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 History Traveling
반응형

삼국시대 유적_고분 108

군포 산본동 고분군, 경기도박물관에 이전 복원된 통일신라고분

경기도 군포시 산본동에 일대에 있었던 통일신라시대 고분들 중 일부를 경기도박물관 마당에 옮겨 놓은 것이다. 아마도 산본에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발굴조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는 9기의 고분이 발굴조사되었는데 그 중 1,2,3호분만 이전 복원되어 있다. 봉분의 크기는 삼국시대나 통일신라시대 귀족의 무덤에 비해서 그 크기가 작은 편이지만 일반적인 무덤에 비해서는 큰 편이다. 고분내 발굴된 유물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고 경기도박물관 내에 전시된 유물이 없는 것으로 볼 때 중요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산본은 고대 이래로 한반도 연안항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대부도 안쪽의 안산과 가까운 곳으로 세력이 크지는 않지만 통일신라의 지방 귀족층이 살았던 지역으로 보인다. 경기도박물관 야외에 이전되어 있는..

경주 불국사 석축, 평지 사찰처럼 만들어주는 신라의 건축기술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재된 경주 불국사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대성에 의해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다. 탑, 금당, 강당, 회랑 등으로 구성된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 초기까지 전형적인 사찰의 가람배치를 유지하면서도 지금은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등으로 이루어진 개별 영역으로 나누어진 독특한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원래는 5개 영역이지만 극락전 뒷편은 현재까지도 복원되어 있지는 않다. 불국사의 불전들은 오랜 세월 동안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그 이름과 용도는 바뀌었다고 볼 수 있지만, 기본적인 가람배치와 석축 들은 원래의 상태를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불국사 가람배치와 사찰 조성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점이자 다른 사찰과는 다른 독특한 품격을 보여주는 ..

충주 누암리 고분군 (사적 463호),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장악하고자 이주시킨 귀족들의 무덤

충주시 가금면 누암리 일대에 남아 있는 누암리고분군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일대를 장악하면서 이 지역을 경영하고자 했던 의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유적지로서 이 일대에는 약 230여기의 고분이 있다고 한다. 이 지역은 신라와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장악하기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던 지역으로 누암리고분군들의 주인은 진흥왕이 이 지역으로 이주시킨 신라귀족들로 추정하고 있다. 그 중 앞쪽에 위치한 고분은 그 규모나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진골신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누암리고분군이 있는 가금면 일대에는 고구려가 쌓은 산성인 장미산성을 비롯하여 충주 고구려비 (국보205호), 충추 탑평리 칠층석탑(국보6호), 우륵이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전해지는 탄금대 등의 유적지들이 남아 있다. 현재 사적 463호로 지정된 누암리고분군..

경주 노서리 고분군, 금관이 최초 발견된 금관총을 비롯하여 서봉총, 호우총이 있는 경주 도심의 고분군

삼국시대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서북방향으로는 신라 황금문화 절정기인 마립간 시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군을 들어서 있다. 마립간시기는 내물왕에서 왕이란 호칭을 처음사용한 지증왕 이전까지인 4~5세기를 말하며, 돌무지덧널무덤과 화려한 황금문화 등 신라문화를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났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노서리, 노동리, 황오동, 미추왕릉지구 등으로 구분하여 사적지로 관리했는데 이들 고분들은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출토유물이나 무덤의 조성방식에서도 동일한 특징을 보이기때문에 지금 대릉원으로 일괄하여 부르고 있다. 노서리고분군은 신라왕릉에서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어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한 금관총을 비롯하여, 스웨덴국왕이 황태자 시절 경주를 방문하여 무덤발굴에 참여하여 금관을 ..

경주 노동리 고분군, 신라 최대의 고분인 봉황대와 식리총,금령총

경주 노동리고분군은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 북서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마립간시기의 신라 왕과 귀족들을 무덤인 대릉원의 끝단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원래는 여러지역으로 나뉘어 관리되어 노동리고분군이라고 했지만, 대릉원 주변 고분들은 시기적, 지리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대릉원의 일부로 분류하고 있다. 이 곳은 경주도심과 제일 가까이 있는 까닭에 가장 빠른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노동리고분군은 왕릉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봉황대와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현재 봉분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는 금령총과 식리총이 있다. 금령총은 봉황대 남쪽에 있는 작은 봉분으로 1924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발굴이 되었었는데 구조는 ..

