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신라 궁성이었던 월성 서북방향으로는 신라 황금문화 절정기인 마립간 시기에 조성 된 것으로 보이는 고분군을 들어서 있다. 마립간시기는 내물왕에서 왕이란 호칭을 처음사용한 지증왕 이전까지인 4~5세기를 말하며, 돌무지덧널무덤과 화려한 황금문화 등 신라문화를 대표하는 특징들이 나타났던 시기이다. 예전에는 노서리, 노동리, 황오동, 미추왕릉지구 등으로 구분하여 사적지로 관리했는데 이들 고분들은 지역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으며 출토유물이나 무덤의 조성방식에서도 동일한 특징을 보이기때문에 지금 대릉원으로 일괄하여 부르고 있다.
노서리고분군은 신라왕릉에서 최초로 금관이 발견되어 세상을 깜작 놀라게 한 금관총을 비롯하여, 스웨덴국왕이 황태자 시절 경주를 방문하여 무덤발굴에 참여하여 금관을 발견한 서봉총, 해방 이후 발굴하여 광개토대왕 이름이 적혀진 청동그릇을 발견하여 이 일대 고분들의 시기적 특성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준 호우총, 봉황대에 비견할 정도로 큰 규모의 봉분이 있는 서봉황대 등 다양한 고분들이 모여 있다. 노서리고분군은 경주도심과 가까이 있어서 옛날부터 경주주민들이 생활했던 터전이었으며, 신라고분 중 이른시기인 일제강점기에 발굴.조사작업이 이루어진 곳이 많은 고분들이다. 지금은 경주도심과 가까운 특징때문에 고분공원으로 관광개보다는 경주시민들과 같이 하는 도심공원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관총은 1921년 경주 도심에서 주택공사를 하던 중 금관이 우연히 발견되어 신라고분의 존재에 대해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고분이다. 최초의 발굴작업이라서 체계적으로 발굴이 진행되지는 않아서 실제로 없어진 유물들도 많았을 것으로 생각되기도 한다. 금관총은 대릉원일대의 고분들과 마찬가지로 돌무지덧널무덤 양식을 하고 있으며 출토유물들은 금관을 비롯하여 귀걸이.팔찌 등 장신구와 토기류 등 다양형 종류의 껴묻거리가 함께 출토되었다. 금관총 출토 유물대부분은 현재 경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하고 있다.
뒷편에서 본 금관총. 관심을 가지고 보지 않으면 이 곳이 금관총임을 인식하기는 쉽지 않고 단순한 공원 조경으로 생각하기 쉽다. 현재는 봉분의 형태를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봉분의 일부만이 남아 있다.
경주박물관에서 소장.전시중인 금관총 금관. 국보 87호로 지정된 이 금관은 신라금관 중 최초로 발견된 것으로 높이 44.4cm, 머리띠 지름 19cm로 내관과 외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형적인 신라금관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금관총 시신에 있었던 덧널에서 출토된 유물들. 금관을 비롯하여 금제허리띠, 금.은 장신구로 등이 출토되었다.
경주 도심을 가르는 도로변에 위치한 금관총 전경
서봉총은 금관총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으로 1926년 일본인 발굴.조사를 하면서, 당시 방한했던 고고학에 조예가 깊었던 스웨덴의 구스타프 황태자를 참여시켰던 고분이다. 고분의 이름도 스웨덴을 의미하는 서(瑞)자와 봉황대를 의미하는 봉(鳳)자를 합쳐서 서봉총이라 부른다. 서봉총에는 금관을 비롯하여 각종 청동제 그릇과 금.은 장신구 등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봉분의 조성형식 또한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 형식을 취하고 있다.
서봉총은 발굴.조사작업 이후 봉분을 복원하지 않아서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정면에는 서봉총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구스타프 황태자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올려져 있다. 구스타프황태자는 스웨덴국왕으로 즉위했기때문에 해방 이후에서 스웨덴과의 친선관계를 강조하는 측면에서 이 기념비를 만들어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구스타프 황태자의 서봉총 발굴 참여 관련 이야기
보물 339호로 지정된 서봉총금관. 스웨덴의 구스타프 국왕을 황태자 시절에 초빙하여 같이 발굴한 유물 중하나로 넓은 관 테 위에 5개의 사슴뿔모양의 가지를 세워 올린 형태로 전형적인 신라 금관의 형태를 하고 있다.
서봉총 서쪽편 봉황대와 비견할 정도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서봉황대. 봉분의 크기로 볼 때 신라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봉황대와 마찬가지로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상당히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서봉황대. 정식명칭은 130호분이라고 합니다.
서봉황대 남쪽편에 있는 작은 고분으로 발굴조사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은 고분(132호분)이다.
132호분 남쪽에 위치한 마총이라 불리는 133호분.
노서리 고분군 중 두번째로 큰 고분인 134호분. 표주박형태의 쌍분으로 황남대총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서봉총 앞(북쪽)과 남쪽편에서 본 134호분.
노서리 고분군 중에서 세번째로 큰 135분. 이 고분 또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그 내용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노서리 구분들 중 봉분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들은 발굴이 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137호분은 통일신라 고분의 양식인 굴식돌방무덤으로 쌍상총으로 불린다. 1953년에 조사.발굴되었는데 내부는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한다. 출토유물로는 토기파편들과 청동제 문고리 1쌍, 빗장 1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호우총(140호분)은 노서리 고분군 중 그 규모는 작고 봉분도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경주 고분 발굴.조사에서 큰 의미를 가지는 고분이다. 이 호오총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에서 정식 발굴.조사한 첫 고분으로 광개토대왕 이름이 적혀진 청동그릇이 발견되어 대릉원 일대 고분의 시기적은 특성 등을 증명해주고 있다. 호우총에서는 금동관을 비롯하여 관식, 장신구, 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다른 무덤에 비해서 규모가 작고 순금보다는 금동으로 만든 유물이 많이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귀족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호우'글자가 있는 청동그릇, 고구려, 415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유물로 바닥에 그 연대를 알 수 있는 글자가 쓰여 있다. 광개토왕릉비와 같은 글자체의 글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을묘년'은 광개토대왕의 장례를 치른 다음해(415)이다. 따라서, 대왕을 장사지낸 1년 뒤에 고구려에서 만들어진 이 그릇을 신라사신이 가져온 것으로 추정된다.
호우총 옆쪽에 있는 옛 고분자로 추정되는 곳인데 은령총이 아닌가 생각된다.
노서리 고분군
노서리고분군에서 출토된 화려한 금목걸이.
금팔찌.
경주 노서리 고분군,
이 곳 노서동 넓은 평지에는 크고 작은 고분이 10여기 있다. 노동리의 봉황대고분과 더불어 그 규모에 있어서 쌍벽을 이루는 제130호 고분을 비롯하여 1921년 우연히 금관이 출토되어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한 금관총, 1926년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 6세가 발굴조사에 참여하여 금관이 출토된 서봉총, 194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그릇이 발견되어 신라 고분에 대한 연대 추정에 도움을 준 호우총, 그밖에 은령총, 쌍상총, 마총 등이 있다. 이들 무덤 중 대체로 봉분이 큰 것은 돌무지 덧널무덤이고, 작은 것은 돌방무덤과 구덩식무덤이다. 1984년 신라고분 정비 보존 사업의 일환으로 민가를 철거하고 지금의 모습을 정비하였다. <출처:경주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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