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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 15

여주 효종 영릉 재실 (보물 1532호)과 세종 영릉 재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재실과 비슷한 건물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조선이 들어서 왕릉을 세우고 유지하기 위한 규범인 산릉제도에 재실이 포함되면서 능역뿐만 아니라 일반 사대부에서도 조상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재실을 짓기 시작하였다고 할 수 있다. 재실 건물은 외형상 일반 가옥과 비슷하면서도 많은 사람이 참석하기 위한 공간으로 넓은 대청마루, 마루와 연결되어 같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는 온돌방,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음식을 준비하는 부엌 등으로 이루어진다. 선현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나 문묘에 딸린 강학공간 또한 재실의 기능을 확대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을 조성하고 유지하기 위한 산릉제도에 따라 재실은 홍살문 바깥쪽 ..

담양 몽한각,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건물

담양군 창평 삼지천 마을에서 동쪽으로 도로를 따라서 자동차로 10여분을 가면 대덕면소재지인 매산리마을이 있고, 마을 안쪽에는 구한말에 지어진 큰 재실건물인 몽한각을 볼 수 있다. 몽한각은 태종의 5대손으로 종종대에 이곳 창평으로 유배되었다가 이곳에 정착하여 살았던 인물인 이과를 위해 지어진 재실이다. 이과는 중종대에 창평에 정착했지만, 몽한각은 비교적 늦은 시기인 19세기초에 지어졌다. 건물은 앞면 5칸의 꽤 큰 규모의 건물이며, 재실 오른편에 앞면3칸 규모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건물을 두고 있다. 솟을대문과 기와를 얹은 돌담장으로 둘러싸인 몽한각은 마당이 꽤 넓은 것으로 볼 때 예전에 여러동의 건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담양 몽한각, 전남 담양군 대덕면 매산리 이 건물은 이서 공의 재실이다. 이..

남양주 홍릉.유릉 재실, 기존 왕릉 재실보다 크게 지어진 재실

조선왕조 마지막 왕이자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과 순종의 능인 홍릉과 유릉은 기존의 조선왕릉과는 많은 면에 다른 점을 보인다. 가장 큰 변화는 제사시설이었던 정자각 대신 궁궐 정전과 비슷한 침전이 들어서 있고, 봉분 주분에 있던 문.무석인 등 석물 또한 침전 앞으로 옮겨졌다. 또한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참도는 2단에서 3단으로 바뀌었으며, 정자각 오른쪽으로 연결되던 것이 침전 가운데로 직접 연결된다. 석물은 석양과 석호가 빠지고 대신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이 참도 양쪽에 도열해 있다. 이는 기존 왕릉이 제후의 능이었다면, 대한제국 황제의 능으로 중국 명나라 황제릉을 참조하여 조성했기 때문이다. 왕릉을 지키는 관리들이 머무는 공간이자 능을 참배하기 위해 왕이 머물던 공간이었던 재실도 기존..

구리 동구릉 재실, 제사를 준비하는 공간이자 능참봉이 근무하던 곳

구리 동구릉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능을 중심으로 9기의 왕릉이 모여있는 조선 최대의 능역이다. 이곳은 풍수지리설에 따라서 북쪽의 검암산을 주산으로 태조의 건원릉을 모셨으며, 그 후 문종, 임진왜란을 극복한 선조, 조선후기 중흥기를 마련한 영조를 비롯하여 현종, 헌종, 효명세자로 불린 추존왕 문조 등의 능이 조성되어 있다. 동구릉은196ha의 넓은 면적에 9기의 왕릉이 모여 있기때문에 원래는 각 능마다 정자각 앞에 능지기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인 수복방을 두고 있었으나, 구한말을 거치면서 입구의 재실에서 그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실은 원래 무덤이나 사당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지은 집을 말하며 삼국시대 시조묘나 신궁제도에서 그 기능이 유래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유학이 사회전반의 지배..

논산 모선재(慕先齋), 조선중기 유학자 김장생의 선조를 모시기 위한 재실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는 조선중기 기호지방 유학자를 대표하는 사계 김장생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재실인 모선재(慕先齋)이다.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한옥으로 전통 한옥 건물 중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는 형태 중 하나이다. 이 재실은 18세기에 후손들이 세운 것으로 인근에 있는 사계 김장생을 모신 돈암서원이 지어진 이후에 그의 조상들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것으로 보인다.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의 민도리집 한옥으로 오론쪽 1칸은 부엌, 가운데 2칸은 온돌방, 왼쪽 1칸은 대청마루를 하고 있으며,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있다. 건물 왼쪽에 앞편 3칸의 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진 별도의 건물이 있고, 출입문 솟을대문 양쪽은 광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

