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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릉 53

여주 영릉(사적 195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합장릉

여주 영릉은 조선 4대 임금 세종과 정비 소헌왕후의 능으로,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1469년 여주로 이장하면서 세조 때 만들고 예종 때 선포된 『국조오례의』에 따라 병풍석과 석실제도를 폐지하고 회격으로 하는 조선 전기 능제의 기본을 이루었다. 능의 석물은 난간석에서 영저(靈杵), 영탁(靈鐸), 지초문양(芝草紋樣)을 배제하고 구름 문양과 십이지신상만 조각해 조선 왕릉 난간석의 기본을 확정하였으며, 혼유석을 받치는 북모양의 석물인 고석을 기존의 5개에서 4개로 줄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간 문자로 표현하였다.입지를 보자면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했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

여주 효종 영릉(사적195호),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조선 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인 영릉이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를 모신 영릉에서 북동쪽으로 700여m 정도 떨어진 남한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왕릉이다. 효종의 능은 원리 구리 동구릉 건원릉 서쪽편에 있던 것을 현종대인 16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당시 석물에 틈이 있어 봉분안으로 비가 샐 염려가 있다는 여론이 있어서 능을 옮기기는 했는데, 실제로 별 문제가 없어 이에 연루된 인사들이 면직을 당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산릉의 조성과 천장 등에 관련하여 세력간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왕릉은 왕과 왕비의 능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는 동원상하릉으로 효종 영릉이 최초의 사례이며 이후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이 이런 형태를 하고 있다. 단지 왕릉을 두르는 담..

남양주 홍유릉 유릉(사적207호), 조선왕조 마지막 순종의 능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한 조선왕조 마지막 왕이 순종과 순명효황후 민씨, 순정효황후 윤씨를 합장한 유릉이다. 순종이 승하한 1926년에 조성된 유릉은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원례는 새로 즉위한 왕이 국장을 주관하지만, 순종의 장례식은 당시 이왕직 장관이었던 민영기가 주관하였다. 기존의 왕릉과는 달리 황제의 예를 능을 조성한 홍릉과 거의 비슷하게 조성하였다. 왕릉의 석물들을 현대 조각상처럼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등 기존의 관례에서 벗어나 일제가 영향을 미친 부분이 많은 왕릉이기도 하다. 순종의 능을 조성한 이후 서울 광진구 유강원에 있던 순명효왕후를 함께 모셔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유릉의 조성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졌지만, 마지막으로 합장된 순정효황후가 해방 이후 1966년에 돌아가시면서 이곳에 ..

남양주 홍유릉 홍릉(사적 207호), 대한제국 황제의 능으로 조성한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황후 합장릉

홍릉은 조선 26대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능으로 남양주시 금곡동에 위치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성된 홍릉은 이전의 왕릉과는 달리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때문에 황제의 예를 따라서 능을 조성하였다. 홍릉은 기존 왕릉의 제사시설이었던 정자각을 없애고 대신 '-'형의 앞면 5칸짜리 침전을 세워 놓았으며, 능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대신 침전앞 참도 양쪽으로 문.무석인과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 석상을 순서대로 세워 놓고 있다. 참도도 기존에 어도와 신도의 2단으로 되어 있던 것을 3단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능역 입구에 위치해 있던 재실 또한 왕릉 바로 앞으로 옮겼으며, 그 규모 또한 상당히 큰 재궁을 조성해 놓고 있다. 홍릉은 1895년에 명성황후가 경복궁 건청궁에서 ..

서울 정릉(사적208호),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

서울 성북동 북악산 뒷편 자락에 위치한 정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이다. 태조는 신덕왕후가 죽자 능을 덕수궁 부근에 자신의 능역과 함께 조성하고 원찰로서 흥천사를 세웠다. 그런 연유로 원래의 정릉은 조선이 건국하면서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으로 고려 왕릉을 참조하여 조성하였다고 한다. 왕자의 난으로 등극한 태종은 정릉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석재 일부를 청계천 광통교를 보수하는데 사용하고 목재들을 태평관 건축에 사용하는 등 홀대하였다고 한다. 태종대에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되었기때문에 그 이후 오랜기간동안 일반 무덤처럼 관리되었다고 조선후기 현종대인 1669년에 송시열 등이 계청으로 신덕왕후로 복권되면서 종묘에 배향되고 현재의 모습으로 재조성되었다고 한다. 처음 정릉을 조성했..

