인 무학대사비. 무학대사 탑비는 4각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어 놓은 단순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후기에 훼손된 탑비를 새로 만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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