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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21

상주 임란북천전적지, 임진왜란초기 관군과 왜군이 전투를 벌렸던 전적지

상주시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변에 자리잡은 임란북천전적지이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부산진과 동래에서 첫 전투를 벌이고 파죽지세로 북상하던 왜군에 맞서 조선 관군이 벌렸던 사실상 첫 전투를 벌렸던 곳이라 할 수 있다. 상주는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인 문경새재로 통하는 길과 충북 보은을 통해 청주를 거쳐 서울로 향하는 중요한 길목이라 할 수 있으며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성립된 이래로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에서 조선관군은 상주목 판관이었던 권길과 중앙에서 파견된 순변사 이일을 비롯하여 지역에서 봉기한 의병들이 힘을 합쳐 왜적을 막아보고자 했으나 전국시대 오랜 전쟁을 통해 단련된 왜군에게 크게 패하고 많은 이들이 순국하였다. 당시 이곳에서 참전하여 순절한 윤섬, 권길, 김종무, 박호, 김준신, 김..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전쟁의 기록과 기억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왜군이 부산지역으로 퇴각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강화회담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고 왜군은 다시 한번 대공세를 펼치며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정유재란 초기 왜군은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을 칠전량에서 궤멸시키고 육상으로는 진주성과 남원성 싸움에 승리한 후 호남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전세는 왜군이 직산현 전투에서 패배하고 수군 또한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 이후 전장은 부산,울산,사천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으며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이 퇴각하면서 임진왜란은 끝나게 된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조선,왜,명나라가 참전했던 세계대전 성격의 전쟁이었으며, 명나라는 전쟁에 소요된 많은 비용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지역박물관 2013.08.14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당시 수군의 활약과 명의 참전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많은 요인들로는 크게 수군의 활약, 명나라의 참전, 의병의 활약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임진왜란 극복에 가장 큰 역할을 했으며,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전략적 승리를 든다면 이순신 장군을 필두로 한 수군의 활약일 것이다.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한 이래로 파죽지세로 조선관군을 격파하고 한양과 평양성을 점령한 후 명나라 국경 근처까지 진출을 했지만, 길어진 보급선을 타파하고 호남의 곡창지역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수군이 서남해안 연안항로를 장악해야 했지만,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수군의 전력은 생각보다 강했다고 할 수 있다. 부산 수영에 주둔했던 경상우수영은 쉽게 왜군에 점령되었지만, 거제도의 경상우수영과 여수의 전라좌수영은 초반에 왜군과 접전을 벌이지 않고 기다..

지역박물관 2013.08.12

[진주박물관] 임진왜란에 활약한 의병

의병은 국가에 큰 난이 생겼을때 국강의 명령이나 징발에 의하지 않고 민간에서 자발적으로 군대를 모집하여 참전했던 오늘날 민병대에 해당하는 군대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의병은 삼국시대 호족을 중심으로 한 부대에서부터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을 이끈 독립군에 이르기까지 그 전통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의병의 활동과 역할이 가장 컸고 그 성과도 뛰어났던 시기가 임진왜란 7년동안의 전쟁기간이었을 것이다. 의병은 관군을 궤멸시키면서 파죽지세로 진격했던 당시 전쟁에서 왜군의 배후에서 소규모집단이 게릴라전을 통해 적을 혼란시키면서 왜군의 기세를 꺾고 후방을 교란시키면서 관군이 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은 전국각처에서 일어났는데 그 신분은 전직관료, 유생을 중..

지역박물관 2013.08.10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중의 무기, 천자총통(보물647호).현자총통(보물885호).지자총통(보물862호).중완구(보물858호)

삼국시대 가야유물을 주로 전시했던 진주박물관은 1998년 김해박물관이 개관으로 그 성격을 임진왜란 관련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하였다. 현재 진주박물관 임진왜란실에는 당시 역사와 주요 사건들을 보여주는 유물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 당시에 사용하였던 중요한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조선시대 사용했던 무기들은 전국적으로 많은 박물관.기념관 등에서 전시하고 있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진품은 육사박물관.해사박물관과 함께 진주박물관에서 많이 소장하고 있다. 상당부분은 임진왜란 당시 주요 격전장과 남해바다 등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라 할 수 있다. 주요문화재로는 천자총통(보물647호), 현자총통(보물885호), 지자총통(보물862호), 중완구(858호)가 있다. 16세기말 7여년에 걸쳐서 ..

