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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괘릉 석상 및 석주 일괄 (보물 1427호), 후대 왕릉 조성의 모범이 되었던 사실적인 표현의 석상들

younghwan 2011. 10. 3. 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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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외동읍에 소재한 괘릉은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되고 있는 왕릉으로 신라왕릉 중에서는 형식적인 면을 제일 잘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여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괘릉은 토함산자락이 들판과 만나는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으며, 봉문은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둘레석으로 둘러져 있고 그 바깥쪽에는 잘 다듬은 화강석으로 만든 난간을 설치해 놓고 있다. 정면에는 서구의 신전 제단처럼 생긴 웅장한 상석이 놓여져 있다. 봉분에서 떨어진 입구에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4마리의 사자상, 1쌍의 문.무인석과 석화표가 세워져 있다. 후대에 조성되는 고려와 조선시대의 왕릉 구성에 있어서 모범이 되었던 왕릉이라 할 수 있다.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이고 후대 왕릉조성의 모범이 되었던 괘릉의 석상과 석주는 최근인 2005년에 보물 1427호로 지정되었다. 괘릉의 석상 중 무인상은 그 생김새가 서역인의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어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를 나타내는 유물로 여겨지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처용가'에 등장하는 처용을 일컫는다고 한다. 문인상 또한 후대 왕릉의 문인상이 나약한 문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점과는 달리 강하고 힘찬 모습을 하고 있다. 왕릉을 지키는 성서러운 동물인 사자상은 각 방향으로 얼굴을 향하고 있으며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머금고 있다. 사자는 불교에서 중요시하는 성서러운 동물로 조선시대 왕릉에는 호랑이(석호)와 양(석양)으로 바뀌었다. 괘릉을 지키는 석물들은 그 내용에 있어서 약간 차이는 있지만, 조선시대 왕릉 석물의 구성의 기본이 되는 것들이다. 또한 조선왕릉은 석물들을 봉분 바로 앞에 배치하고 있지만 괘릉의 석물은 봉분에서 떨어진 앞 쪽에 위치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경주 괘릉 능역을 들어서면 능역을 구성하는 소나무숲 안쪽으로 석물들이 도열해 있는 모습이고, 그 안쪽에 봉분이 자리하고 있다.


서역인의 얼굴 특징이 잘 담겨져 있는 무인석 얼굴. 많은 사람들이 통일신라 향가인 '처용가'와 민간신앙에 전래되는 처용의 얼굴이라고 여기는 석상의 얼굴이다. 통일신라시대 서역과의 교류관계를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동쪽편 무인석 얼굴.


무인석의 복식과 무기. 한반도 고유의 검이라고 할 수 있는 환두대도를 하고 있다.


괘릉 입구에 도열해 있는 1쌍의 무인석. 조각수법이 매우 사실적이고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다. 후대 조선왕릉 무인석은 형식적인 표현을 하고 있는데 비해서 실제 인물을 조각했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무인석과 나란히 도열해 있는 1쌍의 문인석. 강건한 느낌을 주는 석상으로 당시 관료들의 복식을 보여주고 있는 유물이기도 하다.


문.무인석의 뒷모습. 사실적인 표현이 돋보인다.


동쪽과 남쪽편을 바라보면서 왕릉을 지키고 있는 서쪽편 사자석. 불교를 숭상했던 통일신라시대라서 그런지 불교에서 숭상하는 동물인 사자상을 세워놓고 있다. 조선왕릉에서는 석양과 석호(호랑이)가 대신 왕릉주변에 세워져 있다.


북쪽과 서쪽을 바라보면서 왕릉을 지키고 있는 동쪽편 사자상. 특히 북쪽을 지키는 사자상은 매우 생동감있게 조각해 놓고 있다.


괘릉 입구를 지키는 1쌍의 화표석. 왕릉 입구임을 알려주는 표시를 알려주는 것으로 보인다.


괘릉 서쪽편 석상.


동쪽편 석상


괘릉에서 내려다 본 입구의 석상들


조선 왕릉과 비교해 보면 석상과  석물들이 조선왕릉은 봉분 앞에 세워져 있으며, 문.무인석과 함께 석마가 추가되어 있다. 왕릉 앞에 세워진 석등 또한 괘릉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사자상을 대신하여 석호와 석양이 봉분 주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봉분 앞에 세워진 제단 또한 4발이 달린 혼유석으로 바뀌었다. 화표석 대신 망주석이 세워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괘릉에 세워진 석상에 비해 사실적인 표현은 줄어들고 만화같은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경주 괘릉 석상 및 석주 일괄 (보물 1427호),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 산17
이 곳 괘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가운데 가장 발달한 능묘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주변의 석물 배치나 조성기법도 훌륭하아. 왕릉 입구에는 압쪽으로부터 화표석.무인석.문인석 각 1쌍과 돌사자 4마리가 배치되어 있다. 이들 석물들은 동서로 약 28m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이 중엔 무인석은 괴량감과 아울러 박진감 넘치는 석조물로 그 얼굴에 서역인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통일신라가 서역과도 활발한 문물교류를 하였음을 보여준다. 1쌍의 문인석도 그 늠름한 모습이 다른 능묘의 문인석에서 느껴지는 나약함과는 다르게 강건한 점이 인상적이다. 2마리씩 나누어 마주보고 있는 사자는 동남쪽과 서북쪽의 것이 정면을 지키고, 서남쪽과 동북쪽의 것은 각각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려 남쪽과 북쪽을 지키게 하는 기발한 배치방법을 사용하였다. 4마리의 사자는 모두 자신감 넘치는 웃음을 머금고 있으며, 특히 북쪽을 지키는 사자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은 보는 이의 감탄을 자아낸다. 이들 석조물들은 괘릉 봉토 주위의 12지신상과 더불어 8세기말 신라인의 문화적 독창성과 예술적 감각을 웅변하여 주는 걸작이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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