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노동리고분군은 신라의 궁성이었던 월성 북서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마립간시기의 신라 왕과 귀족들을 무덤인 대릉원의 끝단에 위치한 고분군이다. 원래는 여러지역으로 나뉘어 관리되어 노동리고분군이라고 했지만, 대릉원 주변 고분들은 시기적, 지리적으로 동질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대릉원의 일부로 분류하고 있다. 이 곳은 경주도심과 제일 가까이 있는 까닭에 가장 빠른 시기인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노동리고분군은 왕릉으로 추정되는 신라고분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봉황대와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현재 봉분은 없어지고 그 터만 남아 있는 금령총과 식리총이 있다. 금령총은 봉황대 남쪽에 있는 작은 봉분으로 1924년 일본인에 의해 조사발굴이 되었었는데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이다. 금령총에서는 국보 91호로 신라를 대표하는 토기인 도제기마인물상을 비롯하여 많은 토기류와 금관(보물 338호) 등이 출토되었다. 식리총도 1924년에 같이 발굴되었는데 귀걸이, 은제허리띠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경주 노동리 고분군은 3기의 고분이 있는데, 그 중 신라 최대의 고분이 봉황대만이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오른편 봉분의 일부만 남아 있는 것이 식리총이고, 왼편에 옛 터만 남아 있는 것이 금령총이다.
옛 경주를 대표하는 장면으로 자주 등장하는 봉황대이다. 도심 가까이에 있는 작은 동산처럼 생긴 신라 최대의 고분인 봉황대이다. 밑둘레가 250m에 이르는 큰 고분으로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워낙 규모가 큰 고분이라서 그런지 아직 발굴은 되지 않고 있다. 옛 사진에는 어린애들이 뛰어노는 장면으로 많이 등장하는 것 같다. 고분에 심어진 나무가 크게 자라서 그런지 베어내지 않고 있으며 봉황대 특유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노동리와 노서리의 고분들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 중 봉황대에서 자라는 나무가 인상적이다. 앞쪽에 무릎높이 정도의 봉분이 있었던 자리가 신라를 대표하는 토기인 국보 91호인 도제기무인물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금령총이다.
금령총은 1924년 일본인 우메하라가 발굴조사하였는데 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널을 만들고 돌과 흙을 쌓아서 봉분을 만든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신라 황금문화의 전성기였던 마립간 시기 중 후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많은 껴묻거리들이 출토되었다. 이 무덤에 묻힌이는 신라의 왕자로 추정되고 있으며, 무덤의 주인공을 묘사한 도제기마인물상에서는 죽음의 나라로 떠나는 주인공의 쓸쓸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금령총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방울. 경주 금령총에서는 금방울이 '금령총'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중앙박물관에서 전시중인 경주 금령총에서 출토된 말 탄 사람 토기(기마인물형토기,국보)이다. 말 등에 둥근 깔대기와 가슴에는 액체를 따를 수 있는 긴 대롱이 있고 속이 비어 있어 주전자 형태를 하고 있다. 신라 토기 중 가장 인상적인 것으로 저승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무덤 주인과 그를 따르는 하인의 모습과 심경을 너무도 잘 묘사하고 있다.
금령총에서 출토된 신라를 대표하는 토기 중 하나인 등잔모향토기.
봉황대 앞쪽에 위치한 식리총. 봉분의 위쪽은 남아 있지 않고 아래쪽 일부만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1924년 금령총과 함께 발굴조사된 것으로 직경 30m, 높이 6m 정도로 추정되는 중간정도 크기의 고분이다. 이 곳에서도 많은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는되었는데 거북등모양 테두리에 중국의 영향을 받은 각종 동물들을 새겨놓은 금동신이 출토되어 식리총이라 부른다. 각종 금속용기,칠기,토기와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금관은 출토되지 않고 있으며 5세기 신라귀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식리총에서는 금동신을 비롯하여, 유리그릇, 청동제기 등 신라와 서역 또는 중국 등 대외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 많이 출토된 것이 특징이다. 무덤 주인의 살았을 때 활동이나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도 생각되기도 한다.
경주 식리총에서 출토된 것으로 신발의 바닥으로, 거북등무늬 안에 짐승얼굴무늬와 새가 있고 그 둘레에 가릉빈가(새 몸에 사람 얼굴).새.기린.날개달린 물고기 등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무늬들은 중국 청동거울 등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며, 신라와 서역과의
경주 노동리 고분군
이 고분군은 월성을 중심으로 서에서 북동방향으로 분포하는 많은 신라고분 중 서북편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고분들은 중앙에 나 있는 도로를 경계로 하여 노동리.노서리 고분군으로 나뉘어진다. 이 곳 노동리 고분군에는 고분 1기와 고분터 2기가 남아 있다. 남아 있는 무덤은 밑둘레 250m, 직경 82m, 높이 22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봉황대라고도 부른다. 남쪽에는 1924년 발굴 조사한 금령총과 식리총터가 있는데 내부 구조는 모두 돌무지 덧널무덤이다. 여기에서 금관과 도제 기마인물상을 비롯하여 많은 껴묻거리가 출토되었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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