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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성덕왕릉 (사적 28호), 에밀레종으로 잘 알려진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끈 성덕대왕의 능

younghwan 2011. 10. 1.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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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덕왕과 효소왕은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손자이자 신문왕의 아들로 통일신라 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으로 경주에서 불국사로 가는 국도와 철도가에 토함산 동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이 평지와 만나는 곳에 나란히 능을 마련해 놓고 있다. 문무왕대에는 왜(倭)의 침입에 대해서 상당힌 긴장했던 것으로 보이며, 문무왕의 능을 동해 대왕암에 수중능으로 마련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들인 신문왕과 손자인 효소왕, 성덕왕은 일본이 침입할 수 있는 예상 통로라고 할 수 있는 울산과 경주를 연결하는 큰 길가에 나란히 마련하고 있다.

 성덕왕은 당나라와 외교문서를 전담하는 통문박사를 설치하고, 당나라에 약43회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는 등 당나라왕의 교류를 적극적으로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유교에도 많은 관심을 가져 당나라에서 가져온 공자와 중국 선현들의 초상화를 대학에 두었다. 정전을 실시하여 재정적인 기반을 튼튼히 하였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발해를 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가 중단하였으며, 대동강 이남을 통일신라의 영토로 확정된 시기이기도 하다.

 왕릉은 밑둘레가 46m, 지름이 14.5m, 높이가 5m로 신라왕릉에서 조선왕릉에까지 이어지는 전형적인 왕릉의 봉분규모로 유교와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이면서 정형화되어가는 모습을 잘 부여 주고 있다. 봉분의 둘레에는 둘레석을 세우고 바깥쪽에는 삼각형의 돌로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 받침 사이에는 화강석을 깎아 만든 십이지신상을 방향에 따라 세워 놓고 있으며, 바깥쪽에는 난간을 둘러세웠다. 정면에는 상석을 설치하였는데 규모가 큰 편이며 서구의 신전 등에서 볼 수 있는 제단과 비슷한 형태이다. 무덤 주위에는 사자상을 입구에는 문인석을 배치하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거북받침돌이 남아 있다.



성덕왕은 당과 적극적인 교류을 통하여 당의 제도와 유교문화를 많이 받아들였던 왕으로 왕릉의 조성에 있어서도 후대 왕릉의 모범이 되는 규모와 형태를 만들어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신라왕릉의 형식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원성왕의 괘릉에서 볼 수 있었던 서구 신전 제단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상석이 성덕왕릉 앞에도 놓여 있다. 성덕왕릉에서부터 왕릉의 형식적인 면이 정형화되어 갔다고 볼 수 있다.


성덕왕릉을 둘러싸고 있는 돌로 만든 난간.


붕분의 둘레에는 화강석을 잘 다듬은 둘레석을 쌓아 두고 있으며, 각 기둥을 삼각형 모양의 돌로 받치고 있는 형태이다.


십이지산상이 부조상으로 새겨져 있는 괘릉이나 김유신묘와는 달리 입체적인 조각상을 세워 놓고 있다. 많은 불상에서 볼 수 있는 현상처럼 십이지신상의 머리부분은 대부분 남아 있지 않다.


성덕왕릉에 세워진 십이지신석상


왕릉의 네모서리에는 4기의 사자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3기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는 사자상, 문인상 등 석물을 세워놓는 전형적인 왕릉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는 형태이다.


성덕왕릉 사자상


성덕왕릉에는 무인석 1쌍이 세워져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만 온전한 모습을 하고 있고, 하나는 일부만 남아 있다.


머리부분만 남아 있는 무인석


용도를 알 수 없는 석물


성덕왕릉에서 떨어진 남쪽편에는 비석을 세웠던 거북받침돌이 남아 있다.


경주 박물관에 전시중인 성덕대왕신종. 이 종은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의 공적을 알리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으며 혜공왕이 771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큰 종으로 에밀레종이라고도 부른다. 후대에 만들어진 범종의 모범이 되었다고 볼 수 있는 동종이다.


성덕왕릉 전경.



신라 성덕왕릉 (사적 28호), 경주시 조양동 산8
이 능은 신라 33대 성덕왕(재위 702~737,김흥광)을 모신 곳이다. 토함산의 서쪽에 있는 형제봉의 동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말단부에 위치하고 있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의 뒤를 이어 36년 동안 통치하면서, 안으로는 정치를 안정시키고 밖으로는 당과 외교를 활발히 하였으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무덤은 밑둘레가 46m, 지름이 14.5m, 높이가 5m이다. 면석 사이에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십이지신상이 입체로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능 주위에는 돌사자와 문인석이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이 파손된 채 남아 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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