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문학동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옛 인천도호부청사이다. 객사 일부와 동헌 건물이 남아 있는데 원래 건물을 일제강점기 이후 다른 용도로 사용하면서 건물에 많은 변형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들은 인천도호부가 처음 생긴 조선초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 기와 명문에 숙종대인 1677년(숙종3)에 중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후기에 크게 중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시에서 최근에 옛 인천도호부 관아건물들을 문학경기장 건너편 인천향교가 있는 언덕에 복원하였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들은 변형이 많이 되어서 그런지 옛 건물들을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겨두고 새로운 건물들을 신축.복원해 두고 있다.
인천도호부는 이 지역에 있던 지방행정기구로 종3품 부사가 고을 수령이었다. 원래는 부근에 있는 부평도호부가 한강 이남 강서지역을 관장하였기때문에 큰 고을이 아니었으나, 세조의 비인 자성왕후 윤씨의 외향이었던 까닭에 세조대에 도호부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인천은 인천항 주변 제물포지역, 문학산 주변, 부평과 계양구 일대를 포함하고 있으나 조선시대까지 제물포지역은 갯벌과 습지가 많아 개항전까지 주민이 많이 살지 않은 지역이며, 계양산 주변의 부평, 계양지역의 넓은 평야지대는 부평도호부 관할 지역이었고, 실제 인천도호부는 문학산 주변의 그리 넓지 않은 지역으로 백제가 처음 도읍을 정한 미추홀이 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천도호부청사, 인천시 남구 문학동
세조6년(1460)에 도호부청사가 인천에 들어 설 때 객사의 일부와 19세기 초의 건물인 동헌 남아 있다. 객사는 20칸의 규모였다고 전하나 지금은 중앙부의 정면3칸 측면 2칸만 남아 있다. 지붕의 기와에서 발견된 명문에 숙종 3년(1677)에 수리했다고 한다. 1950년 문학초등학교를 세우면서 동헌과 함께 지금의 위치로 옮겼기 때문에 당초 건물들의 배치형태를 알 수가 없다. <출처:인천시청>
인천시 문학동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옛 인천도호부 관아 건물. 고을 수령이 근무하던 동헌과 객사건물 일부가 남아 있으나 후대에 건물이 많이 변형되었다고 한다. <인천부읍지>에 따르면 객사 20칸, 동헌 10칸, 내동헌.삼문 등 많은 관아 건물들이 있었다고 한다.
인천부사가 근무하던 내동헌 건물. 앞면 6칸의 건물로 넓은 대청마루와 온돌방으로 구성된 다른 지역의 동헌과는 건물구조상 여러면에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이 건물은 1955년까지 인천사 문학출장소 건물로 사용하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길때 축수 건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인천도호부 관아 동헌
인천향교 옆 언덕에 복원해 놓은 인천도호부 관아 동헌. 현재의 건물과 형태가 많이 다르며, 다른 지역에 남아 있는 동헌건물과 비슷하다.
동헌 건물 뒷편에 남아 있는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 객사건물. 원래는 20여칸에 이르는 큰 건물로 아마도 궐패를 모시던 중앙의 정청 건물 일부만 남아 있고, 인천으로 출장온 관리들이 머물던 숙소인 좌.우익랑은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인천향교 옆 언덕에 복원해 놓은 인천도호부 객사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남아 있는 노거수
문학초등학교 맞은 편 문학산성이 있는 문학산
인천도호부 청사
인천 문학초등학교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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