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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108

신라 헌덕왕릉(사적 29호), 경주 북천(알천)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왕릉

헌덕왕은 신라 41대왕(재위 809~826년)으로 난을 일으켜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즉위하였다. 헌덕왕은 원성왕의 손자로 39대 소성왕의 동생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의 안정기가 지나고 지배계층간의 권력투쟁이 심화되었던 시기의 왕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안정화하고,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였다. 헌덕왕이 집권하던 시기에는 웅주도독 김헌창의 반란을 진압하고, 대동강 지역에 장성을 쌓고 국방을 강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헌덕왕 자신 또한 조카인 반란을 통해 조카를 죽이고 즉위하였던 것으로 볼 때 통일신라 후반기 귀족세력간의 갈등을 이끌었던 측면도 있다고 할 수 있다. 헌덕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경주시 동천동 지역은 경주 도심 북쪽을 흐르는 북천(알천) 북쪽 평지에 위치하고 있다. 북천..

경주 황오동고분군, 발굴이 진행중인 대릉원 동쪽편 쪽샘지구 고분군

경주 황오동 고분군은 대릉원 동쪽편 주택가에 흩어져 있는 신라 귀족들의 묘역으로 쪽샘지구라 불린다. 1960년대에 주택과 버스터미널이 들어서면서 고분의 훼손이 심해져서 2002년부터 국가에서 주택를 비롯한 사유지들을 매입하고 2007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적석목관분 등 여러 형태의 고분 150여기 확인되고 있으며, 수천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낡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던 경주 쪽샘지구는 큰길 주변을 제외하고 상당수의 가옥들이 지금은 철거되어 약간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곳에서는 예전부터 관리되어 왔던 큰 도로변 모통이와 경주빵으로 유명한 황남빵집 맞은편에 위치한 고분이 제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주택가 안쪽에 위치했던 고분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

경주 첨성대 (국보 31호), 현존하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삼국시대 신라의 천문대

첨성대는 하늘의 별을 관측하기 위해 높은 쌓은 대(臺)를 일컫는 말이면서, 국보 31호로 지정된 경주시 인왕동 역사유적지구에 남아 있는 신라의 첨성대를 특정하기도 한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으로 고대 이래로 국가나 집단을 운영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로 국가의 길흉을 점치기 위하여 별의 움직임이나 특별한 현상을 관측하는 것과 시간과 날짜를 정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줄이기 위함이다. 하늘의 별을 관측하는 것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매일 한번씩 회전하는 별자리를 관측하여 시간과 방위를 측정하는 것과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행성의 움직임,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혜성, 지구로 떨어지는 별똥별, 태양의 흑점 변화,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하늘에 별이 사라지는 항성의 폭발 등이 있다.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이를 ..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신문왕릉(사적 181호)과 통일신라말 혼란기를 보낸 효공왕릉(사적 183호)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김정명)은 문무왕의 맏아들로 신라가 삼국을 통일이 귀족들을 제압하고 통일이후 사회안정의 기반을 마련한 왕이다. 또한 최고교육기관인 국학을 창설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문화를 증진하는 정책을 펼쳐 설총, 강수 같은 대학자를 배출하였다. 대체로 고려의 광종이나 조선의 태종에 비유되는 왕으로 귀족세력을 탄압하고 과감한 정치적 숙청을 단행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였다고 한다. 문무왕릉이 있는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가져왔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여러차례 일어난 반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대에는 9주와 주.군.현을 정비하는 등 지방통치를 위한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관리에게 지급되던 녹읍폐지하여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시켰다. 신문왕릉은 경주의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끝에 위..

경주 능지탑지,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을 화장했던 장소에 세웠다는 능지탑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에서 신라인들이 신성시 여겼던 장소 중 하나인 경주 낭산 서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능지탑지이다. 이 곳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능지탑이라 불리웠던 구조물의 일부가 남아 있다. 원래 이 탑이 있던 자리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을 화장했던 장소라고 한다. 원래는 5층탑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는 옛터에 남아 있던 석재들을 모아서 기단부를 복원하고 탑신부분은 확인할 수 없어서 일부만 추정해서 복원해 놓고 있다고 한다. 능지탑지가 자리잡고 있는 경주 낭산은 경주 도삼 동남쪽 넓은 벌판 한가운데에 길게 누에처러 누워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낭산에는 남쪽언덕에는 선덕여왕릉이 있고 그 아래에 문무왕을 추도하기 위해 세운 사천왕사가 있다. 북쪽에는 삼국시대에 신라의 신성한 숲..

