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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박물관

[중앙박물관 신라실] 신라문화의 확산

younghwan 2011. 5. 24.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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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시대를 이야기 할 때 지방에 대해서는 기록으로만 남아 있고, 그 유물들은 그리 많이 남아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신라에서도 지방통치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보은의 삼년산성, 여주의 파사산성, 파주의 칠중성 등 남한강 유역을 비롯한 주요 교통로에 쌓은 견고한 산성이나 진흥왕 순수비나 각종 비석에서 지방통치에 대한 여러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산성 이외에는 지방통치와 관련된 유물로는 경주를 비롯하여 각지에서 산성을 쌓을 때 지역별로 축성책임을 할당하면서 이를 기록으로 남긴 남산신성비에서도 지방의 이름들이 등장하며,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에서도 각 지역의 조세납부와 관련된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중앙박물관에서는 지방통치와 관련하여 많지는 않지만 당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체계적으로 지방을 다스리다.
신라는 주변 소국을 점령하여 신라의 지방으로 만들었는데, 6세기 전국에 주와 군을 설치하고 성.촌까지 군조.나두.도사 등의 지방관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파악과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지방관은 촌주 등 지방 유력자의 도움을 받아 세금을 걷고, 지방민을 거느리고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다. 또한 도성이나 지방의 주요 지역에 성을 축조할 때 전국 각지에서 지방민에게 노동력과 물자를 걷어 공사를 수행하였다. 당시 축성과 관련한 남산신성비와 명활산성비에는 도사가 파견된 촌단위로 작업구역이 할당되어 세밀한 공사가 진행된 것이 기록되어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목간
성산산성은 조남산 능선을 따라 자연물 또는 돌을 이용하여 쌓은 성으로 둘레는 약 1,400m이다. 문루와 성벽, 내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내부 저수지에서 많은 목간이 출토되어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560년 무렵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목간에는 갑문생, 구리벌, 고타 등과 같이 이미 알려진 지명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비문과 기록에도 나오는 지명이다. 이 지역은 대체로 경북 북부 일대로 추정되며, 당시 상주지역에서 거두어들인 물자를 낙동강을 이용하여 후주 지역에 있는 성산산성까지 운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목간으로 고타(경북 안동), 추문(충북 단양), 급벌성(경북 영주)의 지명이 나타난다. 이는 다른 여러 기록에서 볼 수 있는 지명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하며 목간에 적힌 내용은 아래와 같다.

 - 고타 (경북 안동), 고타군 이골리촌 아나마을에 사는 _지와 복리고지 두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를 발송하다.
 - 추문(충북 단양), 추문군 전나모지촌에 사는 이리습이라는 사람이.
 - 급벌성(경북 영주), 급벌성에 사는 문시이와 조벌척 두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섬 <출처:중앙박물관>


구리벌(경북 상주), 구벌(경북 의성)의 지명이 적힌 목간이다. 주요 내용은 세금 납부와 관련된 기록이라고 한다.

 - 구리벌(경북 상주), 구리벌군 상삼자촌에 사는 걸리라는 사람이,
 - 구벌(경북 의성), 구벌군 간호_촌 비시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섬 <출처:중앙박물관>


물사벌, 매약촌, 감문(경북 김천)의 지명이 적힌 목간

 - 물사벌, 물사벌성에 사는 두지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섬
 - 매약촌, 매약촌에 사는 고광사진우라는 사람이 세금으로 낸 피 한섬
 - 감문(경북 김천), 감문성 아래 보리는 본파군 대촌에 사는 모리지가 세금으로 낸 한섬 <출처:중앙박물관>


꼬리표 목간은 곡물이나 물건을 담은 짐꾸러미를 묶은 끈에 꽂은 것으로 앞부분이 뾰족하거나 양 옆에 홈을 내어 고정하게 하였다.

