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때 칭다오 지역은 전국 36개 군 중 낭야군에 속했으며, 진시황과 한무제가 동쪽끝 낭야군까지 순행을 하면서 칭다오지역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남북조시대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사찰터에서 석조불상이 출토되고 있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 칭다오 지역은 교역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으며, 특히 송나라때 북방민족이 세원 정권이 서하, 요, 금의 압박을 받아 칭다오 지역에 있었던 판교진(현 교주시)을 제외하고는 산동반도에 있던 항구들을 폐쇄하였기때문 산동반도의 유일한 항구로 크게 발전하였다. 또한 원나라때에는 산동반도 교주와 래주를 관통하는 운항하게 개통되었다. 또한 명나라대에는 왜구의 침략으로 큰 해안지역이 큰 피해를 입었으며, 명나라와 청나라는 무역을 금지하는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늘어나는 대외교역으로 칭다오는 크게 번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칭다오 도심은 19세기 독일이 침략하기전까지는 작은 어촌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남북조시대 북위(北魏) 석불상, 2구의 석불상으로 각각 높이 1장8척(약4m)에 중량은 30톤 정도임. 속칭 '丈八佛'이라 부른다. 제작된 시기는 약 1400여년전 이며, 우산(于山) 동쪽 제나라 수도였던 임치(临淄)부근 용천사(龙泉寺)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남북조시대 석조불상(北朝石造像, 青岛市城阳区文營所), 칭다오시 청양구에서 1980년 法海寺(Fahai Temple) 출입문 부근에서 출토된 불상들로 북조시대에 조성된 것들이다. (provided by Qingdao Chengyang Historical Relic Preservation Office)
칭다오시 청양구에 위치한 법해사
법해사에서 출토된 주초석
북조(北朝) 석불상, . 2개불 불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왼쪽에는 '관세음보살', 오른쪽에는 '대세지보살이다. 약 1400년전에 조성된 것으로로 제나라 수도였던 임치 부근 용천사에 있던 것이라 한다.
북위(北魏) "상장팔비(双丈八碑)" 비석 머릿돌 (The top part of "Shuang Zhang Ba Stele").
This is the top part of the "Shuang Zhang Ba Stele" erected by Su Wanji, with four tortuous dragons at the top, inscribed with relief characters "Shuang Zhang Ba Bei Su Gong Zhi Song" in seal script on one side and a Buddha and intaglio characters "Xiang Zhu Su Wan Ji Qi Zhang Gong Yang" in regular script on the other side. The content of the inscriptions on the other side. The content of the inscriptions on the Stele is unable to be ascetained because the body part of the stone tablet is missing.
수대쌍배목선(隋代双体木船) 복원모형(Restoration Model of Wooden Catamaran in the Sui Dynasty). 1976년 山东省平度市(산동성 핑두시) 泽河(제헤강) 동안에서 출토된 수나라시대 목선을 복원한 것이다.
번성하는 판교진(板桥镇, prosperous banqiao town), 판교진(지금의 교주시胶州市)는 당고조6년(623년)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였으며, 요나라와 금나라의 압력을 받았던 시기에는 허가된 무역항 중 가장 북쪽에 있었던 항구이다.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로 유학할 때 판교진을 통해 송나라로 들어갔다고 한다.
북방천년고항(A Thousand-year-old Port in North China, 581~1368년)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와 원나라때 칭다오는 점차 문화의 교류와 통상을 위한 중요한 항구가 되었으며, 이는 이 지역의 경제적 발전을 가져왔다. 송나라때에는 서하, 요, 금나라의 압력으로 송나라는 산동반도 북쪽 해안에 있던 등주(Dengzhou,登州), 래주(Laizhou, 莱州)의 항구를 폐쇄하였다. 그 결과 판교(Banqiao, 현재의 교주胶州)는 산동반도에서 열려있던 유일한 항구가 되었으며, 중국 5대 항구(나머지는 광주(Guangzhou,广州), 천주(Quanzhou, 泉州), 항주(Hangzhou, 杭州), 명주(Mingzhou, 明州))의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판교의 번영과 송나라때 선박운송회사의 설립, 원나라때 산동반도 교주와 래주를 관통하는 교래운하(Jiaolai Canal,胶莱运河)의 개통은 칭다오에서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In the Sui, Tang, Song and Yuan dynasties, Qingdao gradually became an important port and a hub of cultural exchange and trade, which advanced the economic and cultural development of the area. In the Song Dynasty, with the invasion of the Xixia, Liao and Jin troops, the Song goverment closed the ports of Dengzhou and Laizhou on the northern coast of the Shandong Peninsula. As a result, Banqiao Town(presently Jiaozhou) became the only open port, and it was known as one of the five greatest seaport in China(The other four being Guangzhou, Quanzhou, Hangzhou and Mingzhou). The prosperity of Banqiao Town and the establishment of a municipal shipping company in the Song Dynasty, and the formal navigation of the Jiaolai Canal in the Yuan Dynasty were significant historical event of Qingdao. <출처:칭다오박물관>
판교진(板桥镇, prosperous banqiao town)에 관한 기록들
교주에서 출토된 북송대 철전(Iron coins unsearthed in Jiouzhou(Song Dyansty)
원나라대 기록들
라오산(崂山)에전 번성한 도교(Toaism in Laoshan, 기원전140~ 기원후 1368년)
도교는 창시자 노자를 숭배하고 도(道)와 덕(德)을 핵심사상으로 하는 중국 고유의 종교이다. 라오산에서 도교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라오산의 첫번째 도교사원은 한나라때 장연부라는 사람에 의해 지어졌다. 후에 많은 도교 사원들이 당.송대를 거치면서 지어졌다. 남송때 왕종양리라는 사람이 전진(Quanzhen, 全真)파라는 종파를 세우면서 라오산은 도교에서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원나라때 황제에 의해 도교의 수장이 임명됨으로서 라오산의 도교는 크게 번성하였다.
