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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 12

[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전쟁의 기록과 기억

임진왜란은 명나라의 참전으로 왜군이 부산지역으로 퇴각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강화회담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고 왜군은 다시 한번 대공세를 펼치며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정유재란 초기 왜군은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을 칠전량에서 궤멸시키고 육상으로는 진주성과 남원성 싸움에 승리한 후 호남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전세는 왜군이 직산현 전투에서 패배하고 수군 또한 명량해전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 이후 전장은 부산,울산,사천지역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있었으며 1598년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군이 퇴각하면서 임진왜란은 끝나게 된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에 존재했던 조선,왜,명나라가 참전했던 세계대전 성격의 전쟁이었으며, 명나라는 전쟁에 소요된 많은 비용으로 경제적인 어려움이 가중되었다..

지역박물관 2013.08.14

진주 경절사, 진주하씨 시조 하공진을 모신 사당

진주성내 경상우병영 운주헌을 비롯한 관아 건물들이 있던 자리에는 경절사라는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경절사는 고려시대 거란의 2침입때 큰 공을 세운 하공진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경절사는 원래 진주시 수곡면에 있었는데 1992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건물은 서원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데, 뒷편에 사당인 경절사가 있고, 앞쪽에 재실 성격의 건물 2동이 마주보고 있다. 하공진장군은 진주성과는 관련이 없는 인물이지만, 이곳에 있던 경남도청 건물 등이 허물어지고 사적지로 재정비되는 과정에 진주를 대표하는 성씨인 진주하씨문중에서 사당을 옮긴 것으로 보인다. 하공진(?~1011년)은 고려초 문신으로 진주하씨 시조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고려초 목종을 폐위시킨 강조의 정변에 가담하였으며, 거란의 2차침입때 ..

진주 청계서원, 목화를 처음 재배한 정천익을 모신 서원

진주성내 옛 경상우병영 관아가 있었던 북장대 안쪽에는 일제강점기에 이곳에 경남도청이 들어서면서 옛 관아건물들은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청계서원과 사당인 경절사가 들어서 있다. 청계서원은 고려초 거란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정신열과 우리나라에서 목화를 처음 재배한 인물인 정천익을 모신 서원이다. 청계서원은 조선후기 순조대에 진주 대평면 남강변에 세워졌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으로 해방이후 진주성으로 옮겨와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후진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세워졌던 서원이 조선후기에 들어서면서 가문의 유력인물을 모시는 사당으로 변질되면서 많은 병폐가 생겨나던 시기에 세워진 전형적인 서원이라 할 수 있다. 청계서원은 가운데 강학공간인 강당이 있고, 양쪽에 사당인 경덕사와..

국립진주박물관,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박물관건축물

1984년에 개관한 국립진주박물관은 경남지역의 선사시대와 가야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세운 박물관이었는 금관가야의 수도 김해에 가야문화를 소개하고 유물을 전시하는 국립박물관이 세워짐으로써 지금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유물을 주로 전시하는 역사박물관으로 그 성격이 바뀌었다. 임진왜란의 격전지이자 조선후기 경상우병영이 주둔하였던 진주성 내에서 관아와 일제강점기 경남도청이 있는 지역에 세워졌다. 전시실은 임진왜란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관련유물을 전시한 임진왜란실과 서부경남지역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전시한 역사문화실, 재일교포 김용두가 수집하여 기증한 문화재를 전시한 두암실로 구성되어 있다. 진주박물관은 청주박물관과 함께 건축가 김수근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목탑을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구조와 형태 등에서..

진주 경상우병영 관아 건물터와 문루인 영남포정사

진주성은 조선후기 경상우병영이 주둔하던 곳으로 공북문 안쪽 언덕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근무하던 공간인 운주헌을 비롯하여 관덕당, 공진당 등 관아 건물과 무기고, 화약고 등이 있었다. 옛 관아건물들은 구한말 병영이 폐지되고 전국이 13도로 개편될 때 경상남도 감영이 설치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도청이 부산으로 옮기기 전까지 자연스럽게 이곳에 도청이 설치되면서 옛 관아건물들은 허물어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옛 관아 건물터에 인근에 있던 청계서원과 사당이 옮겨져 들어서 있고 옛 관아건물로는 병영과 감영 문루였던 영남포정사가 남아 있고, 공식적인 누각이자 남장대였던 촉석루와 관아 누각으로 사용되었던 북장대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 병영은 국방상 주요한 요지에 설치된 군사조직으로 관찰사 또는 지방관인 목사가 겸..

조선 관아 2013.08.01

진주 창렬사와 비석들, 진주성 싸움에서 순국한 이들을 기리는 사당

진주성은 진주도심 남강변이 있는 성곽으로 둘레 1.7km의 내성과 4km의 외성으로 구성된 상당히 큰 규모의 성곽이다. 경상도 남해안에서 섬진강을 따라서 호남평야와 연결되는 교통로을 지키는 요새로 삼국시대 백제가 토성을 쌓은 이래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로 조선시대에는 경상우병영이 주둔하는 곳이었다.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2차례에 걸친 큰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1차 진주성싸움은 김시민장군의 지휘 아래 3,800여명의 군사로 2만명의 왜군을 물리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이이다. 2차 진주성싸움은 정유재란 때 왜군의 주력부대가 호남평야를 장악하기 위해 5만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서 벌인 싸움으로 비록 황진.최경회가 이끄는 관군과 김천일이 지휘하는 의병이 모두 순국한 끝에 패전한 전투이기는..

