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기원전 15세기무렵부터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중국 동북지역과 한반도를 주무대로 하였다.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는 매장풍습인 고인돌의 분포를 통해 그 영역을 확인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서 벼농사가 확산되고 정착생활이 이루어지면서 큰 규모의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대체로 낮은 구릉지대나 평지에 마을을 이루고 살았으며, 평탄한 곳이나 구릉에 논과 밭을 일구어 벼,조,수수,콩,보리와 같은 곡식을 심었다. 이시기에는 이웃한 마을 사이에 경쟁이 생겨나고, 농경지를 둘러싼 분쟁도 많이 일었났다고 볼 수 있으며, 외부세력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마을 둘레에 도랑을 파거나 나무울타리, 망루 같은 방어시설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유적은 청동기시대에 나타난 대표적인 취락유적으로 다른지역에 비해 독특한 특성을 지녀 '송국리형문화'라고 부르기도 한다. 송국리유적의 특징 중 하나인 집터는 둥글거나 네모난 집터에 타원형의 구덩이를 파고 양끝에 기둥을 세운 후 서까래를 얹은 형태인데, 한반도 남부지역은 물론 일본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집터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민무늬토기를 묻고 돌뚜껑을 덮은 독무덤, 송국리형토기를 비롯한 생활도구, 집약적인 벼농사를 송국리문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송국리형 토기는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토기중 하나로 한반도 서남부 지방을 중심으로 발견되는 무늬없는 토기으 일종이다. 이 토기는 밑부분으로 내려갈수록 좁아지고 바닥은 평탄하며, 중간부분이 약간 부푼형태를 띠고 있다. 다향한 형태으 항아리가 있으며, 무덤으로 사용한 옹관도 출토되고 있다.
새로운 시대로, 농경사회의 서막
기원전 1,500년을 전후한 시점에 덧띠새김무늬토기문화가 등장하면서 청동기시대의 시작과 함께 농경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청동기시대 전기에는 짧은 빗금무늬가 새겨진 겹아가리토기, 구멍무늬토기, 구멍무늬에 다양한 무늬가 혼합된 토기 등이 사용되었다. 이 시기의 청동기인들은 2개 이상의 화덕자리가 설치된 긴 네모꼴의 집터에 여러세대의 가족이 함께 거주하였다. 이는 경작지 확보를 위해 많은 노동력과 이동성이 요구되는 화전 농경방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출처:부여박물관>
덧띠새김무늬 토기(Pottery with clay stripe, 금산 수당리), 겹아가리 토기(Pottery with double mouth rim, 금산 수당리),
팽이모양 토기(Top-shaped pottery, 대전 둔산동), 골아가리구멍무늬토기(Pottery with notched strip on rim, 천안 백석동 고재미골),
민무늬토기 굽다리바리(Mounted bowl), 천안 백석동 고재미골
골아가리 토기(Pottery with notched strip on rim, 서산 휴암리), 민무늬토기(Jar), 천안 백석동 고재미골
민무늬토기 완(Bowl), 천안 용정리
부여 송국리 유적. 부여 송국리 유적은 우리나라 최대의 청동기시대 유적 중 하나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1975년 이후 여러 차례의 조사를 통하여 60여 기의 움집과 돌널무덤.독무덤 등이 확인되었는데, 마을의 둘레에는 방어를 위해 나무울타리를 둘렀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다량의 불탄 쌀과 농공구, 요령식 동검, 청동도끼 거푸집 등을 통하여 본격적인 벼농사와 함께 청동기의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모형은 부여 송국리 유적의 자연환경과 발굴조사자료를 바탕으로 주변환경, 집터배치, 생산활동, 무덤 등을 약 1/35의 크기로 복원한 것이다. <출처:부여박물관>
부여 송국리 선사 주거유적지는 부여와 논산의 경계가 되는 부여군 초촌리 낮은 구릉에 자리잡고 있는 선사유적지이다. 구석기 주거지인 공주 석장리나 연천 전곡리와는 달리 신석기시대인 기원전 8~9세기 무렵의 주거유적지로서 동시대를 대표하는 다양한 유물들이 발굴된 곳이다. 이 곳은 전곡리나 석장리, 또는 서울 암사동 선사유적지와는 달리 강가에 위치한 것이 아니라 넓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벼농사와 관련된 볍씨를 포함하여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송국리형 집터, 청동기시대의 집터는 주로 평야나 하천에 가까운 낮은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금강유역에서는 둥근 집터와 네모난 집터의 중앙에 타원모양의 구덩이를 파고 양쪽 끝에 기둥을 세운 후 움 가장자리를 따라 서까래를 얹은 송국리형집터가 성행하였는데, 우리나라의 남부지역은 물론 일본에 까지 영향을 주었다. 이 모형은 부여 송국리 유적의 50~2호 집터를 55% 축소하여 복원한 것으로 내부의 인물은 70%, 유물은 실제크기로 제작한 것이다. <출처:부여박물관>
불탄쌀(Carbonized Rice), 부여 송국리, 청동기
세모돌칼(Triangular stone knives, 부여 송국리), 반달돌칼(Semilunar stone knife, 서산 휴암리), 청동기
돌도끼(Stone Axe, 부여 구봉리), 홈자귀(Grooved stine adze, 금산 황풍리, 보령 고성리)
돌끌(Stone chisel, 금산 대양리, 부여 송국리), 대팻날(Stone plane, 서천 당정리)
가락바퀴(Spindle whorl), 부여각지, 청동기
송국리형문화
부여 송국리 유적은 청동기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취락유적으로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독특한 특성을 지녀 '송국리형문화'라고 부른다. 주된 특징으로는 움집 중앙에 타원모양의 구덩이가 있는 송국리형 집터, 민무늬토기를 세워 묻고 그 위에 돌뚜껑을 덮은 독무덤, 그리고 송국리형토기.홈자귀.세모돌칼.소형 간돌검 등의 출현과 집약적인 벼농사에 의해 정착된 농경사회의 형성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송국리형문화는 금강 유역에서 발생하여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며 일본 북규슈지역까지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출처:부여박물관>
붉은간토기(Red-burnished pottery), 부여 송국리
붉은간 두귀단지, 민무늬토기 바리(Bowl), 부여 송국리
송국리형독널, 논산 마전리
송국리형토기, 논산 마전리, 서천 당정리
민무늬토기(서산 휴암리), 민무늬토기 바리(부여 송국리)
송국리형 토기, 부여 송국리
지배자의 등장
농경사회에서는 개별 가족 단위의 활동을 넘어 마을 전체의 단결과 공동노동이 중요해진다. 이에 따라 새로운 농경지를 둘러싼 분쟁이나 잉여생산물의 배분 등 갈등을 조정하고 사회통합을 이끌어내는 새로운 지배계급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 청동검이나 간돌검이며, 달도끼나 별도끼 등도 당시의 사회적 계층이나 권위를 대변하기도 한다. 고인돌의 축조와 같은 마을 지배자의 장송의례는 마을 전체의 공동행사로 지배자의 권위를 확고히 하는 동시에 농경사회 내부의 크고 작은 갈등을 완화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출처:부여박물관>
바퀴날도끼(Disk-shaped stone axe, 부여 송국리), 돌도끼(Stone axe, 부여 내지리), 청동기
간돌검(Polished stone dagger), 부여 시음리, 부여 가덕리
간돌검, 충남지역
간돌창(Polished stone spear), 홍성 고암리
화살촉(Stone arrowheads), 충남지역, 청동기
갈돌(Milling stone, 부여 구봉리, 부여 송국리, 보령 고성리), 화살촉(충남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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