김포 장릉, 인조의 아버지 추존왕 원종과 인원왕후 능

김포시 도심 뒷편 장릉산 자락에 위치한 장릉은 인조의 아버지인 추존왕 원종과 인원왕후 구씨의 능이다. 원종의 무덤은 원래 양주군에 있었는데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후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하며, 인원왕후의 무덤 또한 현 위치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것으로 원종의 무덤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장릉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 나란히 있는 쌍릉이며, 조선후기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장릉은 약간 경사진 언덕에 홍살문, 정자각, 봉분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자각 오른편에 비각과 수복방이 있다. 김포평야에 위치한 높지 않은 장릉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인조가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까닭에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능역이 넓고 깨끗하게 조성되어 있는 편이다. 왕릉 앞쪽에는 넓은..

구리 동구릉, 문조.신정왕후 수릉과 문종.현덕왕후 현릉

구리 동구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를 모신 건원릉 비롯하여,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 조선후기 중흥을 이끌어낸 영조를 비롯하여 아홉기의 왕릉이 모셔진 조선 최대의 능역이다. 동구릉에는 조선왕조가 처음으로 조성한 왕릉인 건원릉도 있지만, 사실상 마지막으로 조성한 왕릉인 수릉도 동구릉에 자리잡고 있다. 동구릉 입구에 위치한 수릉은 조선 24대 헌종의 아버지인 추존왕 문조와 신정왕후 조씨의 합장릉이다. 추존왕 문조는 순조의 맏아들로 효명세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정조 사후 권문세가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세도정치기에 세자로서 대리청정을 하면서 선정을 펼쳐서 좋은 평판을 받았던 인물이고, 그의 비 신정왕후 조씨는 대왕대비로서 흥선대원군을 후원하면서 고종을 왕위에 앉히고 안동김씨를 비롯한 세도가들을 억누르..

구리 동구릉 목릉,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

목릉은 조선의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같은 산에서 내려온 능성에 3개의 봉분을 따로 만던 동원이강능이다. 목릉은 조선 태조의 능인 건원릉 뒷편에 위치하고 있는데 선조의 원비 의인왕후 박씨의 먼저 조성되고 이후에 선조의 능이 조선된 것으로 볼 때 선조가 자신의 능을 태조의 능이 있는 동구릉에 자리잡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국력이 피폐했던 당시의 국가 경제 사정을 고려하면 측면도 있고, 국난을 극복하면서 제2의 창업을 했다는 의미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위치로 목릉이 옮겨진 것은 인조반정 이후 이곳에 인목왕후의 능을 조성하면서 선조와 의인왕후의 능도 이곳에 옮기면서 3곳을 합쳐서 목릉이라 칭했다. 이는..

구리 동구릉(사적 193호) 건원릉,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왕릉

동구릉(사적 193호)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408년에 승하하자 조성한 왕릉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역대 왕과 왕후의 능 9기가 조성되어 있는 곳이다. 동구릉에는 한 분만 모신 단릉, 두분을 모신 쌍릉, 한곳에 산줄기를 달리해서 모신 동원이강릉, 두분을 함께 모신 합장릉, 세분을 나란히 모신 삼연릉이 있어 다양한 모습의 왕릉을 볼 수 있다.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한 왕으로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비, 14대 선조와 왕비, 16대 인조의 계비 장령왕후, 18대 현종과 왕비, 21대 영조와 왕비, 추존왕인 문조와 왕비, 24대 헌종과 왕비이다. 조선시대에는 왕릉의 조성은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로 풍수지리설에 따라 심혈을 기울여 터를 잡는 것이 일반적이다. 동구릉에 왕릉이 조성된 왕은 대체로..

구리 동구릉, 조선 21대 영조 원릉과 인조 계비 장령왕후 휘릉

동구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9개의 왕릉의 조성된 조선 최대의 능역이다. 서울과 태조의 출신지라 할 수 있는 함흥간 교통로와 가까운 곳에 위치한 동구릉에는 태조를 비롯하여, 5대 문종과 왕후, 14대 선조와 왕후, 16대 인조의 계비, 18대 현종과 왕후, 20대 경종의 비, 21대 영조와 왕후, 추존 문조와 왕후, 24대 헌종과 왕후의 무덤이 한 지역에 모여 있다. 동구릉이 태조의 무덤이 있는 풍수지리상 명당이기는 하지만, 이곳에 왕릉을 조성한 왕은 영조를 제외하고는 강력한 왕권을 가지지 못했던 왕들이었으며, 대체로 당쟁 등이 심했던 시기의 왕들로 왕릉 조성에 대한 책임과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서 이곳 동구릉에 왕릉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구릉 안쪽에는 21대 영조..

