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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108

진천 김유신 장군 탄생지 (사적 414호)

충북 진천군 상계리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 탄생지이다. 이곳은 진천군 소재지 서쪽 만뢰산 계곡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신라가 한강 유역을 진출하면서 가야출신으로 큰 공을 세웠던 김유신일가가 자리를 잡았던 곳으로 넓은 평야지역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천안과 진천 사이의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진천지역 태수를 지냈던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 김서현이 집무를 보던 곳으로 조선시대 관아와는 달리 군사 주둔지 성격을 갖고 있는 지역으로 지금도 주변에는 마을이 거의 없다. 김유신 장군 유적지에는 실질적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고, 탄생지 뒷편 태령산성 정상부에 탯줄을 보관했다는 태실이 남아 있다. 태실은 원형으로 3단의 석축을 쌓고 그위에 흙을 덮은 형태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태실의 형태라고 한다. 탄..

담양 성월리 월전고분, 삼국시대 지방세력 무덤

담양군 고서면 성월리 월전마을 입구에 남아 있는 삼국시대 이전에 조성된 고분인 담양 성월리월전고분이다. 이 고분은 방형(사각형)과 원형 분구가 이어져 있어 장고분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실제로는 마을에 입구에 있는 작은 무덤과 주변 숲으로 보이지만, 마을 안 능선쪽에 경작지로 사용되고 있는 부분이 방형이고 논경지가 펼쳐진 동쪽편 원형분구이다. 원형분구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고 그 가운데 작은 무덤이 있다. 이 고분이 있는 담양 월전마을은 무등산에서 발원하여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증암천 주변으로 형성된 충적지 평야지대이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창평현이 있었던 지역으로 월전리 마을 동쪽 증암천변에는 창평향교가 있고 멀지 않는 곳에 창평현 관아가 있었던 구읍리가 있다. 이 지역은 넓은 충적평야의 경제력을 ..

서산 부장리 고분군(사적475호), 삼국시대 백제 지방세력 무덤

충남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서 발견된 삼국시대 무덤 서산 부장리고분군이다. 2000년 이후 이곳에 임대아파트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유적으로 청동기시대에서 백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덤, 주거지 증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었다. 무덤은 토광묘에서 목관묘까지 다양하며, 백제를 대표하는 형태의 다양한 유물들도 출토되었다고 한다. 특히 5호분에는 공주지역에서 볼수 있는 금동관모, 철제초두, 각종구슬을 비롯하여 환두대도, 철검, 도끼, 각종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매장 유물로 볼 때 서산지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귀족세력의 무덤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백제시대 지방세력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라 한다. 백제시대 고분이 출토된 음암면 부장리는 백제가 중국 남.북조와 교류하던 시기에 태안에서 서산, 당진..

고양 멱절산유적, 한강 하구에 위치한 한성백제 생활유적지

고양 멱절산은 한강 나루터가 있었던 이산포 동쪽편에 위치한 조그만 야산으로 한성 백제 유물이 출토된 유적지이다. 이곳에 한강나루터가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강에서 서해로 나가는 수로에 위치하고 있는 주요 거점으로 한강상류지역에서 서해로 나가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다. 멱절산은 지금은 평야 가운데 있는 작은 동산처럼 보이지만, 원래 한강둑을 쌓기 이전에는 한강변 늪지에 있던 작은 섬이었고, 고양시 일대에서 흘러내려오는 한강지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배가 정박할 수 있을 정도의 수심을 유지하고 있는 곳이었다. 청동기시대 이후의 고대 읍성국가시기에는 이런 지형이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에 용이하고, 수로를 이용할 수 있어서 교통이 편리하기때문에 무역거점이나 취락지역으로 선호되었다..

포천 영송리 유적, 한성백제 시기의 집터 유적

포천 영송리선사유적은 한탄강 지류인 포천시 백운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영평천과 포천시 지역에서 흘러내려오는 포천천이 합류하는 영평천변에서 발굴된 선사유적지이다. 이 유적지는 하천에서 자갈을 채취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청동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영평천을 따라 포천과 연천지역을 연결해주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편으로는 농지가 약간 넓은 편으로 선사시대부터 마을을 형성하면서 사람들이 살아 왔던 지역으로 보인다. 이 유적지에서는 원삼국시대와 한성백제 시대의 움집터가 발견되었는데 집터 안에서 화덕자리와 부뚜막 같은 시설물들이 발견되었고 항아리와 단지 등의 토기들이 사용되고 있던 형태로 발견되어 당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유적지이다. 이곳은 하천변에서 자갈채취 과정..