경주 오릉 숭덕전,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

경주에는 신라 왕위에 오른 김씨, 박씨, 석씨의 시조격에 해당하는 왕을 모신 재실로 오릉에 박혁거세를 모신 숭덕전, 미추왕릉 앞쪽에 미추왕,문무대왕,경순왕을 모신 숭혜전, 탈해왕릉 앞에 숭신전이 있다. 그 중 숭덕전은 신라시조 박혁거세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재실건물로 조선시대부터 존재해 왔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대에 지어진 것이라고 한다. 건물로는 박혁거세왕을 모신 숭덕전과 그 앞쪽에 상현재와 동재가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 성격의 건물 여러동을 두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곳에 능을 관리하는 능참봉을 두었다고 한다. 숭덕전 뒷편으로는 연못이 있고, 그 뒤편에 박혁거세왕의 비가 태어났다는 우물인 알영정이 있다. 건물의 규모는 김수로왕릉이 있는 김해에 비해서 크지는 않은 것 같다. 조선시대 ..

경주 도봉서당, 서원 형식의 재실

태종무열왕릉과 진흥왕릉이 위치한 경주 서악동 마을에 소재한 도봉서당이다. 서당이라는 이름에서 조선시대 초급 교육기관을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서원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원래 학문적으로 뛰어난 업적을 남긴 선현들을 모시기 위해서 후학들이 세운 사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립교육기관에서 출발했다. 대부분의 초기 서원들은 학덕과 지역에 기반을 갖춘 인물이 운영하던 서당에서 출발해 그를 모신 사당을 설립하고 국왕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발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학문적 업적보다는 문중 인물을 모신 사당을 중심으로 서원이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이런 서원에서는 문중사람들이 모여 지역 여론을 형성하고 붕당정치의 지역기반이 되기는 폐단을 낳기도 한 것이다. 조선후기 서원의 남설로 세금의..

고성 육영재, 학동마을에서 세운 재실

아름다운 담장으로 유명한 고성학동마을의 전주 최씨 집안에서 세운 재실인 고성 육영재이다. 원래는 초가 건물로 1723년에 세운 것을 1845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고쳐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 재실은 본관, 사랑채, 곳간채와 솟을대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작은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재실로서는 부지가 넓고 건물 규모도 큰 편에 속하는 건축물이다. 재실은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지은 집으로 제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숙식을 하고, 음식 장만을 하기 위한 공간이다. 조선시대 왕릉에서 국왕이 제사 준비를 하기 위해 숙식을 하던 산을제도가 권문세가를 비롯한 사대부 집안으로 확산하면서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주로 시제를 준비하거나 끝난 후 음복을 하거나 문중회의를 하는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달성 도곡재, 사육신 박팽년 후손들이 모여사는 묘골마을 고택

달성 묘골마을은 낙동강 동쪽 칠곡군과 경계가 되는 하빈면에 자리잡고 있는 전통마을로 사육신 중 한분인 박팽년 후손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사육신 후손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박팽년의 손자 박일산이 외가의 재산을 물려받아 가문을 이루었다고 한다. 마을의 규모는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재력이 풍부했던 마을답게 사육신을 모신 사당인 육신사를 중심으로 대부분 큰 한옥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달성 묘골마을은 양반들이 모여살았던 마을로 큰 한옥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오래된 한옥은 잘 보이지 않고, 사당인 육신사 근처에 있는 재실로 사용되었던 건물인 도곡재가 눈에 띄게 오래되어 보인다. 이 건물은 대사성을 지낸 박문현이 1778년(정조2)에 주택으로 건립하였던 것을 19세기에 도곡공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하였다고..

고택_정원 2011.08.24

원주 김두한 가옥, 조상묘를 관리하기 위한 재실

원주시 문막읍 건등리에 위치한 '김두한 가옥' 이라고 이름 붙여진 한옥 건물이다. 이 가옥은 260여년전 원주 목사를 지낸 김탄행의 묘를 관리하기 위한 재실건물이라고 한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ㅁ'자형을 이루고 있는데, 중앙에 넓지 않은 마당을 두고 있다. 'ㄱ'자형으로 된 안채는 넓은 부엌과 대청마루, 3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쪽에는 대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사랑채를 두고 오른쪽에는 문간채를 두고 있다. 마당 안쪽에는 방이 2개있는 앞면 3칸짜리의 작은 부속채를 두고 있다. 이 가옥은 제사를 비롯하여 집안 행사를 위해서 만든 건물로 주택과는 달리 형식적인 내용은 배제하고, 행사때 일을 보는 사람들의 동선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제사를 준비하는 넓은 부엌이 건물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

