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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신무왕릉 (사적 185호), 통일신라 후기 왕위쟁탈전을 통해 왕위에 오른 신무왕의 능

younghwan 2011. 10. 3.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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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무왕은 원성왕의 증손으로 흥덕왕 사후에 희강왕과 상대등이었던 균정의 왕위쟁탈 싸움에서 패하여 청해진대사 장보고에 숨어 있다가, 민애왕 2년(839)에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대군을 이끌고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같은해 병사하였다고 한다. 그의 아들 문성왕과 동생 헌안왕이 뒤를 이었다. 왕족간의 왕위쟁탈전을 통해 왕위에 올랐던 신무왕.문성왕.헌안왕대의 통일신라는 장보고의 난을 비롯하여 끊임없는 귀족들의 반란이 있었던 시기로 신문왕의 왕릉은 문무왕대 이래로 왕릉이 주로 조성되었던 일본과의 교통로가 할 수 있는 경주와 울산간의 국도변에 위치하고 있지만, 문성왕과 헌안왕의 능은 지방호족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내륙과의 교통로인 경주.대구간 교통로에 위치하고 있다.

 신무왕릉은 높이 3m, 지름 16m로 흙으로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자연석으로 둘레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성덕왕, 원성왕의 능에서 볼 수 있었던 당의 능묘제도에 영향을 받은 문.무인석을 비롯한 석물이나 십이지신상을 새겨놓지 않고 있어서 그 전대에 조성된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문성왕이나 동생인 헌안왕의 능도 신무왕과 비슷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비용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국도변인 경주시 동방동 마을 뒷산에 위치하고 있는 신라 45대 신무왕의 능. 원성왕의 괘릉이나 성덕왕릉에 비해서 왕릉의 조성이 간결하고 큰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너무 깨끗하게 보여 원래부터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는 작은 규모의 상석이 놓여져 있다.


봉분을 둘렀던 둘레석을 이루었던 자연석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무왕릉 전경. 신무왕릉은 통일신라 후기의 왕위쟁탈전 과정에서 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던 왕으로 풍수상으로나 왕릉의 조성이라는 측면에서 입지는 그리 좋지 않은 편이라 한다.


경주 서악동 선두산 아래에 조성되어 있는 신무왕의 아들인 문성왕과 동생인 헌안왕의 능. 진흥왕릉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호족세력을 견제하고자 하는 뜻을 나타내고자 했는지 신라왕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진흥왕과 진지왕의 능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신무왕릉과 마찬가지로 석물과 둘레석의 십이지신상을 하지 않은 간결한 형태이다.


신무왕의 능



신라 신무왕릉 (사적 185호), 경주시 동방동 660
이 능은 신라 45대 신무왕(재위 839, 김우징)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크기는 높이 3m, 지름 16m이며,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이다. 봉분의 바닥에는 둘레돌로 보이는 자연서이 노출되어 있다. 이처럼 자연호석을 사용한 양식과 풍수지리상의 명당이 아닌 점에서 성덕왕릉 보다 먼저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무왕은 원성왕의 증손으로 839년에 장보고의 힘을 빌어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으나 그 해에 병으로 죽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왕이 돌아가시자 제형산 서북쪽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이 무덤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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