구리 동구릉(사적 193호), 24대 헌종의 경릉과 20대 경종 비 단의왕후의 혜릉

구리 동구릉(사적193호)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 무덤을 중심으로 후대 왕들이 무덤이 계속 조성된 대표적인 왕릉이다. 동구릉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을 중심으로 총 9곳의 왕릉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태조가 죽은후 풍수지리설에 따라 하륜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5대 문종을 비롯하여 선조, 영조 등 여러 왕과 왕비들이 계속해서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시기에 따라서 동오릉, 동칠릉 등으로 불리다가 철종대에 헌종의 능이 조성됨으로서 9곳의 왕릉이 있는 동구릉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에 왕릉의 터를 잡는 것은 넓은 지역을 능역으로 조성하고, 풍수리지리상 길지가 적합한지는 이론적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고, 후대에 경쟁 정파의 공격을 받기 쉬운 까닭에 상당히 까다롭고 어려운 일이었다. 동..

연천 경순왕릉(사적 244호), 경주로 돌아가지 못한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능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 나루터였던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다. 신라를 고려에 넘겨 준 마지막 왕으로 신라왕릉 중에서는 유일하게 경주에서 벗어난 이곳에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경순왕 사후에 경주에 묻힐려고 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경주지역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우려하여 운구행렬이 이곳 고랑포에서 막았고 이곳에 왕릉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경순왕릉은 고려와 조선시대 여러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관리가 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가 영조대에 조선시대 왕릉의 격식에 따라서 재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 왕릉이나 조선 왕릉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도 작고, 능표.양석.장명등.망주석 등의 석물 또한 간소하게 마련되었다. 경순왕릉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휴전선과 가까운 민통선..

서울 헌릉(사적194호), 조선초기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조선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 남쪽편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헌릉은 조선 3대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능이다. 조선후기 정형화된 왕릉과는 달리 고려왕릉의 형태가 남아 있는 조선초기 왕릉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헌릉은 태종과 원경왕의 봉분이 같은 언덕에 조선된 쌍릉으로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 앞에 혼유석,장명등 등 석물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또한 세조 이후의 왕릉에는 잘 볼 수 없는 병풍석을 두르고 있어 조선 왕릉 중에서는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또한 왕릉 앞에는 조선후기와는 달리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태종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태조대에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종을 옹립하고,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는 종종을 이어..

서울 인릉 (사적194호),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위치한 조선 23대 순조의 능인 인릉이다. 외관상으로 하나의 봉분에 혼유석이 1개만 설치되어 있는 단릉으로 보이지만 순조와 순원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후기 왕릉의 일반적인 형태로 봉분에는 병풍석은 없이 난간석만 둘러싸여 있다. 석물 배치 또한 일반적인 왕릉과 큰 차이가 없는 정형화된 조선후기 왕릉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순조의 능은 파주 교하에 조성되었는데 풍수지리상 불길하다는 의견이 대두되어 철종대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순원왕후는 능이 이곳으로 이장된 이후에 합장되었다고 한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정조 사후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는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정조의 개혁적인 조치를 되돌리는 복고적인 정치분..

고양 서오릉(사적198호) 익릉과 대빈묘,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과 장희빈의 묘

고양시 신도동에 위치한 서오릉 중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 능과 한쪽편 구석에 위치한 장희빈의 묘소이다. 숙종은 원비로 인경왕후 김씨, 계비로 인헌왕후와 인원왕후를 두었고, 경종을 낳은 장희빈과 동이로 유명해전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 세자나 세자빈 등은 원, 약간 격이 낮은 경우는 일반인처럼 묘라고 불렀는데, 경종을 낳은 희빈 장씨는 대빈묘라고 불렀으며, 영조를 낳은 숙빈최씨의 무덤도 원래는 소령묘였는데 영조의 노력끝에 소령원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숙종과 왕비의 능을 배치한 것을 보면 당시의 정치상황이 상당히 많이 고려되어 있었는데, 당시 지배세력이었던 서인들의 입김이 많이 반영되어 인헌왕후는 숙종과 쌍분의 형태로 이루졌으며, 영조대까지 살았던 제2계..

