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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 유적_고분

경주 금척리 고분군(사적 43호), 경주 외곽에 소재한 삼국시대 신라 귀족의 무덤

younghwan 2011. 9. 24.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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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43호로 지정된 금척리고분군은 대구와 경주를 연결해주던 옛 국도가 지나가는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에 소재한 삼국시대 신라의 고분군이다. 건천읍소재지에서 경주방향으로 약 2km 정도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 이 고분들은 경주 시내 평지에 위치한 고분들보도 그 규모가가 작아서 삼국시대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척리 고분군은 박혁거세왕이 병을 고칠 수 있는 하늘로 부터 받은 금척을 숨기면서 40여기의 봉분을 조성했다는 전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금척리 고분군은 모두 50여기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데 현재 봉분형태로 남아 있는 것은 32기가 확인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에 국도를 개설하면서 동서로 나누어져 있으며, 당시 훼손된 2기의 고분이 조사되었다고 한다. 그 뒤 몇차례 조사기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전제적인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은 곳으로 출토유물 중 많이 알려진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봉문은 대체로 원형과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삼국시대 초기에 많이 사용한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을 하고 있다.



금척리고분군은 건천읍에서 경주로 연결되는 옛 4번국도 양쪽으로 넓은 지역에 32기의 봉분 중 서쪽편 봉분들. 경주 대릉원의 고분들에 비해서는 그 규모가 작기는 하지만 꽤 큰 규모의 봉분들이다.


고분군들은 주로 북쪽편 건천읍 방향 도로변에 많이 모여 있다.


금척리고분군 입구에 있는 고분. 이 곳에 있는 고분들 중에서 중간정도 크기의 봉분을 하고 있다.


도로 변에 있는 고분들


고분군 북쪽편에 있는 고분들 중에서는 꽤 큰 봉분이다. 그 옆으로 약간 훼손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고분이 있다.


고분군 중앙에 위치한 약간 큰 규모의 고분


주위의 고분들도 대체로 큰편에 속한다.


도로에서 본 중앙에 모여 고분들


제일 북쪽에 위치한 작은 고분


금척리 고분군 중 서쪽편에 떨어져 있는 큰 규모의 고분들


서남쪽에 위치한 고분들이 제일 규모가 큰 것으로 보인다.


금척리고분군을 가로지르는 옛 4번국도. 1950년대에 경주와 대구를 연결해주는 이 국도를 개설하면서 고분의 일부가 훼손되었다고 한다.


도로변에 심어준 코스모스 너머로 보이는 옛 고분들에서 가을 정취를 느끼게 한다.


도로 동쪽편은 서쪽에 비해 봉분의 크기도 약간 작은편이고 그 숫자도 서쪽편에 비해서 적은 편이다.


동북쪽에 모여 있는 고분들


동쪽편 중에 있는 고분들은 상대적으로 봉분의 크기가 작아 보인다.


동쪽편 중앙에 있는 작은 고분들


남쪽편에서 본 금척리고분군 중 동쪽편 고분들


서남쪽에는 안쪽으로 큰 고분들이 있고, 바깥쪽으로는 작은 고분들이 보인다. 북쪽편에 비해서 고분들이 많이 모여 있지는 않다.


금척리고분군 중 제일 큰 규모의 봉분으로 쌍분 형태를 하고 있다.


고분 바깥쪽에 볼 수 있는 가을을 알리는 코스모스.


금척리 고분군 무덤형태인 돌무지덧널무덤은 신라의 독특한 무덤으로 4세기 이후에 왕이나 지배계층의 무덤양식으로 금관을 비롯한 많은 부장품들을 묻어두고 있다. 무덤들 쌓는 형식 덕분에 도굴을 피할 수 있어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경주 금척리 고분군(사적 43호), 경주시 건천읍 금척리
이 고분군은 모두 50여기로 이루어져 있다. 부분적으로 발굴조사한 결과 돌무지 덧널무덤으로 밝혀졌으며, 통일신라 이전의 왕족이나 귀족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현재 흙으로 무덤 위를 둥글게 쌓아 올린 고분 32기가 확인되고 있다. 혁거세왕이 죽은 사람을 살리고 병든 사람을 고칠 수 있는 금척을 하늘에서 받았는데, 중국에서 이를 탐내므로 여기에 감추었다는 전설이 있어 마을 이름을 '금척리'라 부른다. <출처:경주시청>

* 자료참조: 1. 브리태니커,  2. 위키백과,  3. 네이버백과,  4.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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