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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창녕지역 비화가야(빛벌가야)를 편입한 이후 진흥왕이 이 곳을 다녀간 후 기념으로 세운 기념비이다. 북한산, 함초령, 마운령비와 함께 진흥왕순수비로 여겨지는 비석으로 국보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자연석 앞면에 비문을 새겨두고 있는데 앞면은 닳아서 읽을 수 없고 후반부에는 수행하던 신의 명당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의 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비문 내용중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아낳아 척경비로 일컫고 있으나, 비분의 내용과 성격 등을 고려해 볼 때 북한산을 비롯한 다른 순수비와 동일한 성격으로 보는 의견이 많아 보인다.
창녕읍 공원에 위치한 진흥왕 척경비. 원래는 창원 동쪽편 화왕산 목마산성 기슭에 있는 것을 일제강점기에 이 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비석모양을 한 중원고구려비와는 달리 자연석에 글을 새겨놓고 있다.
자세히 본 창녕진흥왕척경비 내용. 글씨가 조금씩 보이기는 하나 일반인이 읽기는 좀 힘들어 보인다.
이 비석의 뒷면에는 어떤 장식이나 글씨도 새겨놓지 않고, 자연석 그대로 이다. 신라 비석의 특징으로 보인다.
1920년대 일제강점기에 목마산성이 있던 비석을 이 곳 창녕읍 중심에 있는 공원으로 비각을 세워 옮겨놓고 있다. 이 곳 공원에는 대원군 척화비, 창녕객사 등 여러 문화재를 모아 놓고 있다.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巡狩: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下州)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기사를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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