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70호로 지정된 경주시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앞 족에 남아 있는 서악동 귀부이다. 이 귀부는 비석을 받치는 거북받침돌로 태종무열왕릉비와 함께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진 초기 비석의 형식을 잘 보여주는 조각상이다. 네발로 땅을 힘차게 디디고 있는 이 거북받침돌은 조각수법이나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릉비와 쌍벽을 이루는 작품으로 사실적이면서도 생동감이 넘친다. 거북받침돌은 후대에는 용의 머리로 바뀌는데 거북머리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비석은 서악서원에 출토된 비몸에 기록된 글과 삼국사기 기록으로 볼 때 김인문의 공적을 새겨놓았던 비의 받침돌로 추정하고 있으며, 머리부분인 이수는 남아 있지 않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이자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삼국통일전쟁에서 당과의 외교에 큰 공헌을 한 인물로 죽기전에는 당나라에 오랜기간 머물렀다고 한다. 그는 서해안 보령지역을 영지로 받았으며, 그의 영향아래에 세워진 사찰이 절터만 남아 있는 보령 성주사이다. 이 비석에는 400여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그 내용은 태옹무열왕이 김인문을 압독주 총관으로 제수한 사실, 백제를 항복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한 사실 등이 새겨져 있다.
보물 70호로 지정된 서악동귀부. 머릿돌인 이수와 몸비는 이 곳에 남아 있지 않고 거북받침돌만 김인문의 묘 앞에 남아 있다. 태종무열왕릉비와 형식이나 모양에서 큰 차이가 없어며 화강석을 다듬은 조각기술이 상당히 세련되어 보인다. 천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화강석 자재의 선택에서부터 조각수법에 이르기까지 뛰어난 조각기술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태종무열왕릉비와 마찬가지로 정면에서 볼 때 거북의 얼굴이나 자세가 상당히 위압감을 주고 있는 모습이다.
후대에는 용의 얼굴로 바뀌게 되지만, 태종무열왕릉비와 함께 거북머리 원형를 유지하고 있는 초기 귀주의 모습이다.
땅에 발을 딛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태종무열왕릉비는 발가락이 4개인데 비해 이 거북받침돌은 발가락이 5개이다.
거북받침돌에서 비몸을 올렸던 네모난 홈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주위에는 연꽃무늬로 장식을 하고 있다.
김인문묘 비, 경주 서악동 출토, 695년. 인근 서악서원에서 1931년에 발견된 비몸. 한쪽면에만 약 400여자의 글씨를 새겨놓고 있는데, 그이 업적에 대한 기록들이다.
김인문(629~694)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나 문무왕의 친동생으로, 삼국 통일기 당과의 외교에서 큰 활약을 한 인물입니다. 그의 묘는 경주 서악동 태종무열왕릉 앞에 있으며, 묘 옆에는 이 비석을 꽂았던 귀부가 남아 있습니다. 이 비석은 1931년 서악서원 서쪽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비의 아래 부분인 이 비석은 한쪽 면에만 3.3cm 크기로 네모 칸을 치고 해서체로 약 400여자 새겼습니다. 그 내용은 대체로 태종무열왕이 김인문을 압독주 총관으로 제수한 사실, 백제를 항복시키고 고구려와의 전쟁에 참여한 사실 등이 새겨져 있습니다. 비문에는 비석을 세운 기록은 없지만 '삼국사기'에 695년 경주 서쪽에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비석 역시 695년에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출처:경주박물관>
연꽃문양아래에는 벌집모양의 육각형 무늬를 한줄 새겨 놓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구름문양을 새겨놓고 있는데 조각솜씨가 상당히 빼어나다.
거북 등딱지에 새겨진 육각무늬.
앞쪽에서 본 생동감 넘치는 거북받침돌
옆쪽에서 본 모습
뒷쪽에서 본 거북받침돌
서악동 귀부가 있는 비각.
비각 윗쪽에는 김인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고분이 있다.
경주 서악동귀부 (보물 70호), 경주시 서악동 1006-1
서악리 태종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남아있는 것으로,『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찾아낸 비석조각에 새겨진 글로 미루어, 김인문(629∼694)의 공적을 새겨놓았던 비의 받침돌인 것으로 짐작된다. 네 발로 힘있게 디디고 있는 받침돌의 거북은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다.앞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5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새긴 구름무늬와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한 모습이다. 등중앙에는 비를 꽂아 두었던 네모난 홈이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거북받침돌의 양식적인 변천을 볼 때, 9세기 부터는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게 되는데, 서악리 귀부는 거북머리의 원형을 잘 지니고 있어, 한국 석비 받침돌의 최초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삼국통일 후인 7세기 중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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