지방으로 퍼져가는 신라의 문물
신라는 6세기대에 북쪽으로 영역을 확장하면서 정복지에 비석을 세워 신라의 영역을 표시하였다. 신라가 점령한 지역에는 주민들이 삼년에 걸쳐 쌓았다는 삼년산성을 비롯하여 산성과 더불어 신라식 돌방무덤이 만들어졌다. 무덤 입구에서 보아 무덤길이 좌측이나 가운데 있는 신라식 돌방무덤에는 굽다리가 짧고 새긴 무늬와 찍은 무늬가 베풀어진 간단한 형태의 토기가 묻혔다. 또한 다양한 모양의 5세기대 허리띠는 버섯모양 띠고리와 하트모양 띠꾸미개로 구성된 간단한 모양으로 변하면서 신라의 지방에서는 동일한 모양의 허리띠를 사용하였다. 이러한 허리띠는 <누암리형허리띠>라고 불리우며, 법흥왕 7년(520) 관리의 관복을 정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출처:중앙박물관>


청동허리띠장식, 상주 청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법흥왕떄 관리의 관복을 정한 것과 관련된 유물로 보고 있다.

각지로 퍼져가는 신라문물
6세기 신라가 영역을 확장하면서 신라문화는 낙동강.한강 등을 따라 퍼져 나갔다. 신라가 점령한 지역에는 교통로를 따라 퍼져 나갔다. 신라가 점령한 지역에는 교통로를 따라 산성과 돌방무덤이 만들어졌다. 돌방무덤에서 나온 신라토기도 이전과 달리 여러가지 변화가 나타났는데, 모양이 단순해지고 굽다리기 짧아지며 새긴 무늬와 찍은 무늬가 베풀어졌다. 또한 새로이 신라로 들어온 지방에서는 버섯모양 띠고리와 하트모양 띠꾸미개로 구성된 간단한 모양의 허리띠가 등장한다. 이는 신라지방관의 관복을 장식하던 허리띠로서, 신라가 정복한 지역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다스렸음을 알게 한다. 이제 신라는 이전과 같이 정복한 지역에서 물자를 빼앗아 오던 단계에서 벗어나 정보지를 신라의 지방으로 인식하고 지배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경주의 돌방무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는 구조로서, 여러 차례에 걸쳐 추가로 시신을 묻을 수 있어 가족의 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전 시기에 하나의 무덤에 한 사람만 묻는 돌덧널무덤이나 돌무지덧널무덤과 다른 형태로 가문이나 가족에 대한 관념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신라의 돌방무덤은 5세기 후반에 지방에서 먼저 등장하고 왕경인 경주에 전해져 중앙 귀족들의 새로운 무덤으로 정착하였다. 새로이 신라의 주된 무덤으로 발전한 돌방무덤은 신라의 영역 확장에 따라 전 신라 영토로 확산되었다.


경주 용강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뚜껑합


경주 서악동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뚜껑합


항아리, 경주 보문동 부부총


항아리와 수키와,  경주 동천동 와총 출토


굽다리접시. 안성 반제리, 안성 보정리, 파주 성동리에서 출토된 것으로 이전의 신라토기와는 달리 단순화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신라 전역으로 확산된 돌방무덤에 부장품으로 많이 묻었던 것이라고 한다.


글씨가 있는 그릇. 창녕 계성, 양산 하북정, 상주 청리, 동해 추암동에서 출토되었다.

신라문화의 확산
신라는 법흥왕과 진흥왕대에 걸쳐 낙동강유역의 가야를 흡수하고, 고구려.백제와 겨루어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한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새롭게 신라 영토로 들어 온 지역에는 신라의 통치력이 미치게 되면서 신라 문화가 들어갔다. 신라는 확대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지방관과 군대를 파견하였는데, 각 지역에 남아 있는 신라의 돌방무덤이나 토기는 이 시기 신라의 지방 지배를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각지에서 발견된 비석이나 목간 등의 문자 자료에도 신라가 정복지의 주민을 흡수하여 관직을 주거나 세금을 매기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어 신라 문화의 확산을 확인할 수 있다. <출처:중앙박물관>


뚜껑합, 포항 냉수리 돌방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다.

영일 냉수리 고분
영일냉수리신라비가 발견된 곳 주변에는 많은 무덤이 있는데 주로 돌방무덤이다. 1990년에 조사된 대형의 돌방무덤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옆방이 딸린 무덤 구조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냉수리무덤과 냉수리비,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성리비 등을 통해 볼 때 현재 포항 일대는 삼국시대 신라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지리적인 위치나 교통로 등 고구려와의 접경지면서 신라가 동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요충지로 일찍부터 신라의 성장 과정에서 정치.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출처: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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