연천 신답리고분, 한탄강변에 남아 있는 고구려고분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과 지천인 영평천이 만나는 연천군 전곡읍 신답리에 남아 있는 고구려 고분으로 추정되는 연천 신답리고분이다. 한탄강 북안 평지에 남아 있는 신답리고분은 2기의 고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구려 고분의 특징인 지상식 석실구조를 하고 있는 원형의 석실봉토분으로 1호분은 너비 19m의 대형 고분이고, 2호분은 너비 7.7m 정도의 작은 고분이다. 출토된 유물이 많지 않아 고분의 연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고구려 고분이 남아 있는 연천군 신답리 일대는 한탄강과 포천에서 흘러내려오는 지류인 영평천이 만나는 지점으로 한탄강이 굽이져 흘러 반도와 같은 지형을 하고 있어,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에 용이하고, 포천과 연천을 연결하는 중요한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강 주요 지점에 남아 있는 고구려 ..

연천 경순왕릉(사적 244호), 경주로 돌아가지 못한 신라 마지막 경순왕의 능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 나루터였던 고랑포 북쪽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이다. 신라를 고려에 넘겨 준 마지막 왕으로 신라왕릉 중에서는 유일하게 경주에서 벗어난 이곳에 왕릉이 자리잡고 있다. 원래는 경순왕 사후에 경주에 묻힐려고 했는데, 고려 조정에서 경주지역 민심이 동요되는 것을 우려하여 운구행렬이 이곳 고랑포에서 막았고 이곳에 왕릉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경순왕릉은 고려와 조선시대 여러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관리가 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가 영조대에 조선시대 왕릉의 격식에 따라서 재정비되어 현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 왕릉이나 조선 왕릉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도 작고, 능표.양석.장명등.망주석 등의 석물 또한 간소하게 마련되었다. 경순왕릉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휴전선과 가까운 민통선..

남한산성 행궁터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주장성 건물터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격전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볼 수 있는 남한산성 성벽을 비롯한 방어시설들은 병자호란을 대비하여 쌓기 시작하여 그 이후에 크게 보강한 것이다. 남한산성은 한강이남을 지킬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방어하기 했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남한산성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문헌상의 기록이나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672)은 당나라 병력 5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보인 시기였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당나라의 남하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주장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주장성은 당나라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으로 한강유역..

경주 낭산 (사적 163호),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가 있는 신라인들이 신성시여겼던 숲

경주 도심에서 울산방향의 국도와 철도가 지나는 동남쪽에 위치하는 낭산은 선덕여왕릉을 비롯하여 사천왕사, 황복사 등의 절터가 있는 곳으로 사적 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 낭산은 누에고치모양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있는 해발 100m 정도의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인들이 신성시여겨왔던 곳이다. 삼국시대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대에 신라인들이 신성시여겼던 숲에 7처가람이라는 영흥사,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영묘사, 담엄사 등이 세워졌는데, 그 중 낭산에는 사천왕사가 세워졌다. 경주 낭산은 보문동.구황동.배반동 일대에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낮은 야산으로 북쪽편으로는 황룡사와 분황사가 있고 서쪽편으로는 경주의 궁궐이 월성이, 동쪽편으로는 명활산성 아래 신라 6촌 중 하..

경주 배리삼릉(사적219호)과 경애왕릉(사적222호), 신라 마지막 박씨 왕들의 능

경주 배동 남산 등산로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배리삼릉은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앞쪽에는 신라 8대 아달라왕, 가운데에 53대 신덕왕, 뒤쪽에 54대 경명왕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8대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700여년의 시기의 차이가 있지만 비슷한 외형의 봉분을 하고 있어서 그 신빙성에 의문을 갖게 하는 곳이다. 가운데 신덕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은 2차례 도굴을 당하여 내부 조사를 한 결과 통일신라 무덤양식인 굴식돌방무덤을 하고 있으며, 벽면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어서 벽화가 없는 경주의 신라고분에서 벽화의 흔적이 처음 발견된 곳이기도 하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알려진 경주 나정 부근의 경주남산 서쪽편 기슭 아래에는 일성왕릉, 지..