고양 서오릉(사적198호) 경릉과 창릉, 세조의 두아들 덕종(추존)과 예종의 능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에 소재한 서오릉은 예종의 창릉과 숙종의 명릉을 비롯하여 많은 조선왕실을 능원이 조성된 곳으로 태조의 능이 있는 동구릉 다음으로 많은 능원이 있는 곳이다. 서오릉은 1457년(세조3)에 의경세자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세조가 풍수지리설에 따라 길지로 추천된 이 곳에 안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세조가 터를 잡은 곳으로 그의 맏아들인 덕종(추존)과 왕비,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과 왕비의 능이 근처에 자리잡고 있다. 서오릉 입구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경릉은 세조의 장남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덕종(추존)과 어머니로 인수대비로도 많이 불리는 소혜왕후의 능이다. 서오릉 안쪽에 위치한 창릉은 세조의 둘째아들로 왕위를 계승한 예종과 안순왕후의 능이다. 예종 또한 20세의 ..

고양 서오릉(사적198호) 명릉,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

고양시 신도동에 위치한 서오릉(사적 198호)은 구리의 동구릉과 함께 조선왕실 능묘 중 가장 큰 규모로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추존)과 왕비의 능인 경릉, 예종과 왕비의 능인 창릉, 숙종의 원비의 능인 익릉, 숙종과 계비의 능인 명릉, 영조 원비의 능인 홍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밖에 순창원, 수경원, 대빈묘 등이 있다. 대체로 예종.성종대와 영조대에 조성된 왕릉이라 할 수 있다. 이 곳에 능지로 선택된 것은 1457년 세조의 장남(성종의 아버지로 덕종으로 추존)이 죽자 이곳을 세조가 답사한뒤 터를 잡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릉의 면적은 약 51만평에 이른다. 서오릉에 모셔진 5곳의 왕릉 중 동쪽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는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인 인원왕후 김씨..

남양주 광릉(사적 197호),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된 세조와 정희왕후의 능

광릉수목원으로 더 잘 알려진 경기도 남양주시에 소재한 광릉은 조선 7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의 능이다. 광릉은 조선 왕릉의 표준을 제시한 능으로 세조의 유명에 따라서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통일신라시대 이후 왕릉과 귀족들의 무덤에 사용하였던 석실과 십이지신상 등을 새겼던 병풍석을 없애서 왕릉조성에 들어가던 경비를 크게 줄였다고 한다. 왕릉을 수호하는 것을 상징하던 12지신상 대신에 난간동자석주를 새기고, 석실은 회격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또한 능을 배치함에 있어서 정자각을 중심으로 왕과 왕비릉이 양쪽 언덕에 배치되는 동원이강의 형식이 처음 적용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선의 왕릉제도를 크게 바꾼 것으로 후대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다고 한다. 광릉을 지키는 원찰로는 근처에 위치한 봉선사가 있다. ..

경주 지마왕릉 (사적 221호), 신라 6대 지마왕의 능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 이후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돌아가며 계승하였으며, 내물왕대 이후 김씨의 왕위세습이 이어졌으며, 마지막 왕인 경순왕 이전인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이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왕들 중 김씨와 석씨 왕들은 경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반면에 박씨로서 왕위를 계승한 왕들은 대부분 초기의 왕들은 박혁거세 왕릉이 있는 경주 오릉에, 그 이후 6대 지마왕 이후 일성왕, 아달라왕과 통일신라말 3명의 왕들의 무덤은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남산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포석정이 신라 왕실의 연회장소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신라를 건국한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을 비롯하여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신라 지배계층 중 박씨들에게 의미있는 장소로 이와 관련이 있..

경주 일성왕릉 (사적 173호), 남산 신성아래에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무덤

경주시 탑동 남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능이다. 일성왕릉은 신라초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그 존재는 조선후기인 영조 6년(1730) 이후라고 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초기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던 왕들의 능인 경주 오릉과 비슷한 성격으로 정확한 조성내력이 알려지지는 않았고 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를 지냈다는 경애왕릉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성왕은 신라 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북방의 말갈족과 충돌이 있었으며, 농업을 권장하고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일성왕릉이 위치한 곳은 경주오릉에서 남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라 6촌 중 돌산고허촌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 신라가 멸망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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