지역박물관 2013.08.08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전쟁의 발발과 조선의 대응

진주성내에 위치한 국립진주박물관은 경남지역 선사시대와 가야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1984년에 개관한 박물관으로 1998년에 가야유물을 전시.연구하는 김해박물관이 개관됨에 따라서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상설전시실은 임진왜란실과 역사.문화실로 구성되어 있는데, 임진왜란실은 임진왜란의 시작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관련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일부 유물들은 복제품을 전시해 놓고 있기는 하지만, 임진왜란 기간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들로 역사박물관으로서 바람직한 모습으로 보인다. 임진왜란은 1592년 고니시가 이끄는 2만명의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부산진성을 공격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정발장군이 이끄는 부산진성은 관민이 합심하여 방어했지만 2시간..

지역박물관 2013.08.06

[부산박물관] 임진왜란 당시 무기와 부산지역 사람들의 항쟁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일본이 한반도를 침략한 전쟁이다. 당시 조선은 개국이래로 큰 전쟁이 없었고, 중종반정 이후 지배계층은 정통 성리학을 주창한 유학자들 중심의 관료주의 사회로 바뀌어 있었다. 반면에 일본은 오랜 세월에 걸친 내전을 종식하고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전국을 통일하였으며, 왜군은 내전동안 쌓은 전투경험이 많은 무장세력들이 국가적으로 잉여자원화되어 외부로의 분출이 필요했던 시기였다. 임진왜란은 고니시가 이끄는 병력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부산지역에서는 정발장군이 지키던 부산진성, 동래부사 송상현의 동래읍성, 다대진첨사 윤흥의 다대진에서는 왜군에 맞서 싸웠으나, 함락되었고 경상좌수영은 수사 박홍이 도망가면서 큰 저항없이 궤멸되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군사력..

지역박물관 2013.06.28

[부산박물관] 임진왜란과 부산

부산은 고려말 이후 왜구가 한반도 해안지역에 출발하여 약탈하면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국방상 그 중요성이 부각되었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 왜구를 토벌하는 등 강.온 양면으로 여러 조치를 취하면서 일본과의 교역을 위해 부산포, 염포(울산), 제포(진해)에 왜관을 설치하였다. 이후에 한반도 남해안은 일본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중종대에 일본이 삼포왜란을 일으키는 등 긴장관계가 조성되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이 임진왜란 전 조선수군의 전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무기의 개발 등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중기 내력의 산성이나 읍성 등은 전쟁에 대비하지 못하였으며, 각 지방의 군사체제와 전쟁에 대한 준비는 미흡했던 반면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했던 수군의 상황은 상대적으로 양호했던 것으로 보이..

지역박물관 2013.06.26

서울 동묘(보물142호), 삼국지 영웅 관우 장군 제사를 모시는 곳

서울 동묘는 삼국지의 영웅인 관우 장군 제사를 모시는 묘로서 중국에서는 공자의 제사를 모시는 묘인 대성전 만큼 인기가 좋은 곳이지만 우리나라에는 많지 남아 있지 않아서, 이 곳 서울의 동묘가 거의 유일한 곳이라 할 수 있다. 동묘를 짓게 된 이유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나라가 왜군을 물리치게 된 까닭이 성스러운 관우 장군께 덕을 입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서 인데, 명나라의 왕이 직접 액자를 써서 보내와 공사가 이루어졌다. 동묘는 선조 32년(1599)에 짓기 시작하여 2년 뒤인 1601년에 완성되었다. 서울에는 동.서.남.북 4곳에 지어졌으나 지금은 동쪽편에 지어진 동묘만이 남아 있다. 동묘에는 관우와 그의 최측근인 관평, 주창 등 4명의 상을 모시고 있다. 동묘는 조선중기에 세워진 중국풍의 건물로 우리나라..

궁궐_종묘 2013.05.22

해사박물관, 임진왜란때 사용한 중완구(보물859호)를 비롯한 무기류와 안중근 의사 유묵(보물569호)

진해 해군사관학교 앞 바닷가에는 해군과 관련된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는 해사박물관이 있다. 2개층으로 이루어진 박물관에는 해군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된 1층과 대한민국 해군 창설이래 주요한 발자취를 보여주는 물품들이 전시된 2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곳 해사박물관에는 많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보물 859호로 지정된 조선시대 화포인 중완구와 구한말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의사 유묵(보물 569호)이 있다. 이 외에도 해군에서 임진왜란 주요 해전이 벌어진 남해안 일대에서 발굴한 당시에 사용한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 등 다양한 수군의 무기류들이 전시되어 있다. 충무공의 행적과 관련된 고문서들과 명나라 황제로부터 받은 팔사품은 ..

