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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김해 봉황동유적지 (사적2호), 초기 금관가야의 주거유적지

younghwan 2012. 4. 16.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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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해 봉황동 유적은 김해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김수롱왕릉 정면에 위치한 봉황대라고 불리우는 구릉과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생산유적이다. 이 일대는 일찍이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으며,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적2호로 지정되어 있는 봉황동유적은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 이루어졌던 곳으로 남동쪽의 조개무덤인 회현리패총과 봉황대 일대의 주거유적을 합쳐서 봉황동유적지로 확대지정되어 있다 

 봉황동유적지는 우리나라 대부분의 선사유적지와 마찬가지로 집터와 조개더미로 이루어진 곳으로 실제로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유물을 볼 수는 없지만, 가야시대의 고상가옥 등을 복원하여 도심의 작은 공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봉황대는 낮은 구릉을 중심으로 정상부에 황세바위, 여의각 등이 있으며, 김해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황세바위 앞에는 가락국의 천제단을 만들어 놓고 있다. 회현리 패총이 있는 동남쪽에 고상가옥과 주거지를 재현해 놓고 있으며, 고상가옥 건물터가 있었던 봉황대동쪽 해반천변에도 망루와 창고로 쓰였던 고상가옥과 가야의 해상교역 모습을 보여주는 선박을 연못에 복원해 놓고 있다.



금관가야 중심지인 김해 구도심 남쪽편에 위치한 가야의 생활유적지인 봉황대유적지. 낮은 구릉 주위로 초기 가야의 주거유적과 패총이 발견된 곳으로 남쪽으로는 넓은 김해평야와 낙동강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분산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 평야지대에서 위치한 낮은 구릉으로 목책을 설치하여 외부의 침입에 대비할 수 있는 고대 성읍국가의 입지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지역이다. 봉황대 동쪽편으로는 해반천이 흐르고 있다.


봉황대 서쪽편에는 창고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유적과 선박접안시설 등이 발견되어 이 곳이 금관가야 교역의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곳을 정비하면서 옛가야의 생활모습을 체험할 수 있는 고상가옥과 가야선박을 재현해 놓고 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고상가옥 건물터와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집모양토기를 참조하여 복원한 고상가옥. 곡식이나 물건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례의식과 관련된 건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곳에 다수의 고상가옥 건물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교역에 필요한 물품들을 저장하는 창고로 추정하고 있다.

고상가옥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된 가야시대 고상가옥건물지와 가야시대 집모양토기를 참조로 하여 추정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건물바닥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인데,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용도의 건물이 많다. 가야시대 접안시설이 있었던 것을 추정되는 해반천변에 입지한 조건이나 구조 및 열을 지어 다량으로 분포하고 있는 덤 등으로 보아, 이곳에서 발굴된 고상가옥들은 대외교역을 위한 창고시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출처:김해시청>


봉황대 유적지 연못에 복원해 놓은 가야시대 선박. 한.중.일 해상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유지했던 가야시대에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 선박이다. 실제모습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배모양토기를 참조하여 복원한 모습이다. 수량이 많지 않은 좁은 수로를 항해할 수 있도록 날렵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가야의 배
가야는 고대 동아시아의 여러지역과 교역을 통해 성장한 정치체이며 수로와 해로를 통하여 왜와 한사군에도 철기를 수출하였다. 가야의 배는 현재까지 실물이 발굴된 사례는 없으나 가야시대의 배를 본 떠 만든 배모양 토기가 여러점 남아 있어 구조황 형태, 크기 등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에 복원된 배는 호림박물관에 소장된 배모양토기를 토대로 당시으 항해술과 선박의 구조 등을 고려하여 제작한 것으로, 가야시대 조선술과 선박구조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출처:김해시청>


가야시대 선박접안시설을 재현해 놓고 있는 연못


선박 접안시설 뒷편에 복원해 놓은 망루


가야시대 황세장군의 사랑과 관련된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봉황대 정상의 황세바위.


황새바위 아래 김해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는 구릉에 가락국 전체단을 만들어 놓고 있다. 원래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고 후대에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김해 도심 북동쪽에 위치한 김해를 지키는 방어시설인 분산성. 가야에서는 산성을 쌓지 않았기때문에 산성을 도입한 신라 이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김해 동남쪽 시가지. 낙동강이 흐르고 넓은 김해평야가 펼쳐지는 곳이다. 멀리 보이는 산은 부산의 금정산 주변이다.