포천 인평대군 묘 및 신도비, 치제문비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에 위치하고 있는 인조의 셋째아들이며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묘이다. 인평대군은 병자호란 후 청나라 심양에 인질로 갔다고 돌아왔으며, 효종때에는 4차에 걸쳐서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병자호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많은 헌신을 한 인물이다. 왕자의 신분이지만 묘역은 규모있게 잘 정비되어 있고, 지금까지도 묘역에 재실과 관리인이 남아 있다.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학문도 깊었다. 묘역 앞쪽에는 거북이수에 몸돌을 올려놓은 잘 만들어진 신도비가 있고, 옆쪽 비각에는 효종,숙종,영조,정조.순조의 글씨가 새겨진 치제문비가 있다. 그 중 비각안에 있는 치제문비는 2기가 있는데 1기는 효종의 지은 제문과 그 후에 숙종이 직접 짓고 쓴 제문이 새겨져 있다. 또한 다른 한쪽은 정조때 영..

남산골한옥마을, 제기동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안채

이 집은 제기동에 있던 순종의 장인이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1906년 동궁 계비로 책봉되어 창덕궁으로 들어갈때 즈음에 지은 재실이라고 한다. 이 재실을 주로 순종이 제사지낼때 사용했던 재실이라고 하는데, 국왕이 윤택영의 집에 제사를 지내러 올 일은 없었을 것이고, 근처에 있었든 명성황후의 능이었던 홍릉에 들릴때 사용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900년대 초에 지어진 한옥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등지고 있는 형태를 하고 있으며 건물 뒷편에 사당이 있다. 구한말 채무왕으로 악명높았던 윤택영이 동궁 계비 간택을 위한 로비 목적으로 이 건물을 지은 것으로 보이며, 돈을 물쓰듯이 썼던 윤택영이 상당히 크고 화려하게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형이 첩을 위해서 지었던 옥인동 윤씨가옥과 나란히 한옥마을을 지..

인천 원인재, 인천이씨 중시조 이허겸의 묘 앞에 세운 재실

인천 남쪽 송도신도시로 향하는 대로변에 잇는 웅장한 저택처럼 보이는 한옥 건물이 있어 찾아 보았다. 이 곳은 인천이씨의 중시조인 이허겸을 묘를 지키는 재실로 원인재를 비롯하여, 돈인재, 승휴당, 명인사, 율수실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원인재가 재실 건물이었던 것 같고 나머지은 세운지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다.그리고 조선시대에 재실에 큰 건물들이 여러동 있는 경우도 많지 않은 것으로 봐서 최근에 만든 건물로 여겨진다. 인천이씨는 김해허씨에서 갈라져 나간 성씨로 알려져 있으며 고려시대 이래로 인천지역 토호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고려시대에 외척으로써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으며, 대표적인 역신인 이자겸 또한 인천이씨라고 한다. 원래부터 있었던 건물로 추정되는 원인재는 앞면 4칸 규모의 전형적인..

선정릉 제사 준비를 하던 재실

선정과 정릉 중간에 위치한 재실은 두 왕릉의 재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원래는 선릉과 정릉에 각각 재실이 있었으나, 구한말에 통합되어 하나의 재실만 두고 있다. 일반적으로 재실은 왕릉 입구 낮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나 이 곳을 침수피해가 많은 곳이라서 언덕 위에 재실을 조성해 놓고 있다. 재실은 중앙에 제사에 참석한 왕이 휴식할 수 있는 사랑채같은 건물이 있고, 여러개의 방과 창고로 이루어진 행랑채가 담장을 이루고 있다. 숲손 언덕에 위치한 재실. 여러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행랑채와 사랑채처럼 생긴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재실은 제사준비를 하는 곳으로 실제 제사를 이 곳에서 지내지 않는다. 재실 중앙에 있는 건물. 앞면4칸의 건물로 왕이 왕릉에 제사를 지낼때 잠시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재실은 일반 민..

조선 관아 2010.10.06

[화성 행궁] 화령전 풍화당(재실), 전사청, 내삼문, 외삼문

화성행궁 화령전은 정조대왕 어진을 모신 운한각을 중심으로 부속 건물로 재실인 풍화당, 화령전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전사청이 있으며, 전주의 경기전과 마찬가지로 외삼문과 내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풍화당과 전사청은 건물이 크지 않으면서 소박하고 경건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내.외 삼문 또한 장식성이 거의 배제된 경건한 분위기이다. 화령전 풍화당은 재실로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와서 머무는 건물이다.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이다. 전사청은 화령전을 관리하는 관리들이 업무를 보는 건물로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한 건물로 보인다. 화령전 내삼문 화령전 내삼문 안쪽에는 삼도가 있고, 바깥쪽에는 신도만 있다. 화령전 내.외삼문에는 혼령이 드나들 수 있도록 큰 틈을 두고 있다..

궁궐_종묘 2010.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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