신라 헌강왕릉(사적187호)와 정강왕릉(사적186호), 경주 남산 동쪽 통일신라 쇠퇴기 왕릉

경주 남산 동쪽편 통일전과 서출지 근처 북쪽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헌강왕릉(사적187호)와 정강왕릉(사적 186호)이다. 당나라 능묘제도를 받아들여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모습을 보여주던 괘릉 이후의 신라 왕릉과는 달리 소박한 느낌을 주는 통일신라 쇠퇴기 왕릉이다. 괘릉 이후에 정착되어가는 문인석, 무인석 등의 석물과 둘레석의 십이지신상, 난간석 등 왕릉을 구성하던 장식은 보이지 않고, 서구의 신전 제단같은 상석도 단순한 장방형 화강석 석단으로 바뀌어 있다. 봉분에는 단순하게 잘다듬은 화강석으로 둘레석을 둘렀을 뿐이다. 외형에 있어서는 신라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릉과 비슷하며, 복고적인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진흥왕릉 부근의 문성왕릉이나 헌안왕릉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보인다. 헌강왕은 신라..

경주 재매정(사적 246호), 신라 명장 김유신 장군 집터에 남아 있는 우물

경주시 교동 교촌마을 서쪽편에 위치한 사적 246호로 지정된 재매정은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명장 김유신 장군의 집에 있던 우물이다. 1993년에 발굴조사를 하였는데 이 일대가 김유신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현재는 우물과 그 옆에 세워진 유허비를 중심으로 담장을 쌓아 놓고 있으며, 담장안에는 집터에서 발굴된 주춧돌 등 건축자재들이 진열되어 있다. 우물을 중심으로 여러곳에 건물이 들어섰던 자리들이 남아 있다. 삼국통일 당시 큰 공을 세웠으며, 금관가야계를 대표하는 귀족으로 태종 무열왕을 옹립하는데 큰 세력이 되었던 김유신 장군의 저택답게 그 규모도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저택 앞으로는 월성 남쪽편으로 흐르는 남천이 지나가고 있고, 남천 너머로는 김유신과 관련된 전설이 남아 있는 ..

경주 신라 흥덕왕릉(사적30호), 통일신라 전성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왕릉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에 있는 사적 30호로 지정된 신라 42대 흥덕왕릉이다. 이 왕릉은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인 원성왕의 괘릉과 함께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반영한 무덤으로 석물의 배치에 있어서 약간 다른면이 있지만 구성요소는 괘릉과 거의 유사하다. 왕릉은 둘레석을 두르고 있으며, 둘레석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바깥에 난석이 둘러져 있다. 왕릉 중앙에는 전대나 후대의 왕릉에서는 잘 볼 수 없는 그리스.로마신전의 제단에서 볼 수 있는 큰 제단이 놓여져 있다. 석물은 왕릉입구임을 알려주는 화표석 1쌍, 문.무인상 1쌍, 2쌍의 사자상 중 하나가 없어진 3개의 사자상이 남아 있다. 특히, 무인석은 괘릉과 마찬가지로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왕릉 앞쪽에는 비석에 세워져 있었는데 지금은 거북..

부여 백제문화단지, 능산리절터에 있던 사찰을 재현해 놓은 능사

능산리사지는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에 소재한 백제의 마지막 왕릉이 있는 능산라고분군 옆에 있는 절터이다. 이곳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사비성 도성인 부여나성 바깥쪽에 자리잡고 있는 고분으로 다른 왕릉들과 마찬가지로 백제의 큰 위협이었던 신라를 비롯한 적의 침입이 예상되는 주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능산리사지는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인 성왕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능사로 이 곳에서 백제를 대표하는 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와 창왕명석조사리감이 출토되었다. 절은 중문, 목탑, 금당, 강당이 일자로 배치되어 있는 1탑, 1금당의 건물배치를 하고 있으며 사방이 회랑으로 둘러져 있다. 사찰의 규모는 황룡사나 익산 미륵사에 비해서 작은 편으로 선왕들의 명복을 비는 원찰 또는 능사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던 사찰이라고 할 수..

부여 백제문화단지, 백제 궁궐을 재현한 사비궁

백제의 옛 수도였던 부여군 규암면에 조성된 백제문화단지는 약 백만평의 대지에 백제의 궁궐이었언 사비궁과 능산리사지에 있었는 능사, 백제의 주택들을 재현한 생활문화마을과 위례성, 백제역사문화관 등이 자리잡고 있다. 그 중 사비궁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였던 사비성에 있었던 궁궐을 재현해 놓고 있다. 현재는 정전에 해당하는 중궁과 양쪽의 동궁,서궁만이 재현되어 있다. 실제 백제왕궁은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건물터.도로.하수구.연못.석축 시설 등의 유구가 확인되고 있으며, 당시 문서였던 많은 목간들을 비롯하여 건축자재들인 연꽃무늬수막새, 각종 토기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건물터의 발굴로 건물형태의 일부를 확인할 수는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백제왕궁의 모습이 확인되었다고..