경주 황남동고분군, 계림 서쪽편 이름없는 4기의 고분

경주 황남동고분군은 신라의 황금시대라 할 수 있는 내물왕에서 지증왕까지의 마립간시기에 조성된 신라 지배층의 무덤이 다수를 이르는 경주 대릉원을 중심으로 널리 분포되어 있는 고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고분들은 금관을 비롯하여 화려한 금.은을 비롯한 금속세공품, 화려한 토기와 서역에서 수입한 유리잔 등 오늘날 남아 있는 삼국시대 신라를 대표하는 유물들 상당수가 이곳에서 출토되었다. 이 지역고분들은 월성북쪽 계림 앞에 있는 내물왕릉을 비롯하여, 김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른 미추왕릉, 화려한 유물들이 출토된 천마총과 황남대총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무덤들이 평야지대 들판에 분포하고 있다. 황오동의 쪽샘지구나 대릉원 입구처럼 왕릉 사이에 주택가가 형성된 곳도 있고, 고분 주변을 논밭으로 경작하던 곳도 있었다...

경주 오릉 (사적 172호),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초기 박씨 왕들의 무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와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과 박혁거세의 왕후 알영부인이 묻혔다고 전해지는 경주 오릉은 궁성이었던 월성 서쪽편으로 자리잡고 있다. 5개의 봉분이 같은 지역에 모여 있는데 대릉원 지역에 있는 다른 봉분들과 마찬가지로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원형 봉토분으로 실제로는 이런 형태의 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에 등장한 무덤의 형태라고 하며, 후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앞쪽에 있는 1호 무덤은 높이 10m로 큰 편이며, 뒷편에는 봉분 2개가 같이 표주박형이다. 각 무덤의 실제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경주 대릉원의 미추왕릉이나 김해의 수로왕릉 처럼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씨 시조의 무덤으로 제단이 설치되는 등 성역화되어 있는 무덤이다. 경주 오릉이 ..

경주 불국사 연화교.칠보교 (국보 22호), 극락전을 오르는 계단

불국사 극락전을 오르는 아름다운 계단인 국보 22호로 지정된 연화교와 칠보교이다. 연화교.칠보교는 다리형태로 계단을 만들었는데 청운교.백운교보다는 규모가 작고 소박해 보이는 형태이다. 연화교의 층계마다 특이하에 연꽃을 새겨 놓았다고 하는데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닳아서 지금은 이를 인식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불국사 불이문에서 숲속길을 걸어서 올라서 경내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이 연화교.칠보교와 청운교.백운교이며 많은 사람의 인식속에 남아 있는 장면일 것이다. 불국사 불이문에서 걸어서 올라오다 보면 처음으로 보이는 국보급 문화재인 연화교.칠보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는 모습을 상상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전체 18계단으로 이루졌는데 아래 10단은 연화교이고 위 8단은..

경주 진평왕릉 (사적 180호), 수.당 교체기 신라를 안정적으로 이끈 선덕여왕의 아버지

진평왕은 신라 26대왕 (재위 579~632)으로 진흥왕의 손자이자 선덕여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라 중흥기를 이끌었던 진흥왕 이후 신라가 삼국간 경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이루는 과정이었던 선덕여왕대까지의 과도기를 이끌었던 국왕으로 재위 기간이 52년에 이른다. 고구려의 장수왕, 조선의 영조에 비견할 만큼 오랜 기간 왕위에 머무르면서 국가의 안정을 꽤했던 왕이다. 진평왕 재위기간동안에는 수나라와 고구려간의 전쟁으로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들어서는 등 국제적으로 격변기였다고 할 수 있는 시기였다. 진평왕은 국내젹으로 여러 관청을 설치하는 등 내정을 안정시키고, 명활산성과 남산산성을 쌓는 등 경주 방위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수나라.당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삼국통일이 기틀을 마련하고 불..

경주 선덕여왕릉 (사적 182호), 경주 낭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최초 여왕의 능

선덕여왕은 신라 27대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이다. TV드라마를 통해서 잘 알려진대로 이름은 덕만이고 진평왕의 딸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은 내정에서는 선정을 베풀어 민생을 향상시키고 구휼사업에 많은 공을 들인 것으로 보인다. 자장법사를 중국에 보내 불법을 들여여고 많은 유학생들을 파견하여 당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는데도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경주의 대표적인 유적인 첨성대를 건립하였고, 분황사를 비롯한 많은 사찰들을 창건하고 황룡사 목탑을 세우는 등 불교를 크게 진흥시켰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백제와 신라의 적극적인 공세를 김유신과 김춘추를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당나라와는 외교적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선덕여왕의 능은 경주 남쪽 낭산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낭산은 남북으로 길게 누에고치..