진주 호국사, 진주성을 지키던 승병들이 거처했던 사찰

진주 호국사는 진주성내에 위치한 사찰로 진주성내 승병들이 거처했던 곳이다. 호국사는 고려말로 당시 남.서해안 지역에 극심했던 왜구의 침입에 대처하기 위한 승병을 양성하기 위해 창건한 사찰로 원래 이름은 내성사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최대의 지상 전투라 할 수 있는 2차에 걸친 진주성싸움에 참여하여 많은 희생을 치루었으며, 숙종으로부터 호국사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방체제가 정비되고 전국의 주요 국방상 거점에 산성을 쌓는 승병들이 많이 동원되었으며, 호국사 또한 경상우병영 주둔지인 진주성내 산성을 축성하고 관리하는 승병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호국사는 진주성 서장대와 진주성싸움 희생자를 위한 사당인 창렬사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진주성 내에는 경상우병영 관..

전국 사찰 2013.07.24

진주 진주성 (사적118호), 공북문에서 서장대까지 북쪽 성벽

진주성은 삼국시대 백제가 토성을 쌓은 이래로 경상도에서 섬진강을 거쳐 호남평야로 연결되는 주요 교통로를 지키는 거점이 되었던 곳이다. 현재의 진주성은 고려말 왜구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토성에 석축을 쌓은 형태를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 둘레는 4 km 였으나 지금은 1.7 km 정도의 내성만이 남아 있다. 남강 북안 절벽위에 쌓은 진주성은 전체적으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지형을 하고 있으며, 대체로 평탄한 편이다. 진주성 내성에는 동문이 촉석문, 북문인 공북문과 서문을 두고 있으며, 군사를 지휘하기 위한 장대로는 진주성내에서 제일 높은 서남쪽 언덕에 위치한 서장대, 진주도심이 내려다 보이는 공북문 서쪽 언덕에 서장대, 진주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촉..

진주성 의기사와 의암바위, 논개 영정을 모신 사당과 왜장을 끌어안고 순국한 바위

진주성은 남해안 지역에서 섬진강을 따라서 남원을 거쳐 호남평야와 연결되는 교통로를 막고 있는 국방상 중요한 요지이다. 이곳 진주성에서는 임진왜란 중 왜군과 2차례의 큰 전투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였던 진주대첩으로 호남지방으로 진격하려는 2만여명의 왜군을 진주목사 김시민을 중심으로 3,800여명의 관군이 치열한 공방전 끝에 물리친 전투였으며, 2번째는 정유재란때 3만여명의 대병력으로 공세를 펼친 왜군에 맞서 3천여명의 조선군이 공방을 벌려 끝내 진주성이 함락된 전투가 있었다. 특히 정유재란때 왜군의 대공세로 펼쳐진 2차 진주성 싸움에서는 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를 비롯하여 많은 관민들이 왜군의 공세에 거세게 저항했으나, 결국 진주성은 함락되었고 수만명의 민간인들이 학살되었다고..

진주 진주성 (사적118호), 촉석루에서 서장대까지 남강변 성벽

진주성은 진주시 도심을 관통하는 남강변에 세워진 성곽으로 읍성의 성격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 경상우병영이 주둔하였던 방어를 목적으로 축성된 성곽이다. 이곳은 원래 백제가 한반도 서.남해안과 호남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를 장악하기 위해 축성한 거열성이라는 토성이 있어던 곳이라 한다. 고려말 이후 왜구에 대응하기 위해 석축성으로 쌓았으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여러차례 중수가 있었다. 성의 규모는 둘레 1.7 km 규모로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내성만 남아 있다. 진주성은 남강 북안에 솟아 있는 지형을 적절히 활용하여 쌓았기때문에 내성 동문인 촉석문에서 서쪽편 모서리에 위치한 서장대까지는 남강변 절벽에 낮은 석축을 쌓은 형태를 하고 있다. 남강이 내려다 보이는 남쪽편 성벽에는 원래 군사..

진주 촉석루, 남강의 풍치를 즐길 수 있는 아름다운 누각

진주성 내에는 남강 바위 벼랑 위헤 장엄하게 솟아 있는 촉서루는 영남제일의 누각으로 아름다운 남강을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경상우병영 주둔지로 경남지역에서 호남지역으로 통하는 교통로를 지키기 위해 축성된 진주성에서 군사를 지휘하는 장대역할을 하는 촉석루는 규모로 보아서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 삼척 죽서루 등과 함께 조선시대 관아에서 운영하는 대표적인 누각이라 할 수 있다. 이 누각은 원래 장대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규모를 크게 하여 경상우병마절도사나 진주목사가 지역내 유력인사들이나 중앙에서 방문한 손님들을 위해 연회를 베푸는 장소로 사용되었던 곳이다. 진주는 군사조직인 경상우병영과 행정조직인 진주목이 별도로 설치된 곳으로 관아의 규모가 상당히 컸던 지방으로 평양과 함께 기생들이 유명했으며..

조선 관아 2013.07.12

진주 진주성(사적118호), 내성 동문인 촉석문과 동쪽 성벽

진주시 남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사적 118호로 지정된 진주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둔 3대 대첩 중 하나인 진주대첩의 현장이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영이 있었던 곳이다. 진주성은 백제가 쌓은 거열성이 있었던 곳으로 원래 토성이었던 것을 고려 공민왕대에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석축성을 쌓았다고 한다. 진주성은 서울의 풍납토성, 행주산성, 공주 공산성, 부여 부소산성 등과 마찬가지로 강을 끼고 있는 평지에 나지막한 동산에 위치하고 전형적인 백제 읍성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는 성곽이다. 지금은 둘레 1.7km 규모의 외성만 남아 있지만 동쪽으로 외성이 있어 전체 규모는 둘레 4km 정도의 읍성이었다고 한다. 진주성 남쪽으로는 남강이 흐르고 서쪽과 북쪽으로는 하천이 흘러서 해자 역할을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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