김해 예안리 고분군(사적 261호), 밭으로 변해버린 금관가야 고분군

김해 예안리 고분군은 낙동강 서쪽편 대동리 들판에 소재한 고대국가인 금관가야의 고분군이다. 다른 고분들과는 달리 봉분이 남아 있지 않고, 지금은 대부분 밭으로 변해버린 곳이다. 평지에 자리잡고 있는 이 고분은 금관가야 지배층이 아닌 일반인들이 묻혔던 곳으로 덧널무넘, 구덩식돌넛무덤, 독무덤, 앞트기식 돌방무덤 등 총 181기의 고분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고분군은 가야시대에 존재했던 다양한 형태의 무덤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변천한 가야의 매장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며 약 2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은 대부분 부산대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고 하며 일부는 김해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예안라 고분군은 도로변에 있는 밭에서 발견된 것으로 얼마전까지는 다..

김해 구지봉, 금관가야 탄생 설화인 구지가(龜旨歌)의 무대

김해 시내에서 약간 북쪽에 자리한 구지봉은 가야 건국 설화의 무대이자, 수 많은 학생들이 국어 시간에 배워야만 하는 '구지가'의 무대이기도 하다. 구지봉은 김해박물관 바로 올라갈 수 있는 뒷동산이자 수로왕비릉을 통해서도 올라 갈 수 있다. 구지봉의 생김새는 구지봉 뒷산과 연결하여 거북이의 머리 부분과 비슷하고 목부분에 수로왕비릉이 자리잡고 있고, 지금은 도로가 있어 꼭 목이 잘린 것 처럼 보인다. 구지봉 정상에 올라서면 조선시대 명필 한석봉이 '구지봉석'이라고 끌씨를 적어놓은 고인돌과 중간 누가 세워 놓은 지는 알 수 없는 바윗돌이 서있다. 수로왕비릉에서 구지봉으로 오르는 길. 수로왕비릉 서쪽편 문인 구지문을 통해 구지봉으로 올라올 수 있는데, 오르는 길에는소나무 숲이 조성되어 있다. 구지봉 옆으로 난 ..

김해 수로왕비릉 (사적74호), 구지봉 아래 목부분에 자리잡은 수로왕비 '허황옥' 릉

김해 북단에 자리잡은 김해 허씨의 시조이자 가야를 건국한 수로왕의 왕비인 '허황옥'의 능이다. 위치를 잘보면 가야 건국설 의 "구지가"와 관련된 구지봉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멀리서 보면 구지봉이 거북의 머리라고 보면 수로왕비릉이 자리한 위치가 목부분에 자리잡고 있으며, 남쪽의 수로왕릉과는 수백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면서 구지봉을 지키고 있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의 왕비는 성은 허, 이름은 황옥으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배를 타고 왔다고 전해진다. 허황옥이 낳은 왕자 중 2명에게 왕비의 성을 주어 김해 허씨가 이들의 후손이라고 한다. 왕릉 앞에는 인도에서 가져왔다는 돌로 쌓은 파사석탑이 있어 전설이 신빙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무덤의 형식은 수로왕릉과 비슷한 형식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

김해 수로왕릉(사적73호), 납릉으로도 불리는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무덤

김해시 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가락국이라고도 불리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의 무덤인 사적 73호로 지정된 수로왕릉이다. 금관가야의 왕궁이 있었다고 하는 주거유적지인 봉황동유적지 북쭉편, 지배층의 무덤인 대성동고분군과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수로왕릉의 축조연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고려문종대에 부분적으로 수리가 있었다고 선조대인 1580년(선조13)에 대대적으로 개축하였으며 인조대와 고종대와 숭전전을 비롯하여 사당과 제실건물들이 증축되었다고 한다. 수로왕릉은 봉분의 높이가 약 5m로 신라의 고분이나 왕릉, 가야의 고분들에 비해서 봉분은 크지 않으며, 그 형식은 오히려 조선시대 왕릉에 가까워 보이는 무덤이다. 지봉유설 기록에 의하면 능의 구조는 큰 돌방무덤 형식을 하고 있으며, 일본인들이 이 무덤을 도굴하였는..