경주 괘릉 석상 및 석주 일괄 (보물 1427호), 후대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던 사실적인 표현의 석상들

경주시 외동읍에 소재한 괘릉은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는 왕릉으로 신라왕릉 중에서는 형식적인 면을 제일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괘릉은 토함산자락이 들판과 만나는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으며, 봉문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으로 둘러져 있고 그 바깥쪽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만든 난간을 설치해 놓고 있다. 정면에는 서구의 신전 제단처럼 생긴 웅장한 상석이 놓여져 있다. 봉분에서 떨어진 입구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4마리의 사자상, 1쌍의 문.무인석과 석화표가 세워져 있다. 후대에 조성되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릉 구성에 있어서 모범이 되었던 왕릉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이고 후대 왕릉조성의 모범이 ..

경주 불국사 청운교.백운교 (국보 23호), 경주 수학여행을 대표하는 장면

석굴암과 더불어 경주와 불국사, 그리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한국에서 초.중.교를 다녔다면 반드시 이 곳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남아 있을 것이다. 불국사 중심영역인 대웅전 경내로 오르는 계단인 청운교.백운교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진 건축물 중 그 원형이 제대로 남아 있는 많지 않은 유물 중 하나이다. 이 다리는 속세의 영역과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물을 건너는 돌다리의 아치를 상징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이 청운교.백운교는 통일신라때 만들어진 다리임에도 불구하고 원형을 간직하고 있은 아주 아름다운 다리로 연화교.칠보교에 비해 아주 웅장하고 불국사의 권위를 느낄 수 있게 해 주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불국사 청운교 아치 아래로 흐르는 물을 상상하고 하는 곳이기도..

경주 신무왕릉 (사적 185호), 통일신라 후기 왕위쟁탈전을 통해 왕위에 오른 신무왕의 능

신무왕은 원성왕의 증손으로 흥덕왕 사후에 희강왕과 상대등이었던 균정의 왕위쟁탈 싸움에서 패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에 숨어 있다가, 민애왕 2년(839)에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같은해 병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문성왕과 동생 헌안왕이 뒤를 이었다. 왕족간의 왕위쟁탈전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신무왕.문성왕.헌안왕대의 통일신라는 장보고의 난을 비롯하여 끊임없는 귀족들의 반란이 있었던 시기로 신문왕의 왕릉은 문무왕대 이래로 왕릉이 주로 조성되었던 일본과의 교통로가 할 수 있는 경주와 울산간의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지만, 문성왕과 헌안왕의 능은 지방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륙과의 교통로인 경주.대구간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신무왕릉은 높이 3m, 지름 16m로 흙으..

경주 성덕왕릉 귀부, 생동감이 넘치는 거북받침돌

신문왕의 둘째아들이자 삼국통일을 이룬 문무왕의 손자인 성덕왕릉 앞에 세워졌던 비석의 받침돌이다. 비몸과 머릿돌은 남아 있지 않으며 거북머리 또한 남아 있지 않다. 비석으로서 전체적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 많지 않아서 국보나 보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조각수법이나 돌의 재질이 상당히 뛰어난 걸작으로 보인다. 거북은 모양은 근육질이 있어 보이는 크고 강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발은 앞으로 나아 가련는 형상이다. 비몸이 없어져서 비석에 적힌 내용은 알 수 없지만 경덕왕때 만들었다고 삼국사기 기록에 남아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통일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일명 '에밀레종'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성덕대왕신종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성덕왕은 당나라와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으며 유교를 적극적으로 ..

경주 효소왕릉 (사적 184호),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효소왕의 능

신라 32대왕(재위 692~702)인 효소왕은 신문왕의 큰 아들로 삼국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손자이기도 하다. 삼국통일 후 신라의 관제를 정비하고 당.일본 등과 수교하였다. 이학 교육기관인 의학을 설립하여 의학박사를 두고 중국 의학서를 교수하게 하고, 서시전과 남시전을 두어 경주의 시장을 활성화 시켰다. 동생인 성덕왕과 함께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왕으로 평가받고 있다. 효소왕릉은 경주 남쪽 불국사로 가는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생인 성덕왕릉과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다. 봉분은 밑둘레 57m, 지름 15.5m, 높이 4.3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봉토분으로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았으나 지금은 몇개만 드러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가 도입되기 직전에 조성된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쌓은 고분에서 비슷하게 ..