경주 지마왕릉 (사적 221호), 신라 6대 지마왕의 능

신라는 시조 박혁거세 이후 박씨, 석씨, 김씨가 왕위를 돌아가며 계승하였으며, 내물왕대 이후 김씨의 왕위세습이 이어졌으며, 마지막 왕인 경순왕 이전인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55대 경애왕이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다. 신라의 왕들 중 김씨와 석씨 왕들은 경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반면에 박씨로서 왕위를 계승한 왕들은 대부분 초기의 왕들은 박혁거세 왕릉이 있는 경주 오릉에, 그 이후 6대 지마왕 이후 일성왕, 아달라왕과 통일신라말 3명의 왕들의 무덤은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남산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다. 포석정이 신라 왕실의 연회장소이기는 하지만 주변에 신라를 건국한 탄생설화가 있는 나정을 비롯하여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신라 지배계층 중 박씨들에게 의미있는 장소로 이와 관련이 있..

경주 포석정지 (사적 1호), 신라인들이 즐겼던 풍류를 느낄 수 있는 역사적 장소

경주시 배동 남산 북서쪽 자락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1호로 지정된 포석정이다. 이 곳은 신라 왕실의 별궁이 있었던 곳으로 왕실에서 연회를 베풀던 곳이라고 한다. 정자를 비롯하여 별궁건물이 있었다고 하며 지금은 연회를 즐기건 석조구조물만이 남아 있다. 화강석으로 만든 약 22m의 수로로 이루어진 이 구조물은 수로를 굴곡지게 하여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는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시설이라고 한다. 원래 포석정에는 남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 토하는 돌거북이 있었다고 하며, 이 물을 받는 원형석조가 남아 있다. 기록에는 9세기 헌강왕대에 왕이 포석정에 들러 유상곡수연을 즐겼다는 내용이 에 기록되어 있으며, 후삼국시대 경애왕이 이곳에서 연회를 즐기다 후백제 견훤의 습격을 받아 죽은 곳이라고 한다...

경주 일성왕릉 (사적 173호), 남산 신성아래에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무덤

경주시 탑동 남산 북서쪽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7대 일성왕의 능이다. 일성왕릉은 신라초기에 조성된 왕릉으로 그 존재는 조선후기인 영조 6년(1730) 이후라고 한다.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비롯하여 초기 박씨로서 왕위에 올랐던 왕들의 능인 경주 오릉과 비슷한 성격으로 정확한 조성내력이 알려지지는 않았고 에 남산 해목령에 장사를 지냈다는 경애왕릉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성왕은 신라 3대 유리왕의 맏아들로 북방의 말갈족과 충돌이 있었으며, 농업을 권장하고 백성들이 금은주옥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일성왕릉이 위치한 곳은 경주오릉에서 남쪽으로 1.5km정도 떨어진 곳에 있으며, 신라 6촌 중 돌산고허촌이 있었던 지역으로 보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 신라가 멸망할 ..

경주 나정 (사적 245호), 신라 시조 박혁거세 탄생 설화가 있는 우물터

신라를 건국한 시조인 박혁거세왕의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시 탑동에 위치한 사적 245호로 지정된 경주 나정이다. 최근에 발굴작업을 했고, 사적정비를 진행중이어서 현재는 빈터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곳에는 조선 순조대에 세워진 유허비를 비롯하여 팔각건물지, 우물지, 담장지, 부속건물지, 배수로 등이 남아 있으며, 이곳에서 출토된 건물석재들도 볼 수 있다. 우물은 고대 이래로 인간이 물을 얻을 수 있는 인공시설로 사람들은 이런 우물을 신성시하였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는 당시 사람들에게 신성시되었던 우물제사 유적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들 우물들에는 토기와 기와, 동물의 뼈, 씨앗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 우물들은 식수를 얻기 위한 우물이라기 보다는 우물제사를 위한 공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

경주 김유신장군묘(사적 21호),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장군의 무덤과 무덤둘레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경주 도심에서 형산강 서쪽편에 위치한 송화산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김유신 장군의 무덤이다. 신라 귀족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왕릉에 준하는 규모의 큰 무덤으로 지름 30m 크기로 둥근 형태의 봉분을 하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난간석이 세워져 있다. 둘레석에는 12지신상을 조각하고 있는데 세련된 조각솜씨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 앞에는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서구의 제단과 비슷한 형태의 상석이 놓여져 있다. 무덤의 전체적인 형태는 김유신장군과 같은 시기에 살았던 태종무열왕릉과 달리 성덕왕 이후 왕릉의 형태를 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후대에 보완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무덤의 봉분은 후대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였던 왕릉과 비슷하지만,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상들은 세워져 ..