지역박물관 2012.04.27

거북선(龜船), 원형과 가장 가깝게 복원된 해군사관학교 선착장에 정박되어 있는 거북선

거북선(龜船)은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만들오 왜적을 물리치는데 큰 공헌을 한 거북모양을 하고 있는 배이다. 거북선은 고려말 또는 조선초에 이미 만들어져 사용되었던 것으로 많은 문헌상에 남아 있으나, 임진왜란 만들어진 창제귀선이 최초의 철갑선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해전에서 돌격용 전함으로 만들어진 거북선은 기존 조선수군의 주력함선인 판옥선을 개량하여 상판에 철갑을 두르고, 거북머리를 하고 있는 형태로 임진왜란 초기에 선봉함으로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이때 만들어진 창제귀함은 그 형태나 제작방법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현재 복원되어 있고, 널리 알려져 있는 거북선은 정조대에 쓰여진 '이충무공전서'에 그림으로 묘사된 전라좌수영에 있는 귀선으로 원래의 창제도선인과 같은지는 잘 알려져 ..

고성 당항포 바다, 임진왜란때 왜의 수군을 대파한 당황포해전 격전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을 상대로 사실상 첫번째로 큰 승리인 당항포 해전이 있었던 당황만 바다이다. 당항만은 거제도와 내륙사이에 있는 진해만에서 서쪽 고성읍 방향으로 들어와 있는 호수에 가까운 바다이다. 한반도에 고대국가가 형성된 이래로 한.중.일을 이어주던 연안 해상교역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삼한시대와 가야연맹체 시절에는 고대국가인 소가야가 고성읍에 자리잡게 해 주었던 지형적 잇점을 갖고 있는 바다이다. 당항만은 진해만과 연결되는 폭 300m 정도의 좁은 해협에서 시작해서 내륙의 회화면과 바다쪽 반도인 동해면 사이로 고성읍까지 길이 10 km, 폭 2 km 정도의 호수처럼 잔잔한 내해를 이루고 있는 바다이다. 지금은 선박의 규모가 크고 항해기술이 발달했기때문에 먼바를 쉽게 오가지면 고대사..

한국의 풍경 2011.08.31

[중앙박물관 조선실] 조선의 대외교류와 임진왜란

조선 전기 동아시아는 명나라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북방의 몽골과 여진, 한반도의 조선 그리고 일본이 존재했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상당히 안정적인 국제 질서 속에는 조선은 명과 조공책봉관계를 기본으로 교류를 하였고, 고려시대 이후 한반도와 중국 해안을 괴롭혀 왔던 일본은 조선이 대마도 정벌 등의 강격책과 삼포개항 같은 회유책을 함께 사용하여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일본의 혼란기인 전국시대가 토요토미히데요시가 통일하고 한반도를 침범함에 따라 동북아 질서가 상당히 혼란스러워졌으며, 조선과 명나라는 상당한 국력을 소비하고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경향이 발생했으며, 북방에서는 여진족이 청나라가 등장하여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당시 조선의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

중앙박물관 2010.12.24

남원성, 정유재란때 왜군과 큰 전투가 있었던 읍성 (사적298호)

정유재란 당시 남원전투는 당시 왜군이 전북 남원성을 공격해 조.명 연합군과 전투를 벌린 것으로 각지의 의병들과 군민들이 합세해 벌린 큰 전투였으며, 결국 왜군에 패해 모두 살했당했으며, 그당시 살해당한 관민 일만명의 무덤이 남원에 있는 만인의총이다. 당시 왜군은 칠전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격파하고 육군도 구례를 함락시키고 남원성으로 총진격하였으며 왜군의 수가 오만이 넘었다고 한다. 당시 남원성은 경상도에서 호남지역을 거쳐서 서울로 북상할 수 있는 길목에 해당되기 때문에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3,000명이 파견되었고 각지제서 관군들과 의병들이 모여서 일만이 넘는 민.관이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5만이 넘는 왜군의 주력부대와의 싸움에서 작은 읍성으로는 지키기 어려웠기때문에 남원성에 있었던..

아산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역

현충사 인근에 위치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입니다. 충무공의 묘소는 이순신 장군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신 후 여러 차례의 이장을 거친 후 이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동안 성역화된 묘소답게 주위에는 울창한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입구에는 충무공을 기리는 신도비와 정조대왕이 친히 작성한 신도비도 같이 있습니다. 또한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보이는 연못도 있습니다. 하지만 충무공 후손이 번창하지 않은 것으로 봐서는 흔히 말하는 명당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산 현충사 인근에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소입니다. 충무공의 묘소는 현충사 경내에 있지 않고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옛날부터 관리가 잘되어서인지 주변에 소나무 숲이 울창합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묘역 입구입니다..