경주 서악동귀부 (보물 70호),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의 묘비

보물 70호로 지정된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앞 족에 남아 있는 서악동 귀부이다. 이 귀부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로 태종무열왕릉비와 함께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초기 비석의 형식을 잘 보여주는 조각상이다. 네발로 땅을 힘차게 디디고 있는 이 거북받침돌은 조각수법이나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릉비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거북받침돌은 후대에는 용의 머리로 바뀌는데 거북머리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비석은 서악서원에 출토된 비몸에 기록된 글과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김인문의 공적을 새겨놓았던 비의 받침돌로 추정하고 있으며, 머리부분인 이수는 남아 있지 않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이자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삼국통일전쟁에서 당과의 외교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죽..

경주 성덕왕릉 (사적 28호),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성덕대왕의 능

성덕왕과 효소왕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손자이자 신문왕의 아들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국도와 철도가에 토함산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이 평지와 만나는 곳에 나란히 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문무왕대에는 왜(倭)의 침입에 대해서 상당힌 긴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무왕의 능을 동해 대왕암에 수중능으로 마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들인 신문왕과 손자인 효소왕, 성덕왕은 일본이 침입할 수 있는 예상 통로라고 할 수 있는 울산과 경주를 연결하는 큰 길가에 나란히 마련하고 있다. 성덕왕은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노..

경주 계림 (사적 19호), 경주 김씨 시조 김알지 탄생 설화를 간직한 숲

경주 궁성인 월성(반월성)의 정문격이 북쪽 출입문을 나서면 서쪽편에 작은 숲을 볼 수 있다. 특별히 문화재로 분류할 수 있는 유적,유물이 발굴된 장소는 아니지만 신라 천년을 이끌어온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 탄생 설화가를 간직하고 있는 계림이다. 계림 내부에는 아주 오래된 고목들이 많아 하나의 독특한 숲을 이루고 있고 계림 끝부분에는 경주김씨 세습 체제를 구축한 내물왕릉이 자리잡고 있는 점은 우연이 아닌듯 하다. 이 숲 나뭇가지에 걸려 있던 금궤속에서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역사기록에 남아 있다. 경내세워진 비석은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현재 언덕처럼 보이는 곳이 신라의 왕궁이었으며, 계림과 첨성대가 있는 궁성 뒤편..

경주 태종무열왕릉비 (국보 25호), 후대 비석의 모범이 된 조각수법이 빼어난 걸작

국보 25호로 지정된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 앞에 세워진 비석이다. 김춘추라는 본명도 같이 잘 알려져 있는 태종무열왕은 김유신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키는 등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왕릉이 입지한 지역은 경주 형산강 서쪽 선두산 아래 대구와 영천으로 연결되는 옛 국도가 지나가는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삼국통일을 염두에 두었던 당시 경주를 위협할 수 있는 한반도 내륙 한강유역과 경주를 연결하는 교통로에 그의 능을 둠으로써 경주를 찾는 사람들이 그의 능을 잘 볼 수 있게 하고, 신라 내부적으로 경주 서쪽의 방어에 크게 신경을 써야 한다는 왕릉 조성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태종무열왕릉비는 현재 비몸은 일부 파편만 남아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현재는 비각안에 거북모양의 받침돌인..

경주 구정동 방형분 (사적 27호), 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는 특이한 신라 귀족층 무덤

경주 구정동 방형분은 사적 27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 귀족층의 무덤이다. 불국사역 부근 경주에서 불국사로 들어가는 길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는 이 고분은 봉분의 형태가 정사각형으로 되어 있어서 방형분으로 불린다. 신라의 무덤 중에서는 유일한 사각형 무덤으로 그 형태는 고려전기에 무덤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와 경주를 대표하는 유적지인 불국사를 들어가느 길 입구에 위치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 고분의 존재에 대해서는 인지했을 수 있지만, 지나치는 길에 있어서 방문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곳이다. 무덤내부는 발굴이 이루어졌는데 봉분의 남쪽에 출입구가 있는 형태로 직사각형으로 축조된 굴식돌방무덤을 하고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동관장식구.은제띠고리.은제행엽 등이 있다고 하며 경주박물관에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