경주 성동동 전랑지(사적 88호), 통일신라시대 건물터가 남아 있는 곳

경주시 성동동 경주 중.고등학교 뒷편에 남아 있는 8천여평이 이르는 넓은 통일신라시대 건물터인 사적 88호로 지정된 경주 성동동 전랑지이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경주 도심 북쪽을 동.서로 흐르는 북천(알천) 제방 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흙으로 쌓은 토단이 발견되어 일부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당시에는 약 2천여평 정도를 발굴하여 전당터 6곳, 복도로 보이는 장랑터 6곳, 담문터, 담장터 등이 발견되었고, 기와와 벽돌을 사용해서 만든 배수시설과 우물터 등이 확인되었다. 현재는 약 8천여평의 부지에 건물터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주춧돌만이 일부 남아 있다. 이곳 전랑지에 대한 전체적인 발굴작업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물의 배치 형식이나 구조 등으로 볼 때 사찰터는 아니고 귀족의 저택이나..

경주 용강동 고분 (사적 328호), 통일신라시대 복식과 당나라와의 교류관계를 보여주는 통일신라 귀족의 무덤

경주 용강동고분은 경주시 용강동 밭 가운데에 남아 있던 고분이라고 설명이 되어 있는데 지금은 경주 신도심 중앙, 경주시청 북쪽편으로 아파트가 들어선 도심 한가운데 공원처럼 남아 있는 신라의 고분이다. 지금은 둘레석이 있는 통일신라시대 고분처럼 복원해 놓고 있지만, 원래는 밭 한가운데 작은 봉분만 남아 있는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부는 통일신라시대 무덤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양식을 돌방을 갖춘 굴식돌방무덤으로 오랜 기간동안 도굴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은 곳이라고 한다. 돌방무덤은 무덤방에 문이 달려 있어 여러차례 시신을 묻을 수 있는 형태로 가족무덤으로 사용할 수 있다. 이런 무덤의 형태는 지방에서 먼저 사용하고, 수도의 경주로 확산되어 통일신라시대 중앙 귀족들의 무덤 형태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이곳에..

부여 당유인원기공비 (보물 21호),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군 유인원의 공적비

부여박물관 정원에 전시되어 있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의 공적을 기록한 보물 21호로 지정된 당유인원기공비이다. 유인원은 당나군의 낭장으로 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고 흑치상지를 중심으로 일어난 백제 부흥운동을 평정하였다고 한다. 이 비석은 원래 부소산에 세조각으로 깨어져 흩어져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에 복원해 두었다고 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비는 몸돌과 머리돌이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머릿돌에는 당나라 전기의 조각수법을 보여주는 여섯마리의 용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놓고 있다.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서 현재는 그 글씨를 알아보기 힘든 상태이며, 몸돌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가 있다. 이 비가 세워진 시기는 소정방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 비문을 새지지 3년 후인 663..

경주 표암, 경주 6촌 중 하나인 알천양산촌과 경주이씨의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온 곳

신라는 울산 백운산에서 발원하여 경주시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형산강 지구대 주변에 형성된 경주평야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동해안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와 4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적인 이점 등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에 성읍국가를 형성하면서 고대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건국 신화는 원래 이지역에 있는 육부촌이라는 여섯개의 촌장들이 모인 화백회에에서 남산 기슭 나정 우물가에 있던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며, 이는 초기 신라의 정치체제가 작은 성읍국가의 연맹체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경주지역의 6촌은 북천 북쪽편의 알천양산촌, 남산 서편 내남면 일대의 돌산고허촌, 월성 동쪽의 취산진지촌, 서천 지류인 모량천 유역의 무산대수촌, 백률사 부근의 금산가..

신라 탈해왕릉 (사적 174호), 월성 석씨 시조인 탈해왕을 모신 왕릉과 사당인 숭신전

경주시 동천동에 위치한 사적 174호로 지정된 신라 4대 탈해왕을 모신 탈해왕릉이다. 탈해왕은 월성 석씨의 시조로 설화에 의하면 석탈해는 일본 북쪽지방에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왔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신라 2대 남해왕의 사위가 되면서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왕을 지낸 성씨로는 박씨, 김씨, 석씨가 있으며, 신라에서는 8명의 석씨가 왕으로 재위하였는데 그 기간은 합쳐서 171년 정도였다고 한다. 월성석씨는 그 유래가 오래되기는 하였지만 후손이 번창하지 않아 현재 4,500명 정도가 있다고 한다. 탈해왕릉은 경주오릉과 마찬가지로 초기의 왕릉으로 발굴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위에 아무런 시설이 없이 봉분만 남아 있다. 봉분 앞에는 일제강점기에 경주 시내에 지어졌던 숭신전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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