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시 서쪽편에서 경주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는 서악동 동쪽 언덕에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 5기의 고분 중 제일 앞쪽에 위치하고 있는 사적 20호로 지정되어 있는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다. 무열왕릉의 위치는 약간의 언덕위에 있어서 경주시가를 굽어보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다. 또한 대구 등 경북지역에서 경주로 들어오는 국도 입구에 태종 무열왕릉이 있는데 아마 이는 중국의 사례를 참고한 듯 하다. (적의 침입이 있을때 왕실이 물러서지 않고 선조의 능을 지킨다는 의미로 가상의 적이 가장 먼저 오는 곳에 대부분의 왕릉이 있고, 서울의 경우도 1번국도로 신의주로 가는 통일로에 서오능, 서삼능 등 가장 많은 왕릉이 있다.)
무열왕릉 봉분은 밑지름 36.3m, 높이 8.7m로 원형봉토분 형태를 하고 있으며 발굴이 되지는 않았지만 굴식동방무덤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봉분에 비해서 장식이 소박한 편이고 무덤주위에 자연석을 돌렸다고 하지만 지금은 잘 보이지 않고 있다. 무덤 앞에 국보 25호로 지정된 무열왕릉비가 있어 신라 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정확하게 왕릉주인을 알 수 있는 무덤이다.
신라 29대왕인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이자 어머니는 진평왕의 딸 천명부인이다. 백제를 제압하기 위해 연개소문을 만났으며, 당나라에 여러 차례 왕래하면서 외교적 성과를 얻어 삼국토대의 기초를 이루었다. 654년 진덕여왕을 이어서 진골의 신분으로 최초로 왕이 되었으며, 당나라오 연합하여 660년에 김유신 등과 함께 백제를 멸망시켰다. 그는 이전의 신라와는 달리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료체제와 군사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국가체제를 확립한 인물이다. 그의 재위기간 동안에 삼국을 통일하지 못하고 그의 아들인 문무왕대에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무덤. 삼국시대 고분에 비해서 큰 편은 아니며, 후대 통일신라의 왕릉에 비해서 장식 또한 많지 않은 편이다. 봉분의 둘레에는 자연석을 둘러 쌓았다고 한지만 지금은 흙속에 파묻혀 잘 보이지는 않는다.
경주와 대구를 연결해주는 오래된 국도변에 자리잡고 있는 태종무열왕릉 입구. 앞쪽에는 그의 아들인 김인문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경주에서 형산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려가면 경주를 굽이 볼수 있는 산이 보이고 산구릉에 여러곳의 왕릉들이 있다. 이 곳에 신라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태종 무열왕릉이 있다.
왕릉 출입문을 들어서면 이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국보 25호로 지정된 태종무열왕릉비가 있는 비각이 눈에 들어 온다.
당나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든 것으로 보이는 비석은 글자가 적혀진 몸들은 없어지고 거북양의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화강석을 세련되게 조각하여 만든 이 비석은 후대에 세워진 많은 비석에 영향을 주었다.
비각이 서 있는 무열왕릉 입구.
태종무열왕릉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이 조성되어 있는데, 아마도 조상을 숭배하기 위해서 많은 문중에서 옛왕릉을 꾸밀때 조선왕릉의 양식을 적용한 것으로 생각된다.
태종무열왕릉 앞에 놓여진 혼유석. 조선왕릉과 양식이 많이 다른 것으로 볼 때 무열왕릉을 조성할 때 놓여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뒤쪽에서 본 무열왕릉
태종무열왕릉 주위에 심어진 소나무. 곧게 자라지 못해서 자연스러운 멋이 있는 전형적인 경주지역 소나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열왕릉 뒷편 서악동 고분군에서 내려다 본 태종무열왕릉.
무열왕릉 뒷편에서 본 경주시가지. 옛날의 풍경을 상상해 보면 태종 무열왕릉에서 경주를 보면 황룡사탑이 우뚝서 있는 모습이 보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지방에서 경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아마 감탄을 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무열왕릉 뒷편에는 삼국시대 신라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4기의 고분이 있다.
4기의 고분이 나란히 서 있는 경주 귀족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서악동 고분군.
서악동 구분군에서 내려다 본 무열왕릉을 둘러싼 송림과 경주시가지
이 무덤은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능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 김춘추는 신라 중대(中代)의 첫 진골(眞骨)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출처: 경주시청>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에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약 1,000년 간의 역사의 흔적들이 아주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왕과 귀족들의 무덤이 그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아주 잘 보존되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답니다. 그 여러 무덤들 중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세 분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어 신라의 찬란했던 역사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고 있습니다. 먼저 태종무열왕의 능은 경주 교외의 선도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큰 밥그릇을 엎어 놓은 것 같은 원형봉토분입니다. 다른 신라의 왕릉들이 이름은 전하지만 그 주인을 확실히 알 만한 증거가 별로 없는 데 비하여, 무덤 앞에 태종무열왕릉비라는 비석의 일부가 남아 있어 어렵지 않게 신라 29대 태종무열왕의 능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태종무열왕 김 춘추는 앞선 진덕여왕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고, 또 그동안 신라의 왕위를 이어오던 성골 신분이 끊어지자, 그 바로 아래 단계의 왕족인 진골 출신으로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왕이 되기 전에 이미 고구려와 당, 일본 등지를 오가며 국력이 커지고 있던 신라가 삼국간의 경쟁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기초를 닦았습니다. 특히 당의 세력을 끌어들여 신라를 지원하도록 한 것이 김춘추의 공이었지요. 그는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던 김유신의 누이와 결혼함으로써 신라의 왕이 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른 지 7년만인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의 주도권을 신라가 쥐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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