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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남한산성 행궁터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주장성 건물터

younghwan 2012. 8. 1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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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의 격전장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현재 볼 수 있는 남한산성 성벽을 비롯한 방어시설들은 병자호란을 대비하여 쌓기 시작하여 그 이후에 크게 보강한 것이다. 남한산성은 한강이남을 지킬수 있는 천혜의 요새로서 삼국시대부터 백제를 방어하기 했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 남한산성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문헌상의 기록이나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와 투쟁에 들어간 시기이며 특히 문무왕 12년(672)은 당나라 병력 5만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신라를 침입하려는 의도를 보인 시기였다고 한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당나라의 남하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쌓은 주장성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주장성은 당나라와의 전투에 대비하여 축조된 성으로 한강유역을 지키는 통일신라의 가장 중요한 요새였다.

 남한산성 행궁터에서는 최근의 발굴조사결과 백제시대의 주거지를 비롯하여 다양한 백제토기가 출토되었다. 또한 하궐 외행전 앞 마당에서 통일신라 시대 기와와 건물 초석이 확인되었는데, 삼국사기의 통일신라 주장성과 관련이 있는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건물터에서 무더기로 발견된 대형기와는 이 건물이 무기 등을 보관했던 창고와 같은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된 건물의 기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남한산성에는 병자호란을 대비하여 국왕이 임시로 거처할 수 있는 행궁이 설치되었는데, 행궁 외행전 마당에는 통일신라시대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남한산성 행궁터 발굴조사 광경을 찍은 사진 자료. 외행전 건물터 앞 마당에서 통일신라시대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을 방문하면 외행전 앞 마당 한편에 통일신라시대 건물터를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놓고 있다.

남한산성 행궁지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 건물지터. 무게 20kg에 이르는 초대형 기와를 얹은 통일신라시대 대형건물은 무기와 식량을 보관하기 위한 군수창고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터에서 무더기 발견된 기와. 길이 64cm 내와, 두께 4~5cm, 무게 19kg에 달하는 통일신라시대 초대형기와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기와저장소에서 확인된 통일신라시대 대형 수키와와 암키와. 대형기와는 이곳에 대형건물이 들어서 있었다는 것으로 말해주는 중요한 유물로 대형건물은 무기류를 보관했던 창고로 추정하고 있다.

 


통일신라건물터에서 발견된 건물기둥을 올려 놓았던 초석

'천주;명 암키와, 통일신라시대, 남한산성 행궁지. '천주 天主'로 판독되나 '주主'는 '토土'일 가능성도 있으며, 의미는 정확하지 않다. 명문 외각에는 격자문이 시문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성'명 암키와 편, 통일신라, 남한산성행궁지. '성城'은 고대 지방 행정단위이다. 주로 기와가 사용된 곳의 지명을 찍은 것으로 해석된다.

'관'명 암키와, 통일신라, 남한산성행궁지. '관官'에 이어 다음 글자는 '초草'로 판독할 수 있으나 확실치 않다. '관에서 사용하는 기와'라는 의미이다. 명문 아래로는 어골문이 시문되어 있으며, 상단부는 파손되었다. <출처:경기도박물관>

'갑진성년말촌주민량'명 수키와와 암키와, 통일신라시대. 회청색 경질의 수키와이다. '갑진'은 간지이고, '성년'은 지명, '말촌주'는 직명, '민량'은 이름으로 판단된다. 촌주는 신라시대 지방 말단행정 담당자였다. <출처:경기도박물관>


'마산정자와초'명 암키와와 수키와, 통일신라.


* 자료참조: 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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