Taoism is a native religion of China which worships Laozi as its founder and takes "Tao" and "Virtue" as its doctrine. Taoism has a long history in Laoshan. The first nunnery in Laoshan was built in the Han Dynasty by a man named Zhang Lianfu. Later, more and more nunneries and temples apppeared in the subsequent Tang and Song dynasties. After the founding of Quanzhen Sect by a man nemed Wang Chongyang in the Southern Song Period, his disciples set up Taoism establishments in a number of places including Lashan. After Taoist Qiu Chuji was appointed Head Priest "in charge of national Taoism" by Emperor Gernghis Khan in the Yuan Dynasty, Laoshan Taoism began to flourish. <출처:칭다오박물관>
도교 사원과 도교에 관련된 기록들
라오산도교악기, 古琴(Taoist music instrument on Mount Laoshan, Chinese zither)
중국 타악기 운라(Chinese gong chimes, 云锣)
라오산의 도교 사원
도교 경전
라오산의 도교사원 분표(Distribution Layout of Taoist Temple on Mountain Laoshan)
명청시대 해상방어의 요지(An important place for coast defens in Ming and Qing Dynasties)
명왕조대에는 일본 상인, 부랑인, 무사들로 구성된 해적집단이 중국 해안지역에 출몰하여 주민들을 약탈을 일삼았으며 그들을 "왜구"라 부른다. 명나라 정부는 해안선을 방어하기 위해 많은 요새를 세웠다. 명나라와 청나라 정부의 해상교역 금지조치와 폐쇄정책에도 불구하고 항구를 통한 무역은 자본주의의 출현과 함께 빠른 속도로 증가하였다. 1860년대에서 80년대에 칭다오 항구는 빠른 개발을 경험하게 되며 경제의 중심이자 중요한 상업항구로 탈바꿈하였다.
In the Ming dynasties, many pirate ships crewed by Japanes warriors, businessmen and vagrants robbed, plundered and killed the coastal residents in China. They were termed as "Japanese Invaders". The Ming government set up large numbers of pickets along the coast to guard against intrusions by Japanese invaders. Despite the ban on maritime trade and closed-door policy in the Ming and Qing dynasties, harbor trades grew rapidly with the emergency of Capitalism. From 1860s to the end of the 80s, the port of Qingdao experienced rapid development and became an important commercial port and economic center. <출처:칭다오박물관>
방왜위소(防倭卫所), 명나라 홍무원년(1368년)부터 명조정은 칭다오 지역에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새를 쌓았다.
명나라때 칭다오지역 해안요새 병사를 사용했던 큰칼과 긴창 (Weapons used by soldiers in Qingdao)
<胶州志>에 기록된 왜구에 관한 기록, The record on soldiers capturing Japanese pirates in Qingdao in the Ming Dynasty.
명나라때 칭다오 해안 요새에서 병사들이 사용한 화포(Iron Cannon used by the soldiers of Naval office in Qingdao)
"同义兴Tongyixing"라는 상호가 적힌 나무로 만든 1말용기 (Wooden dou measure used by the "Tongyixing" firm in Jinjiakou)
A stone weight weighing 100 jin, i.e. 50 kilograms used by the Jinjiakou(金家口) Firm to check and adjust the precision of weighing scales by consensus.
금가구金家口에서 운항한 목선 모형(Model of wooden shipping vessels ofj Jinjiakou District.)
금가구金家口에서 운행한 목선 모형
금가구金家口에서 사용한 돌로 만든 용기. With the abolishment of the prohibition of sea trade, many harbors in the territory of Jimo started to be open to navigation. This is a weighing scale used by the "Tongyixing" firm in Jinjiakou which opened up harbor during the Tianqi period of the Ming Dynasty.
1845년에 사용된 회계장부(Acount book of "Yihen" store at Nagukou in 1845)와 주요 수출품이었던 청화백자(Blue and black porcelain bowl salvaged form the bottom of the sea in Jiaonan city during Jiajing reign in the Ming Dynasty.)
칭다오마을(靑岛村, Qingdao Village) 청나라말 오늘날 칭다오 도심일대에는 30여개의 자연부락이 있는 어촌이었다.
청나라말(1865년) 칭다오 천후궁 앞에 세워져 있던 비석이다.
칭다오 천후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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