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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족산성 8

강화 전등사, 사찰 경내로 들어가는 길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때 창건된 사찰로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하나라고 하나 실제로 명확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정족산성이 삼국시대 고구려 산성의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창건 연대가 근거없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조선시대 전등사는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인 선원보를 보관하던 정족산 사고를 지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전등사는 정족산성과 역사를 같이했다고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정족산성과 함께 하고 있는 전등사의 입지조건에서 알 수 있듯이 전등사 들어가는 길은 정족산성 성문을 통해서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정족산성에는 동.서.남.북으로 4개의 성문이 있는데 주로 출입하는 문은 정문격인 남문과 동쪽편 언덕에 위치한 동문이었다. 지금도 전등사를 들어가는 길은 큰 주차장이 있는 남..

전국 사찰 2012.03.27

강화 전등사 극락암, 향로전을 비롯한 요사채들

전등사는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자리한 사찰인 까닭에 전통과 역사에 비해서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은편이다. 부처를 모시는 불전으로는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약사여래를 모시는 약사전, 최근에 많이 볼 수 있는 크게 지어진 지장보살을 모시는 명부전이 있다. 불전들은 크지는 않지만 아담하면서 화려하게 꾸며져 있는 편이다. 주위의 우거진 수목들과 잘 어울리는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불전에 비해서 사찰에서 수행하는 승려들과 이 곳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머무는 요사채는 꽤 규모가 크고 많은 편인데, 대체로 최근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왕실과 관련이 되어 있고, 정족산 사고가 있어 이 사찰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 요사채를 많이 두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며, 최근에도 템플스테이 등을 위해서 ..

강화 정족산사고, 조선왕조실록과 왕실족보를 보관하던 곳

사고(史庫)는 고려와 조선시대에 당대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과 국가적으로 중요한 서적이나 문서를 보관하던 곳이다. 고려는 개국 직후부터 사관을 두고 실록을 편찬했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모두 소실되고 고종대인 1227년부터는 개경 이외에 한부를 해인사에 보관하였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개경의 사고는 한양으로 옮겨 춘추관으로 개칭하고, 충주에서 실록보관소를 두었다. 세종대에는 사고의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경상도 성주, 전라도 전주에 별도의 사고를 설치하여 충주와 함꼐 3대사고를 두었다.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자 고려의 전례를 참조하여 묘향산, 오대산, 태백산, 적상산의 4곳에 두었다. 청나라의 위협이 증대했던 인조대에는 묘향산 사고를 강화 정족산으로 옮겼다. 이는 실록 등 중요한..

조선 관아 2012.03.05

강화 전등사 대웅보전(보물178호),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진 고풍스런 건물

보물 178호로 지정된 강화 전등사의 주불전인 대웅보전이다. 앞면 3칸, 옆면 3칸으로 큰 규모의 건축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단정한 외형에 정교한 조각장식으로 꾸며져 있다. 조선 중기인 광해군13년(1621)에 지어진 건축물로 이 시대를 대표하는 건축물 중 하나이다. 건물내부에는 불단 위로 화려한 닫집이 꾸며져 있으며, 천정 주변으로 연,모란,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어 있다. 건므이 기둥은 대체로 굵은 편이며, 모통이 기둥은 높이를 약간 높여서 처마끝이 들리도록 하고 있다. 이 건물은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주고 있는 곡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건물의 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절을 짓던 목술ㄹ 배반하..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남문인 종해루와 주변 성벽, 양헌수 승전비

정족산성은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능선을 따라서 연결한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으로 산성의 방향은 강화해협(염하)를 바라보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지금은 정족산성 동쪽편으로 넓은 간척지 평야가 펼쳐져 있지만, 원래는 넓은 갯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해안을 따라서 구축한 돈대와 함께 강화도 남쪽 해안과 연안 해로인 강화해협을 감시하고 지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산성으로 생각된다. 이 곳은 오랜 옛날부터 천혜의 요새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정족산 사고가 산성내에 설치되어 있다. 정족산성의 주출입문은 남문으로 실제로는 산성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계곡의 시냇물이 흘러 내려가는 방향이다. 일반적인 산성과는 달리 평지와 비슷한 고도에 성문이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과도 상당..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서문에서 동남쪽 치성(雉城)까지

강화 정족산성은 둘레 약 1km로 주산인 해발 220m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전등사와 정족산사고가 있는 계곡을 에워싸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이 산성을 처음 쌓은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성벽을 축조하고 있는 석축의 형태 등으로 유추해 볼 때 고구려 산성의 특징을 하고 있다. 정족산성에는 주출입문인 종해루가 있는 남문을 중심으로 동문, 서문, 북문을 두고 있다. 남문에는 문루를 두고 있고, 북문은 암문의 성격을 갖고 있다. 정족산성 서문은 조선후기 강화 해안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조직인 진.보 중에서 강화도 남쪽 해안을 지키는 돈대를 관장하던 선두보가 위치하고 있다. 방어상 취약지역인 남문과 동문과는 달리 서문은 선두보와 연결되는 출입구이자, 바다와 가장 가까운 연결로이..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정족산(해발220m) 정상 부근 성벽

강화 정족산은 해발 220m로 그리 높지는 않지만 높은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정상부에 올라서면 사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실 지금은 많은 간척이 이루어져서 강화도에 넓은 농토가 많지만, 원래는 드넓은 갯벌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족산 정상에 올라서면 북쪽으로는 고려시대 왕릉들이 있는 진강산이 보이고 그 사이에 넓은 평야가 들어서 있다. 서쪽편으로는 강화도의 명산이라고 할 수 있는 마니산과 그 너머로 석모도와 서해바다가 보이고 동쪽편으로는 강화해협과 문수산성, 김포지역이 한눈에 들어오고 남쪽편으로 길상산과 산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정족산성은 삼국시대부터 존재해 왔던 산성으로 강화해협(염하), 한강하구, 서해안 연안 항로를 지키는 전략적으로 중요했던 요지였던 것으..

강화 정족산성(삼랑성), 강화해협(염하)가 내려다 보이는 동문에서 북문까지

강화도 전등사가 있는 정족산성은 그리 높지 않은 해발 220m의 정족산을 중심으로 3개의 봉 우리가 솥다리처럼 받치고 있어서 정족산성 또는 삼랑성이라고 불린다. 이 성을 쌓은 연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바깥쪽에 돌을 쌓아 석축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의 산성은 거친 활석을 비롯하여 잔돌로 촘촘하게 석축을 쌓았는데 서울의 아차산성이나 고구려가 쌓은 여러 산성들과 입지나 석축을 쌓는 수법이 비슷한 것으로 볼 때 고구려가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유역 패권을 잡은 이후에 쌓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족산성은 서북쪽 해발 220m의 정족산이 가장 높은 산이고, 남쪽편과 동쪽편에 비슷한 높의 봉우리들이 능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등사와 정족산 사고가 있었던 산성내부는 강화해협(염하)가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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