창녕 교동고분군 (A군), 비화가야 왕들의 묘역

창녕 고동고분군은 창녕에서 밀양으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는 5~6세기 경 비화가야 왕들의 무덤이다. 창녕중심부에서 화왕산 북쪽방면으로 나가는 고갯길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도가 고분군 중심을 지나고 있다. 편의산 국도를 기준을 서쪽을 A군, 동쪽을 B군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특별한 차이는 없어 보인다. 가야 고분을 특징을 들라면 다른 지역과는 달리 산능선을 따라서 고분이 분포되고 있는데 이는 신라나 백제, 마한의 고분에서는 볼 수 없는 가야 고분만의 특징이다. 그래서 가야 고분이 있는 곳에 올라서면 주변이 거의 확 틔여있어서 아주 기분이 상쾌하고 마음이 넓어지는 느낌을 가질 수 있다. 이 곳 창녕 교동고분군의 특징을 들라면, 높은 곳이 있는 고분은 봉분주위에 호석을 쌓아 놓은 것이 많고 아래쪽은 거의..

함안 아라가야 유적지, 도항리.말산리 고분군

가야 연맹체의 하나인 아라가야 유적지가 있는 경남 함안에는 군청이 있는 가야읍 도항리, 말산리에 수십기의 가야시대 고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넓은 평지 지역에 속하는 함안군의 중심지 낮은 야산에 자리하고 있는 이 고분군에서는 가야를 대표하는 '수레바퀴모양 토기'를 포함하여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고령 대가야 고분군에 비해 낮은 야산에 고분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아라가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도항리.말산리고분군에서는 '수레바퀴모양 토기'외에도 상당히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는데, 특히 마갑총에서 출토된 말갑옷은 고구려벽화 등을 통해서 묘사되고 있는 삼국시대 고구려 철기병이 사용했던 것 말갑옷의 실체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중요한 유물이다. 아라가야는 낙동강과 지류인 남강이 만나는 ..

김해 봉황동유적지 (사적2호), 초기 금관가야의 주거유적지

김해 봉황동 유적은 김해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김수롱왕릉 정면에 위치한 봉황대라고 불리우는 구릉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생산유적이다. 이 일대는 일찍이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으며,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2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황동유적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곳으로 남동쪽의 조개무덤인 회현리패총과 봉황대 일대의 주거유적을 합쳐서 봉황동유적지로 확대지정되어 있다 봉황동유적지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선사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집터와 조개더미로 이루어진 곳으로 실제로 눈에 보..

창원 다호리 고분군(사적 327호), 주남저수지 부근 습지에 존재했던 초기 가야 유적지

창원 다호리 유적은 낙동강이 만든 습지와 그 주변에 만들어진 무덤, 생활공간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유적이다. 1988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이 여덟 차례에 걸쳐 가야 초기의 널무덤 70여기와 삼국시대의 돌덧널무덤, 돌방무덤 등이 발굴조사 되었다. 창원 다호리는 낙동강 주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 동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로 습지가 다호리 마을 입구까지 연결되어 있다. 창원 다호리는 낙동강 하류 습지인 주암저수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낙동강 이북 밀양지역, 큰 항구인 마산항, 금관가야 중심지였던 김해, 비화가야가 있었던 창녕지역과 육로와 낙동강 수로를 통해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로 고대에는 중국.일본,한반도 내륙과 교역을 통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호리 지역은 습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초기 가야의 한.중.일 무역 거점 사천 늑도

남해안 삼천포항 앞 바다에 위치하고 있는 사천 늑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고대 한.중.일간의 중요한 무역로 위치하고 있어 고대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주로 청동기에서 철기로 바뀌어가는 초기 철기시대 유물들이 주로 발굴되고 있는데 일본 야요이시대 토기, 중국계 유물인 낙랑토기, 중국 진(秦)나라 화폐인 반량전(半兩錢)도 발견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아름다운 다리로 잘 알려진 삼천포대교를 지나면 늑도를 포함하여 4개의 작은 섬이 있다. 첫번째 섬인 늑도에서 삼한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가면 유적지가 어딘지 찾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섬전체에서 골고루 유물이 발굴되어서 그런것으로 보인다. 삼천포항과 남해 창선도 사이의 작은 섬 늑도입니다...

김해 대성동고분군(사적341호), 대표적인 금관가야 고분

김해시 구도심 중심부에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금관가야를 대표하는 김해 대성동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은 길이 약300m, 높이 20m정도의 구릉지대에 자리잡고 있으며, 다른 지역의 가야고분군들과는 달리 거대한 봉분을 만들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금관가야가 자리잡고 있던 김해중심부에 건국설화와 관련된 구지봉, 대성동고분군, 수로왕릉, 봉황동유적지가 하천을 따라 남북으로 일렬로 배치되어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대성동고분군은 1~5세기에 걸친 오랜 시기에 걸쳐서 조성된 무덤군으로 평지에는 1~3세기 무덤이, 구릉 정상에는 4~5세기 무덤이 밀집되어 있다. 특히 기존의 무덤위에 새로운 무덤을 중복 축조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이지역 지배세력의 교체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출토된 유물로는 중국제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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