명황제가 충무공에 내려준 수군도독인과 팔사품 (충렬사)

통영 충렬사가 의미를 갖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난중일기와 함께 충무공 유품 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유품인 팔사품을 보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팔사품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이 충무공의 전공을 명황제 신종에 보고하자, 감동한 신종이 충무공에 내린 8종류의 특별한 물품으로 삼국지 등에 많이 등장하는 도독인을 비롯하여,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입니다. 당시에도 충무공의 전공은 상당히 뛰어났고 임진왜란 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때 명나라 황제 신종이 충무공에게 내린 팔사품 중에서 제일 눈에 띄는 동으로 만든 도독인입니다. 삼국지 등에서 말로만 듣던 도독인을 실물로 보니까 생각보다 크고 ..

지역박물관 2010.09.10

견내량 - 남해안 연안 수로의 중요 길목

견내량은 남해안 거제도을 들어가는 길목에 있는 해협이다. 이 곳은 진도를 들어가는 명량이나 남해를 들어가는 노량에 비해서 해협의 폭은 비슷하나 물살이 빠르지는 않은 곳이다. 이 곳의 중요성을 알려면 거제도에서 외도를 가는 유람선을 타보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견내량은 물살이 빠르지 않고 거제도가 외해를 막고 있기 때문에 파도도 거의 없는 곳이다. 만약 부산에서 서해로 갈려고 하면 거제도를 외해오 돌아 가던지 아니면 이 견내량을 통과 해야만 한다. 하지만 거제도 외해를 통해서 갈려면 거리도 아주 멀고 파도가 매우 심하다. 그래서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이 견내량을 굳건히 지킴으로써 전세를 바꿀 수 있었다. 지금의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됐지만 조선시대 당시의 환경으로는 이 견내량이 연안해로..

한국의 풍경 2010.02.10

부산 동래성 - 동부 경남의 오랜 중심지

일본으로 가는 관문에 위치한 주요 행정중심지였던 동래를 지키던 성입니다. 동래는 지금의 부산항을 포함한 해안에서 10Km 이상 떨어진 곳에서 이 지역을 관장하는 행정적 중심지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과의 통상은 부산항 근처에서 이루어지고, 주민 통제는 동래성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동래성은 상당히 큰 규모의 도심을 성벽으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 규모는 조선후기 정조가 쌓은 수원 화성의 규모와 비슷합니다. 아마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그렇게 쌓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근처에 금정산성이 있어 동래성과 협력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여 동래성에서 부산포를 통제 관리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임진왜란때 동래 부사 송상현이 왜군과 혈투를 벌렸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무너졌는지 의..

임진왜란때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던 순천 왜성(倭城)

순천왜성은 국내에 있는 왜성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본래의 모습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는 왜성입니다. 정유재란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이 호남을 공략하기위한 기지로 삼기위해 토석성입니다. 성벽을 쌓은 돌의 크기나 모양이 우리나라의 성벽과는 다르고 일본 각 지역에 있는 성들과 비슷합니다. 순천왜성 전체도 내성과 외성의 형태로 여러단계의 방어를 위한 성벽이 있는 것이 전형적인 일본 성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장 소서행장(小西行長)이 이끈 1만 4천여명의 왜병이 주둔 하여 조·명연합군과 두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성에서 동쪽 광양만 쪽을 멀리 보면 이순신 장군께서 전사하신 노량해협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하고 광양제철소의 웅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일본고유의 양식으로 쌓은 순천왜..

나고야성 - 일본3대 성곽

나고야성은 일본 전국시대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오다노부나가의 근거지이자, 임진왜란 당시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있던 성이다. 토요토미는 후일 근거지를 오사카로 옮기지만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를 계승하여 나고야 지역을 근거지로 하고 있었다. 나고야성을 직접 가 보지는 않았지만, 일본의 3대 성에 속하기때문에 관련 사진을 올려봅니다. http://rds.yahoo.com/_ylt=A0S0200OisJHytoAXgujzbkF/SIG=123cjqp0r/EXP=1204018062/**http%3A//www.flickr.com/photos/zhzheka/290243397/ 나고야성의 성벽: 우리나라의 양식과는 다르고 순천왜성의 양식과 같다고 보면 됩니다. http://rds.yahoo.com/_ylt=A0S02011is..

기타 2009.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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