봉황대 서쪽편에 있는 해발 178m의 임호산. 금관가야 중심지를 방어하는데 적합한 지형조건이라 할 수 있다.


봉황대 산책길


봉황대유적지 동남쪽 언덕 아래에 복원해 놓은 가야시대의 수혈주거지와 고상가옥.


가야시대의 수혈주거 가옥. 원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고 봉황대 진입도로내 주거유적을 참조하여 만들었다. 주거형태는 난방을 위해서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이다.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집모야토기를 참조하여 복원한 창고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상가옥


가야시대에 만들어진 집모양토기

고상가옥과 주거
여기에 복원된 고상가옥과 주거 등은 봉황동유적에서 발굴조사된 가야시대 건물지 등을 참고로 하여 2002년 봉황동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한 것이다. 가야시대의 일반적인 주거형태는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인데, 여기에 복원된 수혈주거지는 봉황대 진입 소방도로내 유적 제46호 주거지를 참조하여 추정복원한 것이다. 고상가옥은 가야시대의 보편적인 주거형태인 수혈주거와 달리 바닥면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로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 많다. 즉, 고상가옥은 난방시설이 용이하지 않아 일반주거용 건물로는 부적합하지만 지면보다 휠씬 높은 위치에 만들어져 짐승과 습기, 침수 등으로부터 방해, 방재의 효과가 있기 때문에 창고 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김해시청>


봉황동 유적지 동남쪽 회현리 패총으로 나가는 길


봉황대 동남쪽에 위치한 회현리 패총. 이 곳에서는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중국 왕망시대의 동전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회현동 패총 유적지 발굴당시 모습


항아리(Jar with shert necked), 김해 봉황동


주거유적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에 해당하는 방어시설인 목책을 재현해 놓고 있다.

김해 봉황동유적, 사적2호
가야시대 대표적인 조개무덤으로 1907년 우리나라 최초로 고고학적 조사가이루어졌던 회현리 패총과 금관가야 최대의 생활유적지인 봉황대가 합쳐져서 2001년 2월 5일 김해 봉황동 유적으로 확대지정되었다. 패총에서는 소위 김해식 토기와 각종 철기, 골각기 등과 함께 중궁 왕망시대(8~23년)의 '화천'이라는 동전이 출토되어 당시의 교역상황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 최초로 불에 탄 쌀이 출토되어 쌀농사의 기원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었다. 또한 구릉위에는 황세장군과 여의낭자의 전설과 관련된 여의각, 황세바위 등이 남아 있으며 가야시대 고상가옥, 주거지 등이 발굴되었다. 2002~2005년 해상포구, 고상가옥, 수혈주거, 망루, 목책 등을 복원 정비하였으며 1999년 3월 부산대박물관에서 회현리 패총을 채발굴하여 2006년 단연전시관 형태로 개관하였다. <출처:김해시청>


다음 스카이뷰로 본 김해봉황동 유적지입니다. 수로왕릉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패총은 조개껍질과 생활 쓰레기가 함께 버려 쌓여 있는 곳으로,‘조개더미’라고도 하며 당시 생활모습을 알 수 있는 장소이다. 봉황대 언덕 근처에 서로 시기가 다른 회현리 조개더미와 무덤유적이 있다. 회현리 조개더미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토기, 뼈·뿔도구, 석기, 가락바퀴(방추차), 불탄쌀(탄화미), 중국 화폐인 화천, 동물뼈 들이 나왔다. 토기는 적갈색이나 회청색을 띠며, 사슴뿔이나 뼈를 가공해 만든 칼자루가 많다. 불탄쌀은 고대의 쌀과 농경 연구에 큰 도움을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천은 중국 신(新)나라의 왕망이 기원전 14년에 만든 화폐로 유적이 형성된 연대를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며 중국과의 왕래도 짐작하게 한다. 조개더미의 동쪽에서 고인돌, 항아리에 뼈를 넣었던 독무덤(옹관묘), 집터가 발견되었다. 무덤들은 청동기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해봉황동유적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1∼4세기경 생활모습을 짐작할 수 있는 유적이다. <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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