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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서악동 진흥왕릉 (사적 177호)과 진지.문성.헌안왕릉

younghwan 2011. 9. 27.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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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형산상 서쪽에 있는 선도산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 서악동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4기의 왕릉이다.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태종무열왕릉과 서악동 구분군에 비해서 봉분의 크기가 작고 잘 꾸미지 않은 왕릉으로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등 신라를 크게 중흥시키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진흥왕을 비롯하여 그의 아들이자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의 왕릉, 신라 쇠퇴기에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제압한 문성왕과 그 뒤를 이은 헌안왕의 왕릉이 나란히 있다. 이 곳에는 4기의 왕릉 외외에도 약 10여기 정도 정비되지 않은 신라귀족(?)의 무덤으로 보이는 고분들이 능선을 따라서 들어서 있다.

 진흥왕 신라 역사에 있어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왕으로 전국각지에 그가 다녀간 순수비를 남아 있는 왕이지만, 그가 남긴 업적과 위상에 비해서는 그의 능은 봉분크기도 일반 귀족층의 봉분에 비해서도 작은 편이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아들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무열왕의 할아버지로 통일신라를 이끌어간 왕들의 선조가 되는 왕이지만 그 위상에 걸맞지 않게 봉분은 작은 편이다. 이는 진흥왕의 예를 따른 것으로 보이며, 통일신라 쇠퇴기에 왕위를 이었던 문성왕, 헌안왕 또한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당대의 다른 왕릉에 비해서 작은 규모의 왕릉을 진흥왕릉 아래에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이 곳이 공식적인 왕릉의 위치로 인정하고 있지만, 봉분의 크기가 작어서 그런지 추사 김정희는 태종무열왕릉 뒷편에 있는 큰 봉분들을 진흥왕을 비롯한 기록에 남아 있는 태종무열왕릉 뒷편 4기의 왕릉으로 추정한 바가 있다. 이 곳 서악동에 왕릉을 조성한 왕들은 주로 한강유역에서 세력다툼을 벌이거나, 지방 호족세력을 견제하고자 노력했던 왕들로, 한반도 내륙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로에 왕릉을 조성하여 그들의 의사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종무열왕릉 옆에 있는 마을 뒷산에 위치한 4기의 왕릉인 진흥.진지.문성.헌안왕릉이다. 경주에 있는 다른 왕릉에 비해서 정비가 깨끗하게 되어 있는 편은 아니며, 숲속에 자리잡고 있다.


이 곳에 위치한 왕릉 중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한 신라를 크게 중흥시킨 진흥왕의 능이다. 봉분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면서, 장식성도 배제하고 있다. 아래에 있는 3기의 왕릉은 이 능을 형식을 따라서 봉분을 작게 하고 있다.


진흥왕릉 봉분. 신라왕릉 중에서는 봉분이 작은 편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북한산 진흥왕순수비(국보3호)

진흥왕순수비가 세워져 있던 북한산 비봉(사적228호)

함흥부근에 세운 황초령 진흥왕순수비 탁본


창녕 진흥왕 척경비(국보33호)


단양적성비 (국보198호)


신라 진흥왕릉 (사적 177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제 24대 진흥왕(재위:540~576, 김삼맥종)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 서북쪽에 있는 선도산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주능선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지름 20m, 높이 5.8m되는 타원형 봉토분으로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돌렸으나, 지금은 대부분 묻혔고 몇 개만 표면에 노출되어 있다. 왕은 안으로는 화랑제도를 마련하고, '국사'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여 국력을 다졌고, 밖으로는 가야를 병합하고 한강 유역에 한산주를 두는 등 영토를 크게 넓혔다. 그리고 새로 개척한 영토를 순시하고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 등의 순수비를 세웠다. <출처:경주시청>


진흥왕릉 아래에 위치한 진지왕릉.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거칠부세력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으나, 국정을 문란하게 운영하고 황음에 빠져서 재위 4년만에 폐위되면서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되는 족강을 당한 왕이다. 진골로서 처음 왕위에 오르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태종무열왕의 할아버지에 해당한다.

신라 진지왕릉 (사적 178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1
이 능은 신라 25대 진지왕 (재위:576~579, 김사륜/김금륜)이 모셔진 곳이다. 밑둘레 53m, 높이 3m의 봉분을 둥글게 쌓아 올린 보통 크기의 무덤이다. 진지왕은 법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이다.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부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서 외교관계를 맺었다. <출처:경주시청>


헌안왕은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어서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신라 쇠퇴기 지방 호족세력이 조금씩 세력을 키워나가던 시기에 집권했던 왕으로서 신라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진흥왕릉 아래에 진흥왕과 비슷한 규모의 작은 봉분을 쌓아 왕릉을 조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성왕의 괘릉이후 적용된 12지신상들 둘레에 새기고 석물 왕릉앞에 조성하는 당나라풍의 왕릉양식을 배제하고 진흥왕릉의 양식을 적용한 것도 왕조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왕릉의 위치 또한 내륙의 호족세력을 제압하고자 하는 의도로 내륙지역과의 교통로에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신라 헌안왕릉 (사적 179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47대 헌안왕 (재위:857~861, 김의정)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왕릉과 함께 선도산의 남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말단부의 능선상에 위치해 있다. 지름 15.3m, 높이 4.3m 되는 이 능의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무덤을 보호하고 봉토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하였드나, 지금은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신무왕의 동생으로 조카인 문성왕의 뒤를 이은 왕은 저수지를 수리하여 흉년에 대비하게 하는 등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다. <출처:경주시청>


헌안왕릉 옆에 있는 내력을 알 수 없는 무덤


4기의 왕릉 중 제일 아래쪽에 위치한 문성왕릉. 문성왕은 신무왕의 아들로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지방호족 세력을 견체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던 왕이다. 왕릉의 위치 또한 그의 노력은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라 문성왕릉 (사적 178호), 경주시 서악동 산 92-2
이 능은 신라 46대 문성왕(재위:839~857, 김경응)이 모셔진 곳이다. 진흥.헌안왕릉과 함께 선도산의 남족 구릉 말단부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능의 지름은 20.6m, 높이는 5.5m이다. 신무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여 나라를 통치하는 데에 어려움이 많았으나,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추사 김정희는 '신라진흥왕릉고'에서 무열왕릉 위에 있는 서악동 고분 4기를 진흥.진지.문성.헌안왕릉으로 추정한 바 있다. <출처:경주시청>


4기의 왕릉 아래쪽에는 모전석탑 계열의 서악동삼층석탑이 남아 있다. 이 곳에 석탑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곳에는 왕릉을 지키는 원찰개념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석탑의 존재가 이 곳에 있는 고분이 왕릉이었음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왕릉 맞은편 능선에는 약 10여기 정도의 정비되지 않은 봉분들이 남아 있다.


울창한 송림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잡초가 무성한 고분


주로 능선부에 고분들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추사 김정희가 진흥왕릉을 비롯한 4기의 왕릉으로 추정한 무열왕릉 뒷편에 위치한 서악동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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